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0화
“가짜 약혼이잖아. 계약이라도 한 겁니까.”
놀라 커지는 서흔의 눈동자를 보며 건욱이 담담하게 말했다.
“!”
“당신 어머니의 빚 1억, 차민협이 변제해 줬지. 그 자식은 돈을 허투루 쓰는 인간이 아닙니다. 준 만큼, 아니 준 것보다도 더 많은 것을 가져오려는 인간이지.”
1억의 빚 변제 조건으로 차민협과 약혼한 사실을 건욱은 정확히 파악하고 있었다.
서흔은 입술을 깨물었다.
“차민협과 당신의 약혼 계약 같은 건 이미 지나간 일이니 상관없습니다.”
차민협의 머릿속이야 뻔했다.
건욱이 서흔에게 관심을 보이는 걸 알고 서흔을 자신의 약혼녀로 둔갑시켜 무슨 스캔들이라도 만들고 싶었겠지.
차 회장이 스캔들을 끔찍이 싫어하니, 그걸 약점 삼아 건욱을 본부장의 자리에서 끌어내리려 했을 것이다.
차민협이 간과한 것은, 유서흔이 생각보다 도덕적인 인간이라는 것이었다. 하나는 알고 둘은 보지 못하는 성급한 꼼수가 한계를 드러낸 것이다.
“그보다 중요한 건 당신이 다시 자유가 되었다는 사실이지.”
건욱의 말은, 마치 그녀의 약혼이 깨지기를 지금껏 기다려 왔다는 말처럼 들렸다.
일편단심으로 서흔이 다시 돌아오기를 기다렸다는 것처럼 들렸다.
“난 당신을 만나고 싶은 마음이 없어요.”
서흔은 더 이상 상처를 받고 싶지 않았다.
“이미 지나온 과거를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그렇게 돌아갈 순 없어요.”
“여전히 내가 당신을 속였다고 생각하는 겁니까.”
“…….”
“난 그 무엇도 당신을 속인 적은 없습니다. 말하지 않는 것이 오해를 불러일으켰다면 그건 사과하죠.”
오해라고? 생각해 보니 단 한 번도 직접 그의 입으로 거짓말을 한 적은 없었다. 그렇다고 한들 오해하게 둔 건 사실이지 않은가.
“그저 당신이 나를 생각해 주길 바랐어요. 내 입으로 말하기 전에 기억해 줬으면 좋겠다는 생각도 있었던 것 같고.”
“기억이라니? 무슨 기억이요?”
그러고 보니 건욱이 10년 전, 기억 등의 단어를 언급하곤 했었다. 그전에도 우리가 인연이 있었던 걸까?
서흔은 혼란스러웠다.
“글쎄……. 무슨 기억일까. 잘 생각해 봐요. 답은 다음에 알려 줄게요.”
건욱의 의뭉스러운 대답 끝에 노크 소리와 함께 웨이터가 들어왔다.
“식사 드리겠습니다.”
코스가 시작됐다. 서흔은 내내 혼란스러운 마음을 꾹꾹 누른 채 식사를 했다.
* * *
건욱은 아침 일찍 건너오라는 전화에 본채로 넘어가고 있었다. 봄 안개가 아스라이 피어나 안뜰 정원에 내려앉아 있었다.
그는 차분하게 걸음을 밟았다. 별생각 없이 지나던 길들이었는데 어느 순간부터 하나하나 눈에 들어온다.
늘 자리를 지키고 있는 황장목도, 어느 날 오후 서흔과 심었던 각시석남도. 각시석남은 어느새 새잎을 더하며 훌쩍 자라있었다.
언제나 시간은 변함없이 흘렀다. 아버지가 떠났을 때도, 서흔이 떠난 지금도. 밤이 지나고 아침이 오듯 나무는 자라고 꽃을 피웠다.
현관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서자 놀라운 손님들이 이미 자리를 잡고 있었다.
주형과 민협 옆에서 보았던 박 대리라는 수족, 그리고 그도 얼굴을 알고 있는 신인 배우 이정화. 여자는 따뜻해지는 날씨에도 두터운 코트를 입고 있었다.
건욱이 가볍게 고개 숙이며 인사하자 주형이 그를 보며 비릿하게 입꼬리를 틀어 올렸다.
“서재에서 기다리고 계십니다.”
이 집사의 안내의 따라 주형, 건욱, 이정화, 박 대리가 그 뒤를 따랐다.
노크와 함께 문을 열고 들어가자 차 회장이 소파에 앉아 차를 마시고 있었다. 탁자에는 이미 인원수에 맞게 다과상이 차려져 있었다.
주형과 건욱이 마주 보며 소파에 앉자 차 회장이 입을 열었다.
“그래. 다들 모였으니까 이른 아침부터 찾아온 이유가 뭔지 좀 들어보재이.”
차 회장의 말에 잠시 숨을 고른 주형이 묵직한 한 마디를 꺼냈다.
“교통사고 일으킨 범인을 찾았습니다.”
잠시 서재 안에 정적이 흘렀다. 차 회장의 시선이 건욱에게 달라붙었지만 건욱은 소리 없이 웃을 뿐이었다.
차 회장이 날카로운 표정으로 물었다.
“그게 저 여자란 말이고?”
“네.”
“왜? 뭐 때문에? 그리 간 큰 일을 저질렀단 말이가!”
차 회장의 눈동자가 분노로 이글거렸다. 주형이 눈짓하자 박 대리가 입을 열었다.
“상무님과 잠시 만났던 여자-”
“니가 말해 봐라.”
차 회장의 박 대리의 말을 끊으며 이정화를 바라보았다.
“뭐 때문에 그랬노?”
이정화가 주형과 박 대리의 눈치를 보며 눈동자를 굴렸다.
“그, 그게…….”
“민협이랑은 무슨 사이었나.”
하지만 차 회장의 기에 눌린 이정화는 떨리는 목소리로 대답했다.
“만나던 사이었습니다…….”
“그런데?”
“임신한 상태로 이별을 통보받았어요. 저는 받아들일 수가 없었어요……. 저는 여전히 민협 씨를 사랑하는데, 민협 씨가 갑자기 다른 여자와 약혼한다고 했어요……. 저는…….”
잔뜩 겁에 질린 이정화가 말을 제대로 잇지 못하자 주형이 끼어들었다.
“업자를 고용했더라고요. 브레이크를 일부러 고장 냈고 그게 사고로 이어졌어요.”
하, 차 회장이 한숨을 내쉬었다.
고작 사랑이니, 애증이니 그런 감정으로 이런 일까지 저질렀다는 게 믿을 수 없었다.
“그게 다라고? 겨우 애정 놀음 때문이라고?”
차 회장이 황당하다는 목소리를 높였다.
계획했던 대로 판이 깔렸다. 주형이 부들부들 떨며 입을 열었다.
“저도 그랬습니다. 사람을 죽이겠다고 마음까지 먹었는데 겨우 애정 놀음 때문이라니요. 믿기지가 않더라고요. 그래서 계속 추궁했더니 글쎄…….”
주형이 얼굴을 쓸어내렸다.
“내가 듣고도 믿을 수가 없어서…….”
배우 해도 손색이 없겠네.
쓸데없는 생각을 하며 건욱은 주형의 모습을 지켜보았다.
얼마나 준비했길래 이렇게 거창하게 판을 까시나. 그럼 장단이라도 맞춰 줄까.
건욱이 짐작도 안 간다는 듯이 물었다.
“대체 뭐길래 듣고도 믿지 못하셨습니까. 따로 사주한 사람이라도 있답니까?”
주형이 악귀처럼 표정을 구기며 건욱을 쳐다보았다.
“그래. 사주한 사람이 있다더구나.”
“그래요? 누굽니까? 그 사람이.”
주형은 태연하게 묻는 건욱에게서 고개를 돌려 이정화를 보았다.
그러자 이정화가 손발을 맞추고 온 듯이 손을 들어 건욱을 가리켰다.
“차, 차건욱 대표가 시켰습니다…….”
“뭐?”
벼락같은 소리가 차 회장의 입에서 터져 나오자 주형의 입가에 살짝 미소가 스치듯 지나갔다.
하지만 건욱은 담담하게 이정화를 바라보았다. 그러자 이정화가 다시 입을 열었다.
“차건욱 대표가 사주했다 말하라고……. 차주형 부사장님이 시켰어요…….”
“뭔 개소리야!!”
갑작스러운 궤도 이탈에 놀란 주형이 벌떡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정화가 자리에 주저앉았다. 그녀는 두꺼운 코트 주머니에서 녹음기를 꺼내 눌렀다.
[아마도 너에게 민협의 차에 손을 대라고 사주한 사람이 있을 거야.]
[누가…….]
[가령……. W호텔 대표 차건욱이라든가.]
정적이 내려앉은 서재 안에 주형의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이정화는 건욱을 보며 눈짓으로 말했다.
‘이제 다 된 거죠? 아이는 낳게 도와주실 거죠? 지켜 주실 거죠?’
건욱이 고개를 끄덕였다.
건욱은 주형이 이정화를 찾아내기 전 먼저 그녀를 찾아갔었다.
건욱은 아이만은 꼭 지키고 싶어 하는 이정화에게 약속했다. 아이만은 꼭 지켜 주겠다고.
대신 건욱은 이정화의 손에 녹음기를 쥐여 주었다. 그리고 주형은 그의 예상을 조금도 벗어나지 않았다.
“이, 이 새끼가!”
주형이 건욱의 멱살을 잡으려 달려들었다. 탁자 위에 찻잔이 엎어지고 과일이 쏟아졌다. 그렇지만 건욱의 슈트 하나 건드리지 못한 헛수고였다.
“그만!!”
“아, 아버지. 이건 다 모함입니다! 믿으시면 안 돼요. 이건 다 조작이고 싹 다 거짓말입니다.”
차 회장의 고함에 주형은 방향을 틀어 차 회장에게 매달렸지만, 언제부터 대기하고 있었는지 소란한 소리에 서재로 들어온 최 실장과 경호원이 그의 앞을 막아섰다.
차 회장이 이정화를 보며 물었다.
“아를 뱄다고? 민협이 아이가?”
이정화가 고개를 끄덕였다. 벌어진 코트 사이로 만삭의 몸이 보였다.
“하…….”
“이건 그냥 실수예요. 아이는 지우면 됩니다. 아예 존재하지도 않았던 것처럼 없애면 돼요.”
주형이 다급하게 끼어들었다.
“중요한 건 민협이가 죽을 뻔했다는 겁니다. 그게 다 저 새끼가 사주한 건데! 지금 저 연놈들이 짜고 거짓말을 하는 거라고요, 아버지!”
차 회장은 눈을 감았다 떴다. 분노로 얼룩진 눈가가 파르르 떨렸다.
“나가래이.”
차 회장이 눈짓하자 최 실장과 경호원이 주형의 팔을 잡고 끌어내기 시작했다.
“아버지, 내 말이 진실이라고요. 제발 내 말 좀 들어 주시라고! 아버지! 아버지!!”
주형의 고함이 한동안 집 안을 뒤흔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