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7화
집으로 돌아가는 차 안은 고요했다.
처음 건욱과 왔을 때와는 다르게 앙상했던 가로수들이 어느새 푸른 옷을 입고 있었다.
서흔은 시트에 몸을 기댔다.
차 회장과 대화를 끝내고 별채로 돌아가니 이 집사가 이미 캐리어에 짐을 챙겨 둔 상태였다.
캐리어 속에는 그녀가 이곳에서 즐겨 입던 옷들이 들어 있었지만 그건 서흔의 것이 아니었다. 이곳에 있는 무엇 하나 제 것인 것이 없었다.
서흔은 이 집사가 넣어 준 짐들을 다시 꺼냈다. 건욱에게 선물 받았던 주얼리 세트와 원피스까지 모두.
이곳에 도착했을 때처럼 나올 때도 그녀의 손에 들린 건 처음 가져갔던 작은 가방이 전부였다.
서흔은 마지막으로 이 집사와 용산댁과 인사를 나눴다. 덕분에 편히 지낼 수 있었다는 감사 인사를 전하는 게 전부였다.
어디 갔는지 보이지 않는 주 대리에게는 마지막 인사조차 전할 수 없었다. 건욱에게도.
그래서 뭐. 인사는 전해서 뭐 할 건데.
서흔은 입술을 깨물었다.
이미 건욱과 이야기가 끝난 일인지도 몰랐다. 그런데도 건욱은 서흔에게 아무런 말 한마디 없었다.
차라리 잘된 일일지도 몰랐다.
처음 떠나라는 차 회장의 말에는 억울한 심정이 먼저 들었다.
이대로 끝내는 것이 맞는지. 최소한 민협과 대화는 나눠 봐야 하는 건 아닌지. 혼란스러웠다.
하지만 더 이상은 버티기 힘들었다.
그녀는 건욱에게 흔들리고 있었다. 그녀를 속인 건욱에게 선을 그으려 치기 어린 마음으로 민협과 약혼해 놓은 목적을 잊고, 그녀는 다시 속절없이 그에게 흔들리고 있었다.
건욱을 눈앞에 두고 마음을 정리하는 건 쉽지 않았다. 고통에 가까웠다.
이제 돌아가면 모든 것이 아무 일도 없었던 때로 되돌아갈 거라고 생각했다. 시간이 지나면 건욱도 잊히리라고.
서흔은 그렇게 생각하며 눈을 감았다.
* * *
주 대리의 전화를 받은 건 1시간 전이었다. 막 회의를 마치고 사무실로 들어왔을 때였다.
최 실장으로부터 해고 통보를 받은 주 대리가 집에서 나왔다는 이야기를 듣고 바로 서흔에게 전화를 걸었다. 길게 신호음이 울렸지만 전화는 받지 않았다.
어떻게 해야 하나 고민은 길지 않았다. 그는 재킷을 들고 사무실을 빠져나왔다.
차 회장이 이렇게 빨리 손을 쓸 줄은 몰랐는데 너무 안일했다 생각하며 건욱은 집으로 향했다.
주차를 하고 바로 계단으로 뛰어 올라가자 서흔의 방을 정리하고 있던 용산댁이 놀라 거실로 나왔다.
“본부장님이 이 시간에 웬일이세요?”
“유서흔은요?”
“벌써 나갔어요. 이야기 들으셨어요?”
그녀가 앞치마에 손을 닦으며 말했다.
“회장님이 부르시고 얼마 안 돼서 최 실장님이 데려다주고 오신댔어요.”
건욱이 용산댁의 말을 들으며 서흔의 방으로 들어갔다. 침대 위에 그녀의 옷가지들이 펼쳐져 그대로 남아 있었다. 그중에는 그가 선물한 원피스와 목걸이도 있었다.
“이 집사님이 짐을 싸주는데도 다 자기 것 아니라고. 가지고 온 것도 없다면서 빈손으로 나갔어요.”
대체 뭘 기대했던 건가. 그래도 그를 기다리고 있을 거라고? 메시지라도 남겼을 거라고? 아니면…….
여자는 건욱과의 모든 것을 끊어 내듯 목걸이 하나, 옷 하나조차 담지 않고 떠났는데.
한심해서 웃음이 나왔다.
“그래도 몇 달 같이 있었다고 정들었나 봐요. 이제 못 본다고 하니까 서운하고 그러네.”
용산댁이 흩어져 있는 옷들을 정리했다.
“객식구였잖아요. 떠나면 편해야죠.”
“어이구 편하긴.”
건욱의 말에 용산댁이 눈을 흘겼다.
“본부장님도 서운해서 그러시죠? 인사라도 하고 가면 좋았을 텐데.”
그러게. 인사도 없이 갔네.
“전화라도 한번 해 봐요. 그쪽도 오랜만에 집에 가고 하니까 정신이 없어 전화할 생각도 못 했을걸.”
용산댁이 슬쩍 건욱의 눈치를 보며 말했다. 차 회장댁에서 일한 지 벌써 30년 세월이었다.
한쪽 귀는 막고, 혀는 함부로 놀리지 않고, 본 것도 못 본 척 지내 온 세월이었지만, 촉 하나만큼은 뛰어남을 숨길 수가 없었다.
“회장님이야 인연이 아니라 생각하실 수 있지만 본부장님까지 그럴 필요 있어요? 두 분 보니까 친해 보이던데. 사람 인연이 가족이나 연인으로만 묶이는 게 아니잖아요. 친구가 될 수도 있고, 지인이 될 수도 있고, 그런 건데.”
처음엔 차민협 상무의 약혼녀로 집에 들어왔지만 용산댁 생각에 서흔은 분명히 건욱과 미묘한 끈이 있었다.
단순히 서로를 알고 있는 것 이상의 무엇이 있었다. 분명히.
“지금이야 회장님한테 서운하고 상무님하고도 헤어졌으니 본부장님 보는 것도 어색할 수 있겠지만. 처음 만났을 때처럼 천천히 다가가다 보면 다시 친해지고 그런 거죠. 사람 인연이란 게 그렇게 쉽게 끊어지는 게 아니에요.”
“…….”
건욱이 느리게 눈을 감았다 떴다.
그래. 처음부터 천천히. 나를 원하는 마음이 조금은 남아 있기를 바라며 천천히.
건욱은 용산댁이 정리하고 있던, 그가 선물했던 원피스와 주얼리 세트를 챙겨 들었다.
“그건 뭐 하시려고?”
“주인 가져다줘야죠. 여사님이 입기엔 색깔이 너무 강렬하잖아요.”
“아닌데요. 나 빨간색 좋아하는데요.”
“그럼, 드릴까?”
“농담이지. 이렇게 조그마한 옷을 내가 어떻게 입어요.”
용산댁이 서랍장에 넣어 두었던 상자를 꺼내 원피스와 주얼리 세트를 넣어 주었다.
“안 그래도 이 옷들을 아가씨 아니면 누가 입나, 이렇게 두면 아깝지 했어요. 대표님이 좀 갖다줘요. 택배 보냈다가 잃어버리기라도 하면 어째, 이 비싼 걸. 뭐 해요, 안 갖다줘요?”
“알겠습니다.”
건욱은 대답하며 주차장으로 향했다. 겨울이 가고 새로운 봄이 오고 있었다.
* * *
현관문을 열고 집 안에 들어서자마자 꼭 남의 집에 온 것 같은 낯선 기분이 들었다.
“오랜만이라 그런가.”
평생 이렇게 20평이 채 되지 않는 작은 평수의 집에서 사는 게 익숙했고, 몸을 누일 수 있는 집이 있음에 감사했는데 오늘따라 무척 작아 보였다.
서흔은 우선 다경에게 집으로 돌아왔다는 메시지를 보냈다. 그리고 창문이란 창문은 모두 활짝 열었다.
“숨도 잘 못 쉬었겠네.”
창문 앞에 일렬로 늘어서 있는 화분들에 물은 부족하지 않았는지 먼저 살폈다. 다경이 중간중간 들여다본다고 하더니 꽃들이 쌩쌩했다.
서흔은 편한 옷으로 갈아입은 뒤 이불을 먼저 세탁기에 돌렸다. 세탁기 모터가 돌아가는 힘찬 소리를 들으며 청소기를 들었다.
“자, 이제 시작해 볼까.”
마음을 정리하고 다시 시작하는데 청소만 한 것이 없었다.
서흔은 청소기를 돌리고 걸레를 빨아 왔다. 몸을 굽혀 바닥을 직접 손으로 닦기 시작했다.
더럽히는 사람이 없는데도 빈자리는 티가 나는지 먼지가 가득했다. 박박 힘을 주어 문지르니 바닥이 뽀득뽀득해졌다. 기분이 좋아졌다.
바닥 청소와 화장실 청소를 마치고 옷장을 열었다. 시작한 김에 겨울옷을 정리해 넣고 가벼운 옷으로 옷장을 채워야겠다 생각하며 코트와 니트, 두꺼운 스웨트 셔츠들을 막 꺼낼 때였다.
딩동-
초인종 소리가 들리자 서흔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집에 왔다는 메시지에 아무래도 다경이가 <플로라유> 문을 닫자마자 집으로 달려온 것 같았다.
“뭘 또 바로 와…….”
반가운 마음을 한껏 드러내며 문을 연 서흔의 앞에는 다경이 아닌, 건욱이 서 있었다.
아침에 입고 나간 슈트 그대로 그가 그녀의 집 앞에 서 있었다.
꿈이 아닐까.
이제는 영영 못 볼지도 모르겠다 생각했는데 눈앞에 있는 남자를 보자 환영이 아닐까 하는 착각이 들었다.
마음이 일렁였다. 서흔은 목이 잠기는 것 같아 마른침을 삼키며 입을 열었다.
“당신이 여긴 어떻게. 아니, 내 집은 어떻게 알았어요?”
건욱은 대답 대신 선선히 웃었다.
“여긴 무슨 일로 왔는데요?”
“계속 이렇게 문 앞에서 이야기할까요?”
건욱의 말과 함께 복도를 지나가는 이웃의 목소리가 겹쳐졌다.
“……들어오세요.”
서흔은 마지못해 집으로 그를 들였다.
건욱이 구두를 벗고 작은 원룸에 들어오자 안 그래도 작은 집이 더욱 작아진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건욱은 그녀의 집을 둘러보았다. 꽃과 식물을 사랑하는 여자 아니랄까 봐 커다란 관엽 식물부터 작은 다육이까지 화분들이 작은 공간을 온통 차지하고 있었다.
벽에 걸린 그림도 꽃과 관련된 그림이었고 작은 소품 하나도 나무나 식물 위주였다.
“앉으세요.”
두 사람은 2인용 테이블에 마주 앉았다. 서흔은 그에게 물 한 잔을 내놓았다. 마땅히 내올 음료 하나 없는 것이 한동안 집을 비운 티가 역력했다.
“집이 아담하고 좋네요.”
“당신이 사는 그 큰 집에 비하면 작을지 몰라도 아담한 정도는 아니에요.”
“현관문 앞이 바로 주방이고 그 뒤로 거실 겸 침실이면 아담한 것 맞는 것 같은데.”
너무나 뻔뻔하게도 말하는 건욱의 말에 서흔은 얼굴이 빨갛게 달아올랐지만, 딱히 반박할 말이 떠오르진 않았다.
그의 말이 틀리지는 않았으니까.
서흔은 제 몫으로 담아온 물을 크게 한 모금 들이켜 열을 식혔다.
“무슨 일로 온 거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