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8화
“이걸 두고 갔다던데.”
건욱이 테이블 위로 쇼핑백 하나를 그녀 앞에 내밀었다.
“여사님이 가져다주래서.”
서흔은 힐끗 쇼핑백 안의 물건을 보았다. 정수민의 연주회에 갈 때 입었던 옷과 주얼리 세트였다.
“두고 갔다고 말하는 건 좀 이상하네요. 내 것이 아닌데.”
그녀는 빈 몸으로 그 집에 잠시 머물렀던 객식구에 불과했다.
호텔에서 지내는 것처럼 완벽히 준비된 것들을 빌려 쓴 것일 뿐 그녀의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그쪽들 체면 지키려고 가져다 놓은 물건들 잠시 제가 빌려 쓰긴 했지만 그걸 제 것이라 할 수는 없죠.”
서흔은 쇼핑백을 그에게 다시 밀었다.
“이건 당신 거 맞아요. 내가 선물로 준 거니까.”
“선물이란 말 농담 아니었어요?”
수민이 남자한테 거액의 목걸이를 받아내는 여자라고 했을 때, 서흔이 웃어넘길 수 있었던 건 제 것이 아니란 걸 알았기 때문이었다.
건욱과 그녀는 무언가를 주고받는 사이가 아니었고, 그는 정확히 그들의 체면을 위해 그녀를 치장하려 옷과 목걸이를 구입한 것이니까. 그 계산속에 대상이 누구냐는 그에게 고려 사항이 아니었을 것이다.
누구여도 받았을 선물.
그런데 지금 건욱은 마치 그녀만을 위한 선물이었다는 듯이 말하고 있었다.
“당연히.”
건욱이 고개를 끄덕였다.
“빚 갚는 거라고 했잖아요.”
“자꾸 빚이라고 이야기하는데. 나는 당신에게 무언가를 내준 적이 없어요.”
서흔은 서둘러 입을 다물었다. 그에게 함부로 내주었던 마음을 들킬 것 같아서.
건욱은 역시라는 듯이 웃었다.
“한 10년 전쯤?”
“10년 전이요?”
서흔이 건욱을 처음 만난 지는 몇 달이 채 되지 않는다. 그런데 10년 전이라니…….
기억을 더듬듯 움직이는 눈동자를 보며 건욱은 입을 열었다.
“처음이었어요. 누군가가 입어 주길 바라며 옷을 고른 것도, 누군가를 생각하며 목걸이를 산 것도. 모두 당신이 처음이었다고.”
에두른 말 따위는 없는 직선적인 건욱의 뜻이 그대로 그녀의 심장에 박혔다.
“…….”
혼란스러운 마음이 요동쳤다. 민협이 깨어나기 전 건욱이 그녀에게 했던 고백이 정말 진심이라도 된다는 것처럼 맑은 눈빛에 마음이 자꾸만 흔들렸다.
서흔은 눈을 꾹 감았다 떴다.
“이건 받을 수 없어요. 나는 더 이상 당신하고도, W그룹하고도 관계가 없으니까 필요하지 않아요.”
서흔은 받지 않겠다는 뜻을 굽히지 않았다. 이 옷과 주얼리가 누구의 소유인지는 중요하지 않았다.
그녀는 건욱의 마음처럼 느껴지는 것을 함부로 받을 수 없었다.
처음 그녀가 그에게 마음을 함부로 주었을지는 몰라도 이제 다시 그런 실수를 반복하고 싶은 마음은 없었다.
“가져가세요.”
“버리든지 말든지 마음대로 해요.”
건욱은 물러서지 않을 생각인지 다시 쇼핑백을 그녀 쪽으로 밀었다. 고집이 보통 센 남자가 아니었다. 그녀가 받기 전까지는 꿈쩍도 하지 않을 것이다.
“그럼 거기 두세요. 대신 이제 그만 나가주세요.”
서흔이 자리에서 일어나자 건욱도 선뜻 자리에서 일어났다. 서흔에게도 민협과의 일을 정리할 시간이 필요할 테니. 그는 천천히 다시 다가갈 생각이었다. 천천히.
“차 회장님의 방법이 옳다고 생각하진 않지만, 우리 인연도 여기까진 건 맞는 것 같아요. 더 이상은 차건욱 씨와 만나는 일……. 없었으면 해요.”
건욱과의 인연 역시 지금이 마침표였다.
“그동안 감사했습니다.”
서흔이 꾸벅 고개를 숙여 인사했다. 그와 이렇게 대면하는 것도 마지막이니 좋았던 일도, 나빴던 일도 다 모두 잊는다.
다시는 보지 않는다는 다짐만 남겨 둔 채.
“안녕히 가세요.”
“또 봅시다.”
건욱이 힐끗 그녀를 바라보곤 등을 돌려 집을 나갔다. 그의 등 뒤로 문이 쿵 하고 닫혔다.
* * *
VIP 전용 중환자실.
“집에 좀 가시래도.”
민협이 깨어난 이후 혜림은 아예 병원에 사는 것과 마찬가지였다.
그의 옆에는 전문 간병인이 상주해 있었다. 하지만 혜림은 늦은 저녁 집으로 돌아가 잠시 눈을 붙이고, 돌아와 다시 새벽부터 그의 곁을 지켰다.
“내가 어떻게 널 두고 가.”
혜림은 촉촉해진 눈빛으로 민협을 바라보았다. 민협은 서서히 건강을 회복하고 있었다. 모든 신호가 긍정적이었지만 일상생활의 복귀까지는 많은 시간이 필요했다.
이제는 생사를 다툴 걱정은 없었지만, 혜림은 아직도 하나밖에 없는 아들이 피투성이로 병원에 실려 왔던 그 순간을 잊지 못했다.
“엄마, 나 안 죽어요. 나, 이렇게 깨어났잖아. 절대 쉽게 안 죽어요.”
“알아, 알지.”
혜림은 민협의 가슴을 아기처럼 토닥토닥 두드렸다.
이 모든 것이 부적의 힘 같았다. 용한 무당이라고 하더니 역시 민협의 베개에 부적을 넣은 이후 아들이 기적처럼 깨어났다.
혜림이 한 번 더 무당을 찾아가 민협이 빨리 일어날 수 있도록 기도해 달라고 빌어야겠다, 생각하는데 민협이 입을 열었다.
“대체 누가 날 죽일 수 있겠어.”
민협의 눈빛이 순간 날카로워졌다. 대체 누가 이런 짓을 저질렀는지 범인만 잡으면 지옥을 맛보게 해 줄 생각이었다.
“그러니까 감히 누가 너를. 걱정하지 마. 안 그래도 네 아버지가 범인 잡았어.”
“진짜? 누군데?”
놀란 민협의 눈동자가 큼지막해졌다.
“이정화. 누군지 알지? 걔 도대체 뭐니. 사람이 얼마나 악독하면 너 약혼 소식 하나에 눈이 뒤집혀!”
“!!”
이정화가 임신을 핑계로 악착같이 매달리더니 같잖은 일을 냈구나 싶어 민협은 속이 부글부글 끓었다.
“이래서 엄마가 사람 조심하라고 늘 말했잖아. 자고로 크게 될 사람은 특히! 너 같은 위치의 남자는 젤 조심해야 할 게 여자라고 내가 그랬어? 안 그랬어?”
그가 혜림의 눈치를 보며 실실 웃었다.
“알았어요, 엄마.”
“그래도 이번엔 다행스러운 일이 되었어. 너도 깨어났고, 교통사고 사주한 진짜 범인도 찾았고.”
“진짜 범인?”
“그럼 그깟 여자 하나가 혼자서 어떻게 이런 사고를 낼 생각을 했겠니? 안 그래?”
“그럼 뒤에 누가 또 있다는 소리야?”
“그럼. 일부러 그 여자 찾아내서 조종한 사람이 있지. 너만 없애면 W그룹을 차지할 수 있을 거라고 착각하는 사람.”
“……!”
떠오르는 사람은 단 한 사람이었다.
차건욱.
“나 누워 있는 동안 아버지가 큰 그림 그리셨네.”
민협이 크게 웃었다. 실제적으로 차건욱과 이정화는 어떠한 연결고리도 없는 사람들이었지만. 뭐든 연결이 안 될까.
“그럼. 차근차근 다 아버지가 알아서 정리하실 테니까. 너는 아무것도 신경 쓰지 마. 그 약혼이란 것도 이제 잊어버리고.”
혜림은 미래가 무척 기대되었다.
“그리고 보니 그 여자는 어떻게 됐어? 내 약혼녀. 깨어나고 아직도 한 번을 못 봤네.”
“아휴, 민협아.”
혜림은 한숨을 푹 쉬며 사고 이후부터 차 회장이 민협의 약혼에 대해 알게 된 이야기를 풀어 놓았다.
“아버님이 너 깨어나자마자 쫓아내셨어. 알잖아, 아버님. 차주태 그 여자 이후로 더욱더 근본 없는 것들은 치를 떠는 거.”
“알죠, 아는데. 차건욱은요? 나 누워 있는 사이 그 여자랑 아무 일도 없었어요?”
차민협이 인상을 찌푸리며 물었다.
“일이 있을 게 뭐 있어. 아버님이 두 눈 시퍼렇게 뜨고 감시하셨는데.”
“하.”
차건욱을 위해 약혼까지 감행했더니 그가 사고를 당해 누워 있던 그 시간 동안 제대로 풀린 일이 하나도 없었다.
이래서야 1억이라는 돈까지 쓰면서 그 여자를 데리고 온 보람이 하나도 없지 않은가.
“아씨……. 아까운데.”
“아깝긴 뭐가 아까워. 나 그 여자 싫다. 그 여자 끌어들이고 나서 너 바로 사고 나고. 나는 그 여자 이름도 듣기 싫으니까 말도 꺼내지 마.”
“아, 그래도…….”
“아버님이 알아서 쫓아내셨다니까 신경 쓰지 마. 알겠어?”
화르르 불같이 화를 내던 혜림이 마음을 가라앉혔다. 아픈 아들을 두고 이럴 일인가 싶어 속상했다.
여전히 꺼칠꺼칠한 피부 사이로 링거부터 시작해서 온갖 기계를 연결한 채 누워 있는 아들을 보자니 다시금 눈물이 차올랐다.
“너 사고 나고 아버지랑 나랑 얼마나 후회했는지 몰라. 부모라고 너한테 맡겨 뒀다가 우리 소중한 아들 잃을 뻔했잖아.”
혜림이 눈물이 그렁그렁한 눈을 손수건으로 톡톡 두드렸다.
“나머진 네 아버지한테 맡기고. 너는 이제 건강에만 집중해. 알았어?”
“알았어, 엄마. 걱정 마요. 나 금방 털고 일어날 거니까.”
그럼, 무척 건강해져야 했다. 그래야 당당한 모습으로 차건욱이 무너지는 모습을 보지.
기다려라, 차건욱.
민협은 크게 웃으며 이제 그만 슬퍼하라고 혜림을 다정하게 안아 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