53화
“왜…… 날 계속 찾았어요?”
밭은 숨을 내쉬며 그를 올려다보았다.
“아직도 못 알아냈어요?”
서흔이 고개를 살짝 끄덕이자 건욱이 낮게 웃었다. 그의 웃음이 그녀의 몸 안으로 느릿하게 퍼졌다.
“처음부터 당신이었어요. 내 곁에 있을 때도, 없을 때도. 난 항상 당신이었어.”
차민협의 약혼녀로 나타난 서흔을 보았을 때 느꼈던 배신감과 분노도, 더 커다란 마음 앞에는 무릎 꿇어야 했다.
“아직도 모르겠어요? 당신이 얼마나 커다란 권력을 갖고 있는지.”
그는 철저한 약자였다. 그의 심장을 한껏 움켜쥐고 흔들어 대는 서흔 앞에 그는 을일 수밖에 없었다.
“내 마음은 항상 변함이 없었어요. 당신만 날 좋아하면 되는데……. 쉽지 않았지.”
거침없는 고백에 서흔의 눈동자에 눈물이 고였다. 울컥하며 가슴 안에 숨겨 놓은 감정이 흘러나왔다.
“사랑해, 유서흔.”
듣기 두려웠고, 확인하기 두려웠던 건 결국 그의 마음이 아니었다. 속절없이 그에게 단단히 빠져 버렸던 그녀의 마음이었다.
“줄곧 당신을 오해했어요. 날 그냥 이용하는 거라고, 그렇게 오해했어요.”
엄마를 버린 아버지의 집안과 그녀를 멸시했던 차 회장은 다르지 않았다. 사람을 사람 대 사람이 아니라, 집안 대 집안으로 생각하는 사람들.
그들로 인해 힘들었던 엄마의 삶은 그녀에겐 굴레였다. 그녀의 인생 전반을 어둡게 드리우고 있던 그 굴레가 오히려 사람을, 제 마음을 제대로 보지 못하게 만들었다.
“날 기다려 줘서 고마워요. 날 다시 찾아와 줘서 고마워요.”
건욱은 눈물 한 방울까지도 모조리 받아먹겠다는 듯이 입술로 서흔의 눈물을 훔쳤다.
그녀를 향한 그의 마음이 찰랑였다. 서흔은 손을 뻗어 그의 목을 껴안았다.
“안아 줘요.”
“응?”
“얼른.”
서흔이 뜨거운 숨을 내뱉으며 고개를 들었다. 그의 입술을 찾는 얼굴이 발갛게 달아올라 있었다.
“돌겠네.”
건욱의 인내심이 하얗게 바닥을 드러냈다. 그녀를 탐하는 손길이 거칠고 뜨거웠다. 단단한 몸이 자신을 짓이기는 것 같았다. 그녀는 그에게 빨려 들어갔다.
아무 생각도 나지 않을 만큼, 오로지 서로만을 느끼는 시간이었다.
* * *
깜박 잠이 들었던 것 같다. 어스름한 새벽빛이 창가에 쏟아졌다. 어느 순간 눈을 뜨자 서흔을 바라보고 있는 눈동자가 보였다.
“차건욱 씨.”
“차건욱 씨가 뭡니까? 볼 거 안 볼 거 다 본 사이에. 이것, 저것 다 한 사이에.”
건욱의 짓궂은 농담에 서흔이 얼굴을 붉히며 시트를 꼭 붙잡아 제 몸을 단단히 가린다. 내리뜨는 눈동자 아래로 볼 언저리가 붉었다.
“……그럼 뭐라고 불러요? 건욱 씨?”
“그것도 조금 멀게 느껴지고. 이렇게 부르는 건 어때요?”
건욱이 싱긋 웃으며 말했다.
“자기?”
“미쳤어요?”
서흔의 목소리 톤이 한 층 높아졌다.
“자기가 어때서. 지금 그 발언은 자기라 부르는 모든 연인들이 미쳤다는 소리인가?”
덩달아 그의 눈썹 역시 까칠하게 산을 이루었지만 붉어진 그녀의 얼굴을 보더니 표정이 금세 풀어졌다.
“아까는 달아오른 얼굴로 안아 달라더니 고작 ‘자기’라는 단어에 이렇게 얼굴을 붉힐 수 있나?”
건욱이 달아오른 서흔의 볼을 손가락으로 톡톡 두드렸다. 서흔이 그의 손을 물렸다.
“하지 마요. 꼭 놀리는 것 같잖아.”
“놀리는 거 아닌데. 귀여워서 그런 건데.”
고개를 금세 숙인 그가 양 볼에 입술을 맞췄다.
“원래 이런 남자였어요?”
“이런 남자가 뭔데요?”
사랑스러워서 미치겠다는 듯이 물고, 빨고.
차마 말로 설명할 수 없는 서흔이 입술을 맞물었다.
“응? 이런 남자가 뭔지 설명을 해 봐요.”
꿀이 뚝뚝 떨어질 것 같은 남자의 눈빛에 녹아 버릴 것 같았다. 자꾸만 발끝이 간지러워 미칠 지경이었다. 이대로 더 있다가는.
“나 이제 그만 가 볼게요.”
서흔이 시트를 가슴 위로 힘주어 잡은 채 일어나려고 하자 금세 그가 그녀를 결박하듯 위로 올라탔다.
그의 양 팔과 양다리에 몸이 갇힌 서흔은 꼼짝도 못했다.
“좀 더 누워 있어요.”
건욱은 고개를 숙여 그녀의 귓불을 물었다. 그녀가 어깨를 움츠리면서도 입을 열었다.
“하지만…….”
망설이던 서흔이 무언가 떠올랐는지 건욱을 돌아봤다.
“어, 우리 밥도 다 못 먹고 그대로 놓고 왔어. 어떻게 해요?”
이제야 훤하게 불을 밝힌 A하우스 안에서 키스를 했던 사실이 떠올랐다.
혼이 나간 것처럼 그와 호텔 펜트하우스로 달려왔다는 것과, 두 사람만 쏙 사라진 A하우스는 그대로 있을 거라는 것도 생각났다.
“걱정 마. 유능한 도 실장이 정리했을 테니까. 당신은 당신 걱정이나 해.”
건욱이 그녀의 목덜미를 훑어 내려가며 눅진한 숨을 뱉어냈다.
“무슨 걱정이요?”
“너만 보면 달려들고 싶은 남자가 앞에 있잖아요. 오늘 잠잘 생각 하지 말아요.”
건욱은 어느새 시트를 아래로 내려 버린 뒤 점차 아래로, 아래로 얼굴을 내렸다.
* * *
주차장에 도착한 건욱은 느릿하게 계단을 올랐다. 며칠째 서흔도 못 보고, 출퇴근도 피곤하고. 이제 이 집에 머무는 것도 그만둬야겠다 생각했다.
다시 호텔로 돌아갈까 하다가 호텔은 호텔이지 집이 아니라고 단호하게 말하던 서흔이 떠올랐다.
그러면 집을 새로 얻어야 하나, 서흔에게 물어보고자 휴대폰을 꺼냈는데 화면이 대답을 않는다. 방전이다. 길어진 회의에 방전된 줄도 몰랐다니.
충전하는 대로 서흔에게 전화를 해야겠다 생각하며 1층으로 올라서는데 거실 한가운데 차 회장이 앉아 있었다.
무슨 일이지.
호출하면 호출했지 직접 움직이는 일이 드문 차 회장에 건욱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아, 휴대폰.
방전된 휴대폰을 떠올리며 건욱이 자리에 앉았다.
“오셨어요?”
건욱의 인사에도 차 회장은 아무 말 없이 서류 봉투를 그 앞으로 던졌다.
건욱은 봉투를 열어 확인했다. 안에는 사진 몇 장이 들어 있었다. 얼마 전 A하우스에서 키스를 나눴던 건욱과 서흔의 사진이었다.
이건 또 어디서 나셨을까.
건욱이 피식 웃자 차 회장이 노발대발했다.
“니가 돌은 기가. 그 여자가 미친 기가.”
차 회장은 믿을 수가 없었다. 동생의 약혼녀였던 여자와 건욱이 어떻게 이럴 수가 있는지. 다른 사람도 아닌 건욱이가 그랬다는 사실을 믿을 수가 없었다.
“아니다. 둘 다 돌은 기다. 미친 기다. 제정신이 아닌 기다. 아니면 사람이 이럴 순 없지. 사람이면 이럴 수 없다.”
생각하고 생각해도 믿기지 않은 일이었다. 이해할 수 없는 일이었다. 차 회장은 분노를 주체하지 못하고 고래고래 소리를 질렀다.
“처음 봤을 때부터 마음에 안 들었데이. 이런 요물인 줄 한눈에 알아봤데이. 집 안에 들이지 말았어야 했는데. 내 실수다, 내 실수야.”
그런데도 건욱은 담담히 듣고 있을 뿐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차 회장은 심호흡을 하며 화를 가라앉혔다. 이미 일어난 일 후회하면 무엇 하나. 다그치면 무엇 하나. 그것보다 앞으로의 일이 더 중요했다.
“수민이랑 결혼 서두를 기다. 그 더러분 여자는 당장 치워 뿌려라.”
“싫습니다.”
“뭐라고?”
혈압이 치솟고 머리에 열이 몰렸다.
건욱이가, 자신의 말이라면 뭐든 고개를 끄덕이며 고분고분 대답했던 건욱이가 그의 모든 말을 거부하고 있었다.
“제가 먼저 만났고 제가 먼저 사랑했습니다. 약혼은 민협의 계략으로 어쩔 수 없이 한 계약이었고 진짜도 아니었습니다.”
민협의 계략이었다니. 이건 또 무슨 소리인지. 차 회장은 이마를 짚었다.
“계략이든, 뭐든 상관없다. 그 여자는 절대 안 된다.”
“왜요? 저희 어머니 같아서요?”
건욱은 터질 것 같은 실소를 참았다.
“서흔이를 보면서 어머니를 떠올리시는 거 압니다. 뭣도 없는 여자, 수준이 맞지 않아 성에 차지 않는 여자, 얼굴만 반반한 여자. 그렇게 생각하시잖아요.”
“차건욱!!!”
노기 찬 소리가 들렸지만 상관없었다.
“저도 아버지 같을까 봐 그래서 이렇게 벌벌 떠시는 거잖아요. 차민협은 핑계고.”
역시 유구한 차씨 집안의 역사는 이렇게 되풀이된다. 건욱이 그 아버지에 그 아들이라는 건 이렇게 증명이 된다.
“그런데 어쩌죠. 저는 부인할 수 없는 아버지 핏줄인데. 저도 아버지처럼 제가 원하는 여자와 결혼할 겁니다.”
하지만 되풀이되는 역사 속에서 인간은 발전해 나가는 법이다. 그는 아버지와 같으면서도 다르니까.
“하지만 아버지처럼 살진 않을 겁니다. 사랑했지만 사랑을 지키지 못한 아버지처럼은 안 삽니다.”
“허락 못 한다! 당장 그 여자 치워 버리래이. 아니면 W그룹 니 못 준다.”
“허락은 필요 없습니다. 협박도 소용없고요. 승계는 받지 않을 거니까요.”
건욱이 자리에서 일어나 고개를 숙였다.
“그동안 감사했습니다.”
건욱은 후련하다는 듯이 자리를 벗어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