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1화
“며칠째 자리에서 일어나지 못하고 계시답니다.”
차 회장이 그날 이후 앓아누웠다는 이야기를 들으며 주형은 거칠게 넥타이를 풀어 헤쳤다. 갑갑한 게 꼭 목을 조이는 기분이었다.
“별다른 얘긴 없으시고?”
지나가던 직원들이 주형을 보고 고개를 숙였다. 그는 대충 인사를 받으며 물었다.
“네. 전달받은 사항은 없습니다.”
W전자 사옥은 강남 한복판에 자리 잡고 있었다. 로비는 언제나 분주했고 특히 출근 시간인 지금은 더 그랬다.
주형이 걸음을 서둘러 부사장실로 들어갔다. 그가 자리에 앉자마자 오 상무가 뛰어 들어왔다.
“큰일 났습니다. 부사장님!”
호들갑을 떨며 다가오는 오 상무에 비서가 난감한 표정을 지었다. 주형은 눈살을 찌푸리며 비서를 내보냈다.
주형의 눈치를 기가 막히게 살피던 오 상무였는데 오늘은 눈치를 집에 두고 왔는지 아랑곳하지 않고 막무가내로 주형에게 서류를 내밀었다.
“이것 좀 보십시오.”
주형이 서류를 받아 들었다.
“어젯밤에 긴급 이사회가 있었답니다. 글쎄 거기서 부사장님이 해임안이 가결됐다는데. 이게 말이 됩니까?”
서류를 받아 든 주형의 손이 부들부들 떨렸다. 앓아누워 있다더니 이런 뒤통수를!
“이 노친네가 기어이!!”
어떻게 아들인 자신의 말은 듣지도 않고 군식구처럼 내치듯이 내칠 수가 있는지.
예전부터 그랬다. 차 회장은 유독 주형에게만 독하게 굴었다. 형만 싸고돌고 그는 늘 찬밥 신세였다.
“이게 다 그 새끼 때문에!”
유약했던 아비와는 다르게 차건욱은 건방지고 악랄했다.
“이렇게 당하고만 있을 순 없지.”
주형이 실성한 사람처럼 낄낄거리다가 한 비서를 호출했다. 한 비서가 들어와 고개를 숙여 인사했다.
“사람 좀 붙여.”
“차건욱 대표한테요?”
주형은 고개를 주억거렸다.
“혼자 죽을 순 없지.”
주형이 다시 낄낄 웃음을 터트렸다.
* * *
서흔은 늦은 오후 W호텔로 들어왔다.
지난번 건욱과의 식사 때문에 미뤄진 미팅은 메신저를 통해 진행되었다.
김 대리는 서흔과 차건욱 대표와의 관계에 대해 묻고 싶은 게 많은 눈치였지만 다행히 별다른 언급은 없었다.
오늘 김 대리를 만나면 무슨 말을 할까 고민도 했었다. 하지만 그녀는 이곳에 일을 하러 온 것이지 김 대리의 눈치를 살피러 온 것은 아니니 그가 무슨 말을 하든 넘어갈 작정이었다.
어차피 김 대리의 궁금증에 대해 대답할 말도 없었다. 두 사람의 관계는 쉽게 정의할 수가 없었다. 그건 앞으로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서흔은 기운을 내며 사무실 문을 열고 들어갔다. 팔도 어느 정도 움직일 수 있고, 이번 작업은 작은 규모라 스태프들 없이 그녀 혼자 진행하기로 했다.
밸런타인데이에 맞춰 선보인 호텔 객실 프러포즈도 성공적으로 마무리됐다.
날씨가 따뜻해지면서 이제는 A하우스에서도 야외 프러포즈 이벤트가 성황리에 진행 중이었다.
메신저 미팅 시, 서흔은 그녀가 구상했던 프러포즈의 내용을 구체화해 이미 김 대리에게 컨펌을 받은 상태였다.
서흔이 작업복으로 갈아입으려고 하는 찰나, 똑똑 소리와 함께 김 대리가 들어왔다.
“서흔 씨.”
“대리님, 안녕하세요?”
“잠깐 작업 전에 A하우스 먼저 살펴봐야 할 것 같은데. 나와 볼래?”
“작업복만 갈아입고 나갈게요.”
“지금 당장 가야 하는데.”
작업복 앞치마를 두를 시간도 없다는 듯이 김 대리가 채근했다. 서흔은 할 수 없이 얇은 코트를 걸친 차림 그대로 사무실을 나갔다.
“무슨 일 있어요?”
“현장을 먼저 살펴봐야 해서.”
“그래요?”
보통은 작업 전 서흔이 혼자 살펴보던 일이라 좀 의아하긴 했지만, 그녀는 그와 함께 A하우스로 향했다. 그때 전화벨이 울렸다.
“잠깐만, 전화 왔네. 서흔 씨, 나 통화 좀 하고 갈게. 먼저 A하우스에 가 있어. 금방 갈게.”
“네. 천천히 오세요.”
김 대리가 서흔에게 손짓하곤 전화를 받으며 다른 방향으로 걸어갔다.
서흔은 별다른 생각 없이 A하우스로 향했다. 하늘은 이미 밤으로 물들어 가고 있었다. 금세 어두워진 저녁에 하나둘씩 어둠을 밝히는 조명이 아름답게 빛났다.
참 아름다운 곳이다. 어릴 적 아저씨를 따라와 보았던 그때도 아름다운 곳이라 생각했지만 직접 밟는 지금은 이곳이 얼마나 멋진 곳인지 새삼 느끼게 된다.
“……어?”
상념에 빠진 채 걷다 도착한 A하우스는 평소와 다르게 수많은 조명들로 반짝였다.
작업하기로 되어 있는 장소는 이미 준비가 끝난 상태였다. 산뜻한 꽃냄새가 물씬 풍기는 A하우스는 어느 곳 하나 손댈 거 없이 완벽했다.
알 수 없는 의문을 안은 채 서흔은 한 걸음, 한 걸음 A하우스로 다가가다가 그대로 멈춰 섰다.
A하우스를 호령하듯 한쪽에 자리하고 있는 커다란 회화나무 아래 건욱이 서 있었다.
“차건욱 씨……?”
그 옆에는 야외용 테이블에 고소한 냄새가 폴폴 풍기는 저녁 식사와 와인이 간단히 준비되어 있었다.
“딱 알맞은 시간에 왔군요.”
“이게 뭐예요?”
“프러포즈 이벤트.”
“샘플인가요?”
“그렇다고 볼 수도 있겠네. A하우스에서 하는 첫 번째 프러포즈니까. 앉아요.”
“제가요? 왜요?”
“시연해 봐야죠. 해 봐야 괜찮은지 부족한 점은 없는지 알 수 있죠. 안 그렇습니까?”
말이나 못 하면.
서흔이 앉으려 하자 건욱이 의자를 빼 주며 편히 앉을 수 있게 도와주었다.
시연이야, 시연.
그녀는 그의 다정한 행동과 의외의 상황에 두근거리는 마음을 진정시켰다.
건욱이 그녀의 맞은편에 자리 잡고 앉았다.
“내년에 외주 업체 바꾸시려나 보네요. <플로라유> 대신 타 업체에서 샘플 작업까지 받아 보신 거 보면.”
서흔이 부루퉁하게 말했다. 그래, 가슴이 뛰는 건 설레서가 아니라 밥줄이 잘릴지 모르는 두려움 때문이었다.
“어때요? 마음에 들어요?”
“제 마음에 들고 아니고가 뭐 중요한가요. 갑님 마음에 드셔야죠. 대표님은 어떠신데요?”
“나의 갑은 당신인데.”
건욱이 웃으며 말을 이었다.
“당신을 위해 준비한 거니 말해 봐요. 어때요? 마음에 듭니까.”
“…….”
왜 내가 당신의 갑이야.
왜 나를 위해 이런 걸 꾸미는 건데.
자꾸만 심장이 간질거려 서흔은 그의 시선을 피하며 A하우스를 둘러보았다.
꽃과 오브젝트의 조화, 색 조합과 조명 배치 등 무엇 하나 나무랄 데 없이 완벽했다.
“참고로 지금 A하우스는 <플로라유> 팀에서 작업한 겁니다. 유서흔 씨를 위해 깜짝 이벤트로.”
“……진짜요?”
서흔의 눈동자가 동그래졌다.
서흔은 그동안 그녀 없이 진행한 외주 작업으로 바빴을 스태프 팀에게 오늘 휴가를 주었다.
그 때문에 야간 작업도 그녀 혼자 하러 움직인 거였는데. 팀원들이 이런 것을 준비했는지 몰랐다.
“어쩐지 완벽하다 싶었어요. 어디 하나 지적할 데가 없이 깔끔한 것이 누구의 솜씨인지 감탄했더니, 우리 팀이었네요.”
“마음에 들었다는 소리네.”
건욱이 웃었다. 서흔은 흠흠거리며 반박하지 않았다.
“자, 성공적인 작업과 더불어 프러포즈의 성공을 기원하며 건배합시다.”
건욱이 그녀의 잔에 와인을 따라 주곤 잔을 들어 올렸다. 서흔은 망설이다 와인 잔을 들었다.
어쨌든 그녀 팀의 훌륭한 솜씨를 인정받은 셈이니 축하주 한 잔 정도는 괜찮지 않을까.
“처음부터 꽃으로 꼬실 걸 그랬네요. 이렇게 좋아하는데.”
와인 잔을 빙글빙글 돌리며 건욱이 웃었다.
“나 그렇게 꼬신다고 막 넘어가고 그런 쉬운 사람 아니에요.”
서흔이 콧잔등을 찡그리며 아니라 반박했지만, 실상은 이미 반은 넘어갔다. 제 자신이 인생 최초로 싫어지려 하는 순간이었다.
“꽃은 어떻게 좋아하게 됐습니까.”
“음…….”
질문을 듣자마자 머리에서 심장이 뛰는 것처럼 쿵쿵 울려 댔다. 여태껏 어떻게 꽃을 좋아하게 됐는지 물어 준 사람은 없었다.
당장이라도 말을 하고 싶은 마음과 굳이 말할 필요 없다는 생각 사이에 잠시 고민하던 서흔은 결국 승복하고는 입을 열었다.
“나 사실 아버지가 없거든요. 처음부터, 그러니까 태어날 때부터 없었어요. 우리 가족은 늘 나랑, 엄마. 이렇게 단둘이었어요.”
그녀는 와인을 한 모금 마시고는 담담히 제 이야기를 풀어 냈다.
“그런 내 인생에 잠깐 아버지라고 부르고 싶던 분이 계셨는데 그분이 정원사였어요.”
행복한 시간은 짧았지만, 아저씨와 함께했던 기억은 지금까지도 오래도록 그녀를 붙잡고 놓지 않았다.
“아저씨는 이 호텔 정원사로도 일하셨어요.”
“10년 전쯤?”
“맞아요. 10년 전쯤에요. 어떻게 알았어요?”
서흔이 의아해 건욱에게 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