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2화
“그냥 그럴 것 같아서. 그래서 어떻게 됐어요?”
말을 돌리며 더 얘기해 보라고 재촉하는 건욱에 서흔은 고개를 갸웃거리며 다시 이야기를 이어갔다.
“아저씨가 여기 정원의 나무들을 다 가꾸셨어요. 가끔 저도 이곳에 데리고 와 주셨어요. 처음 이곳에 오던 날, A하우스에 있던 이 회화나무를 보고 한눈에 반했어요.”
얼마나 오랫동안 그 자리를 지켰을지 모르는 그 우직함, 푸른 잎에서 반짝 튀어나오는 하얀 꽃망울의 변화무쌍함, 모든 나쁜 것들에게서 우리를 지켜 줄 것 같은 강직함까지.
서흔은 완전히 압도당했다.
“그거 알아요? 옛날에 회화나무는 궁궐 마당이나 출입문 근처에 많이 심었대요. 잡귀를 물리치는 나무라고도 아저씨가 이야기해 줬던 게 지금도 생각나요.”
서흔은 웃으며 말을 이었다.
“그때부터 계속 아저씨를 따라다녔던 것 같아요. 나무 냄새 맡고, 만지고, 가꾸고. 너무 즐거웠어요.”
꽃과 나무 이야기만 하면 얼굴이 활짝 피는 여자를 보며 건욱 역시 그 시절을 떠올렸다.
“그럼 이 회화나무 아래서 주웠던 일기장도 기억납니까?”
“당연히 기억하죠! 그때 회화나무를 옮겨 심네, 마네로 호텔이 시끄러워서……!”
한창 신나게 말을 꺼내던 서흔이 말을 멈추고 건욱을 바라보았다.
“그런데 그걸 당신이 어떻게 알아요?”
“그 일기장이 우리 아버지 것이었으니까.”
건욱은 그 시절을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었다. 아버지가 돌아가신 후 건욱은 깊은 우울감에 빠져들었다.
자신을 버린 어머니와 세상을 등진 아버지.
세상 모두에게 버림받은 것 같은 상실감은 그를 어둠 속으로 끌어당겼다.
그는 이지를 잃은 인형처럼 할아버지인 차 회장이 시키는 대로 살아갔다. 유일하게 나서서 하는 일은 이 회화나무 아래 누워 있는 일이었다.
하지만 그것도 오래가지 못했다. 회화나무만 보면 건욱의 아버지가 떠오른다며 호텔이 좋지 않은 기운이 모두 그곳에서 나오는 거라고 주형이 강하게 주장했다.
주형은 회화나무를 옮겨 심어야 한다며 그래야만 호텔이 일어설 수 있다고 피력했다.
귀신을 쫓아야 할 나무가 귀신을 꼭 붙잡고 놓아주지 않는다며 무당까지 데려와 굿을 한답시고 호텔을 시끄럽게 만들기도 했다.
참 아이러니한 사실이었다.
건욱이나 차 회장은 그 회화나무를 보면서 이제는 존재했는지 희미한 기억 속의 주태를 떠올리며 그리워했지만.
주형은 매번 치를 떨었다. 결국 참다 참다 옮겨 심겠다는 핑계 아래 나무를 아예 치워 버릴 작정이었던 것이다.
호텔의 매출이 곤두박질치던 시점이라 차 회장은 주형의 의견대로 회화나무를 파내기로 결정했다. 그때, 마치 기적처럼 서흔이 아버지의 일기장을 발견했다.
[이거. 오빠 아버지의 일기장 같아요.]
17살의 서흔은 그에게 아버지의 일기장을 내밀었다. 일기장을 받아 든 그 순간 그의 삶은 완전히 달라졌다.
아버지의 일기장을 단숨에 읽은 건욱은 일기장에 관한 이야기는 숨긴 채, 회화나무를 유지하고 싶다는 의견을 냈다.
주태가 죽은 후, 건욱이 아버지를 언급한 것이 처음이었기에 놀란 차 회장은 건욱의 의견을 받아들였다.
그렇게 회화나무는 지금까지 W호텔에 남아 있을 수 있었다.
“……정말이에요? 말도 안 돼! 그럼 그때 매일 나무 아래 누워 있던 남자가 당신이었어요?”
“몰랐나?”
“당신은 그럼 내가 그때 그 여자아인 줄 알았어요?”
“당연히.”
“처음부터?”
서흔이 미간을 찌푸렸다. 회화나무를 장식하다가 떨어져 그의 품에 안겼던 첫 만남이 머리를 스쳤다.
“기억하지 못하나 싶긴 했는데 정말 몰랐던 겁니까. 생각보다 기억력이 별로야.”
건욱은 와인을 마셨다.
“기억력의 문제가 아니죠. 당신도 나도 너무 변했잖아요.”
그녀의 기억 속 건욱은 지금처럼 키가 컸지만 남자라고 하기엔 미소년의 이미지가 강했다. 아이와 남자의 경계 속에 있었다.
그랬던 그가 이제는 완연한 성인 남자가 되어 그녀 앞에 나타났으니 동일 인물이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그런 걸 핑계라고 하는 겁니다. 난 당신을 한눈에 알아봤으니까.”
진한 눈동자가 그녀의 안까지 파고들 것처럼 깊어졌다.
서흔은 갑작스레 긴장이 되었다.
“그때 일기장을 찾아 줘서 고맙다는 인사를 못 했어요. 당신에게 빚을 졌어요.”
가끔 건욱이 이야기하던 빚이, 10년 전 일기장을 찾아 준 것을 뜻한다는 걸 서흔은 깨달았다.
“우연히 발견한 것뿐이에요.”
별거 아니었다는 서흔의 말에 건욱은 고개를 내저었다.
“그때 그 일기장을 받게 된 건 내 인생에 가장 중요한 일이었습니다.”
어린 시절, 속속들이 알기 어려웠던 주태의 인생이 그 일기장에 기록되어 있었다.
그 안에서만큼은 여전히 주태가 살아 있는 것처럼 느껴졌다.
한동안 건욱은 일기장에 파묻혀 살다시피 했다. 그리고 그 일기장 덕분에 그는 삶의 목표를 정할 수 있었다.
“그런데 그 일이 있고 나서 얼마 후부터 보이지 않더군요. 정원사 아저씨도 나오지 않으시고.”
“……아.”
그즈음 아저씨가 교통사고로 세상을 떠났다. 그 후 서흔은 외주 작업을 하기 전까지는 W호텔을 찾지 않았다.
“계속 찾았습니다. 이름도, 나이도, 사는 곳도 모르는 희미한 기억 속의 그 아이를.”
“고맙다는 이야기를 하려고요?”
“단지 그뿐일 것 같아요?”
“……모르겠어요.”
그의 눈빛이, 꼭 무언가를 더 말하는 것 같았지만 서흔은 물을 수가 없었다.
“모르겠으면 알아내 봐요, 내 마음.”
건욱이 손을 뻗어 그녀의 머리칼을 쓰다듬었다. 두 사람 사이를 감싸는 공기의 밀도가 갑자기 촘촘해졌다.
짙게 풍기는 그의 숨결이 조금씩 가까워지자 서흔의 속눈썹이 파르르 떨렸다. 심장이 쿵쾅쿵쾅 뛰어댔다. 그녀는 자신도 모르게 눈을 감았다.
부드럽게 맞닿은 입술 속으로 제 것이 빨려 들어갔다. 끈적하게 얽힌 입술 사이로 달콤한 와인 향과 그의 체취가 뒤섞였다.
“하아…….”
서흔이 뜨거운 숨을 내뱉었다. 와인은 얼마 마시지도 않았는데 단번에 취기가 오르는 느낌이었다.
그녀인 듯, 그녀가 아닌 듯 경계를 알 수 없는 사이에서 건욱의 숨이 그녀의 모든 곳을 점령해 나갔다.
열이 올랐다. 그의 어깨 위로 올린 손에 파고드는 것처럼 힘이 들어가자 그가 눈을 뜨고 서흔을 바라보았다.
진하게 고이는 시선에 뺨이 붉어졌다. 알 수 없는 감각이 차올라 어쩔 줄 모를 때 그가 그녀의 손을 잡고 일어섰다.
그녀는 그가 어디로 이끄는지도 모른 채 그의 손을 꼭 잡았다.
* * *
둔탁한 문이 닫히자마자 건욱이 그녀를 벽에 밀어붙였다. 열기로 짙어진 눈빛의 그가 그녀의 입술을 물어뜯듯이 씹었다.
미치게 좋았다. 오래도록 찾았던 작은 소녀가 이 여자라는 걸 알았을 때부터 아니, 그녀가 제 품 안에 폭 떨어졌을 때부터.
“알겠어요? 내 마음.”
“…….”
갈급한 숨을 몰아쉬며 붉어진 얼굴로 서흔이 건욱을 올려다보았다. 건욱이 부풀어 오른 그녀의 입술을 손가락으로 긁었다.
“더 알려 줘요?”
느릿하게 서흔의 고개가 위아래로 흔들렸다. 건욱은 그녀를 번쩍 안아 들어 침실로 향하며 다시금 입술을 물었다.
비스듬히 포개진 입술 사이로 뜨거운 숨이 간헐적으로 새어 나왔다.
두 사람을 감싸는 열기를 부정할 수가 없었다. 침대 시트가 그녀의 손아래 엉켜 들어 무참히 구겨졌다.
굵은 손가락이 부드러운 살결 위를 유영했다. 조금씩 드러나는 하얀 피부에 점차 붉은 잔상들이 둥글게 퍼져 나갔다.
서흔은 제 목덜미에 밭은 숨을 뿌려 대는 그의 머릿결을 움켜쥐었다.
목덜미 위로 지분거리는 입술이, 살갗 위 간질간질한 그 감각이 뒤섞였다.
달아오르는 그 열기를 주체하지 못한 서흔이 몸을 뒤틀었다.
그 찰나의 순간을 포착한 건욱이 흐트러진 옷 사이를 파고들었다.
활짝 열어젖혀 모든 것을 드러낸 여자는 눈을 꾹 감은 채 가쁜 숨을 내쉬었다.
건욱이 바르르 떨리는 속눈썹에 입을 맞추자 숨어 있던 눈동자가 그를 향했다.
그가 그녀의 눈을 보면서 몸을 일으켰다.
“……왜.”
꼭 건욱이 자신을 두고 갈 것 같은 두려운 마음이 들었다. 서흔은 목이 막힌 것처럼 목소리가 잘 나오지 않았다.
건욱이 입꼬리를 말아 올리며 셔츠의 단추를 풀기 시작했다. 보기 좋게 걸쳐졌던 셔츠가 사라지자 탄탄한 상체가 드러났다.
그에게 고정되었던 시선이 흔들리며 고개를 돌려버렸다.
“어딜 봐요.”
곧은 손가락이 그녀의 턱을 붙잡았다. 욕망이 일렁이는 눈동자에 시선이 붙잡혔다. 그가 타액으로 촉촉이 번들거리는 입술을 물었다.
“날 봐야지.”
그녀의 입술에서 어찌할 도리도 없이 야릇한 소리가 흘러나왔다. 몸이 나른해지며 힘이 빠졌다.
“유서흔.”
“아……!”
넘실대는 감각이 그녀를 압도했다. 서흔은 그를 꼭 쥐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