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9화
딸랑거리는 소리와 함께 다경이 출근했다.
“나 혼자 오픈 준비할 수 있다니까.”
“누가 오픈 준비 못 한대? 얼마나 잘했는지 체크하러 온 거지. 어떻게 지냈는지 이야기도 나누고 같이 점심도 먹고.”
“가게 대신 봐 주느라 그동안 고생 많았을 텐데 좀 쉬지.”
“쉴 시간이 어디 있어. 빨리빨리 배워야 나도 <플로라유> 경쟁사 하나 차리지.”
“배울 것도 없으면서, 뭘.”
다경은 <플로라유>에서 알바를 하며 플라워 숍 창업을 준비 중이었다. 이미 창업을 해도 무리가 없을 정도인데 다경은 망설이고 있었다.
처음 서흔이 창업할 때처럼 확실치 않은 미래에 대한 막연한 두려움이 아닐까 싶어 서흔은 잠자코 기다리고 있는 중이다.
“그나저나 이야기 좀 해 봐. 어떻게 지냈어? 몸은 좀 어때? 차민협 씨와 파혼은 잘 끝난 거야?”
“뭐, 그냥 잘 지냈고. 팔은 보는 바와 같이 깁스도 풀었고. 재활 치료받고 있고. 많이 좋아졌고. 파혼은 잘 끝날 수가 있는 건가.”
차민협은 만나 보지도 못했다. 자신은 철저하게 차 회장에게 배제당했을 뿐이다.
그리고 어젯밤 차민협으로부터 계약을 종료한다는 간단한 메시지를 받았다.
그것만으로 서흔은 짐을 덜어낸 것 같았다.
“하긴, 즐겁고 행복한 이별은 존재할 수가 없지. 아무튼 점심은 뭐 먹을까? 유서흔 컴백 기념으로 이 언니가 쏜다!”
다경이 휴대폰을 들어 올렸다.
“글쎄, 뭐 먹지.”
서흔도 배달 어플을 켜서 무엇을 먹을지 메뉴를 구경하는데 휴대폰이 울렸다.
“어, 김 대리님.”
-서흔아, 어디야? 퇴원했다며?
서흔이 차 회장 댁에 머무는 동안, W호텔 측에는 그녀가 병원에 장기 입원하여 치료를 받는 것으로 말해 둔 상태였다.
일을 잠시 쉬어야 하는 명분에 대해 건욱이 먼저 손을 쓴 것이다.
“그 소식이 거기까지 갔어요?”
-몰랐어? 네 등에 CCTV 하나 설치해 둔 거.
“아하하. 그렇군요.”
여전히 썰렁한 농담을 하는 버릇을 버리지 못한 김 대리에 서흔이 어색하게 웃었다.
-몸은 좀 어때?
“많이 좋아졌어요.”
-다행이네. 그래도 교통사고 후유증은 좀 길게 간다니까 항상 조심하고.
“네.”
-일은 언제쯤부터 시작할 수 있어?
“안 그래도 그 일로 연락드리려고 했어요.”
아직은 그녀가 빠진 스태프 팀으로 운영하고 있었다. 그들에게도 미안한 마음이 있어 서흔이 빨리 복귀해야 하지만.
차건욱…….
한 사람이 마음에 걸렸다.
“저는 이번 주 주말부터 작업 가능할 것 같아요.”
여전히 W호텔의 대표 겸임 자리에서 내려오지 않고 있는 그였다.
더 이상은 마주치지 않았으면 하는 것이 솔직한 심정이지만 그런 이유로 일을 미룰 수는 없었다.
“괜찮을까요?”
-주말? 어, 괜찮을 것 같아. 다행이네. 다음 주부터는 예약이 풀이거든.
“네. 그동안 죄송했어요. 양해해 주셔서 감사하고요.”
-아니야. 사람이 아픈데 당연한 거지. 그럼 미팅도 할 겸 저녁에 호텔로 들어올래? 한 6시쯤. 밥 사 줄게.
“오늘요?”
-응. 안 돼?
“아…… 오늘은…….”
오늘은 다경이 휴가였다. 오랫동안 혼자 고생한 다경은 쉬고 서흔이 혼자 <플로라유>를 보기로 했는데.
-오늘 꼭 했으면 좋겠는데. 내가 오늘이 아니면 시간이 안 되거든. 주말 이후 스케줄도 상의해야 하고.
서흔이 난처한 듯 다경을 쳐다보자 다경이 괜찮다는 제스처를 보내왔다.
“알겠습니다. 대리님, 이따 들어갈게요.”
-그래, 휴, 이따 보자.
전화를 끊은 서흔이 잔뜩 미안한 얼굴로 다경을 쳐다보았다.
“쉬는 날인데 미안해.”
“괜찮아. 일이 먼저지. 지금 갑이 전화 주셨는데 감히 을들의 스케줄이 중요하니?”
“미안하다. 그럼 내일 다시 쉴래?”
“하, 유서흔 요거 눈치 빨라졌네.”
다경이 깔깔거리며 웃었다.
“좋아. 오늘만 날이니, 내일도 날이지. 모레도 날이고, 글피도 날이잖아. 아무튼 잘됐어. 오전에 쉬었는데 내일 또 쉬면 나야 땡큐지.”
“오케이. 점심은 내가 쏜다. 뭐 먹을래?”
서흔이 배달 어플을 켜며 휴대폰을 다경에게 넘겼다. 다경이 인생의 난제를 만난 듯 심각하게 미간을 구겼다.
* * *
저녁 5시, 서흔은 <플로라유>를 나섰다. 다경이 내년 외주를 따려면 바짝 엎드려야 한다며 미팅 잘하라고 큰소리로 파이팅을 외쳤다.
그녀는 버스를 타고 호텔로 향했다. 언덕으로 올라가는 길에 양옆으로 늘어선 벚꽃나무에 꽃봉오리가 맺혀 있었다. 곧 있으면 벚꽃이 흐드러지게 피어날 터였다.
약속 시간에 늦지 않게 도착한 서흔은 김 대리와 만나기로 약속한 호텔 레스토랑으로 향했다.
“당신이 왜 여기 있어요?”
그녀는 안내된 룸에 앉아 있는 건욱을 발견하고 놀라 물었다. 그녀와 만나기로 약속된 김 대리는 보이지 않았다.
“김 대리님은요?”
“미팅하러 온 거 아닙니까. 우선 앉아요.”
“지금 차건욱 씨가 김 대리님 대신 업체 미팅을 하러 왔다는 거예요?”
“아니, 당신과 저녁 먹으러 왔어요.”
하. 어이가 없을 정도로 당당한 태도였다. 그녀가 당연히 그와 저녁을 함께 할 거라 확신하는 태도였다.
“차건욱 씨와 밥 먹을 일 없어요.”
서흔이 나가려고 하자 건욱이 싱긋 웃으며 말했다.
“그럼 미팅할 생각은요? 나 여기 대표인 거 알잖아요. 추후 계약에 대해 할 얘기가 있는데.”
그때 똑똑, 노크 소리와 함께 웨이터가 들어왔다.
“이제 앉을 생각이 좀 듭니까?”
낮은 건욱의 목소리에 서흔은 자리에 앉았다. 을의 입장에서 미팅을 무작정 피할 수도 없었다.
보기 좋은 미소를 띤 웨이터가 메뉴판을 두 사람 앞에 놓고는 기본 커트러리 세팅을 하고 크리스털 잔에 물까지 따라 주었다.
자신의 할 일을 마친 웨이터가 꾸벅 고개를 숙이곤 룸을 나갔다.
“갑질이라는 생각 안 들어요?”
“당신과 밥 한 끼 먹기가 생각보다 힘들어서 ‘갑질’이든 뭐든 못할 게 뭔가 싶네요.”
“난 밥 먹자고 이곳에 온 게 아니에요. 미팅을 하러 온 거지.”
“미팅해요. 밥도 먹고. 김 대리랑도 그러려고 온 거잖아.”
“당신은 김 대리님이 아니잖아요.”
이래서 자꾸 호텔에 오는 것을 망설였는데. 차라리 대표직을 내려놓아 볼 일 자체가 없으면 좋으련만 무슨 연유인지 건욱은 W전자 혁신 전략 본부장과 W호텔 대표직을 여전히 겸임 중이었다.
“대표랑 미팅하는데 영광 아닌가?”
“……영광은 무슨.”
“나는 당신이랑 이런 시간을 가질 수 있어서 영광인데. 그래서 이런 짓은 수십 번도 더 할 수 있을 것 같아.”
“누가 보면 나랑 밥 먹고 싶어 죽은 귀신 붙은 줄 알겠어요.”
“그럴지도 모르겠군.”
건욱이 웃었다. 서흔은 깊은 한숨을 팍 내쉬면서 앞에 놓인 물을 마셨다.
“정말이지 차건욱 씨 고집은 아무도 못 말릴 거예요.”
“그래서 싫어?”
“대답하기가 싫네요.”
이상하게 차건욱과 이야기만 하면 자꾸 그의 페이스에 말려들곤 했다. 오늘은 어떻게든 그 페이스에서 벗어나려 했지만 역부족이었다.
“뭐 먹을까요?”
“아무거나요.”
“그럼 A코스로 먹읍시다. 맛있어요.”
“네, 그러세요.”
서흔은 모든 의지를 내려놓은 사람처럼 그가 능숙하게 웨이터를 불러 주문을 하는 것을 지켜보았다.
다시 둘만 남은 조용한 룸에서 서흔이 건욱을 바라보았다.
“미팅은 핑계일 테고. 밥 먹자고 여기까지 온 것도 이상하고. 무슨 일이에요? 바쁘신 분이.”
“남자가 여자한테 밥 먹자 하는 거면 뻔한 거 아닌가?”
“……글쎄요. 난 잘 모르겠는데요.”
모르는 척 고개를 돌리는 서흔을 보며 건욱이 피식 웃음을 터트렸다.
“처음부터 다시 시작해요, 우리.”
“뭘 시작해요?”
“다시 만나 보자는 말입니다. 처음 만나는 사람들처럼. 이번에는 유서흔 씨를 제대로 만나 보고 싶군요.”
“…….”
서흔이 두 눈을 깜박였다.
이런 순간의 건욱은 언제나 진심처럼 느껴진다. 그녀에게 강한 끌림을 느껴 갑질도 서슴지 않을 정도로, 그녀에게 저돌적인 대시를 하는 사람 같이.
마음이 순간 흔들린다. 아무것도 모른 채 그에게 끌렸던 그 처음으로 다시 돌아간 것처럼 마음이 쉼 없이 두근거렸다.
하지만.
“나 차민협 씨와 파혼한 지 얼마 되지 않았어요. 민협 씨의 사촌인 차건욱 씨와 이런 대화를 나누는 건 무척 부적절한 것 같아요.”
“상관없잖아. 차민협을 사랑해서 약혼한 것도 아닌데.”
“……그게 무슨 말이에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