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6화
얼마나 급한지 전화할 생각도 못 하고 뛰어온 이 집사가 숨을 골랐다. 차 회장은 이미 준비 중이라면서 그 말만을 전하고 다시 본채로 돌아갔다.
“저는…….”
자신이 가 볼 입장은 아니라고 생각했지만 가만히 있을 수도 없었다. 서흔은 어떻게 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당신은 여기 있어요. 어른들이…….”
하아. 건욱이 한숨을 쉬며 말을 이었다.
“지금은 그분들께 시간을 드리는 게 먼저일 것 같습니다.”
“네…….”
건욱은 그 말을 끝으로 2층으로 올라갔다. 옷을 갈아입고 차 회장과 함께 병원을 갈 것 같았다.
서흔은 방으로 들어갔다. 침대에 가만히 누워 푸른 밤의 빛으로 물든 천장을 바라보았다.
만감이 교차했다.
드디어 민협이 깨어났다는 것이 무엇보다 기뻤다. 이제 모든 걸 정리하고 제자리로 돌아갈 수 있을 것 같아 안심되는 한편 허전한 마음도 들었다.
서흔은 손을 들어 올렸다. 창문으로 쏟아지는 달빛이 긴 그림자를 만들어 냈다. 어느 날 황장목 아래서 밤의 그림자처럼 다가왔던 건욱이 떠올랐다.
[괜찮아요. 나도 당신을 사랑하지 않았고 우리는 서로를 충분히 이용했으니까.]
그 위로 자신의 목소리가 겹쳐졌다. 이제는 더 이상 돌이킬 수 없겠지.
서흔은 눈을 감았다. 이 밤이 지나고 무엇이 어떻게 바뀔지, 어디로 갈지 알 수 없지만 그래도 최선을 다하겠다 생각하면서.
* * *
밤새 잠을 잘 이루지 못했다. 서흔은 일찍 자리에서 일어나 다이닝 룸으로 향했다.
건욱이 벌써 내려와 식사를 하고 있었다. 어젯밤 병원에 다녀와 새벽녘에서야 들어온 것 같았는데 어느새 출근 준비를 마친 뒤였다.
“일찍 일어났네요.”
“네…….”
서흔이 맞은편에 앉자 건욱이 인사를 했다. 그의 얼굴에 피곤이 엿보였다.
용산댁이 이야기 중이었는지 맑은 소고기뭇국과 흰 쌀밥, 깍두기와 낙지 젓갈, 장조림이 놓인 트레이를 서흔 앞에 놔 주며 건욱에게 물었다.
“그래서 어떻게 됐어요? 상무님은 보셨어요?”
용산댁의 질문에 맑은 국물을 한술 뜨던 서흔이 고개를 들어 건욱을 보았다.
질문은 용산댁이 했는데 건욱이 서흔을 보며 천천히 입을 열었다.
“네. 다행히 좋아 보였어요. 작은아버지, 어머니도 다 알아보고. 말도 하고, 의사 표현도 정확하고.”
“어머! 너무 다행이에요. 그동안 회장님도 그렇고 작은 사장님, 사모님 얼마나 걱정이 많으셨어요. 정말 다행이다.”
용산댁이 호들갑을 떨며 건욱에게 물었다.
“그래서 어떻게 됐어요? 깨어나자마자 뭐라고 하시던가요? 첫 마디가 뭐였어요?”
용산댁의 말에 건욱이 그답지 않게 이야기를 늘어놓았다.
“어머니.”
그 말에 혜림이 울음을 터트리며 통곡을 했다고. 그 꼿꼿한 주형도 민협을 보며 눈물을 줄줄 흘렸다고. 차 회장도 물기 어린 목소리로 잘 돌아왔다고 민협의 손을 토닥거렸고 결국에는 모두 울음바다가 되었다고 했다.
이 이야기가 궁금해하는 용산댁을 위해서인지 아니면 병원에 가지 못한 서흔을 위해서인지는 알 수 없었다.
그저 이야기하는 동안 건욱은 서흔에게서 시선을 떼지 않았고 서흔은 그 이야기에 귀를 기울였다.
조곤조곤 어젯밤의 일을 전하는 건욱의 이야기를 들으며 용산댁이 눈가를 앞치마로 닦았다.
“자식 가진 마음이야 다 똑같지. 얼마나 지옥이었을까.”
“그런가요?”
“그럼요. 본부장님은 아직 아이가 없어서 모르는 거예요. 얼른 결혼도 하고 아이도 낳고 하셔야 세상을 알지.”
“그럴까요.”
건욱이 선선히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요. 어서 서둘러야 해요. 너무 늦으면 안 좋아.”
중요한 사실을 알려 주는 것처럼 용산댁이 속닥거리자 건욱이 픽 웃었다. 그녀는 건욱의 비어 있는 접시에 낙지 젓갈을 채웠다.
“그래서 퇴원은 언제 하신대요?”
“퇴원은 아직 모르겠네요. 검사할 것도 많고, 재활도 해야 하고. 시간이 걸릴 것 같아요. 저, 커피 한 잔 주세요.”
커피 머신을 작동시키려던 용산댁이 떨어진 원두를 발견하고는 팬트리로 향하자 건욱이 입매를 비틀며 말했다.
“궁금증은 풀렸습니까?”
“네?”
“궁금증이 가득한 얼굴이길래.”
민협의 상태가 어떤지 궁금하긴 했지만 표가 날 정도였나 싶어 서흔은 얼굴을 만지며 표정을 풀었다.
“이야기 전해 줘서 고마워요. 민협 씨가 괜찮다니 다행이에요. 저는 언제쯤 만나 볼 수 있을까요?”
민협이 건강한지 직접 확인하고 싶기도 했고 그와 약혼 계약을 어떻게 할지도 상의해야 했다.
“당분간은 어려울 것 같습니다.”
“당분간이면 얼마나?”
“글쎄요.”
건욱은 더 이상 이야기하고 싶지 않아 답을 피했다. 민협을 만나야겠다며 안달하는 여자의 얼굴을 보는 것만으로도 뚝, 무언가 끊어지는 기분이 든다.
“저는 만날 수 있다면 되도록 빨리 만나고 싶…….”
그것도 모르고 여자가 또다시 그의 신경을 사납게 만드는데 용산댁이 원두를 가지고 나왔다. 여자의 말이 끊겼다.
“따뜻한 걸로 드릴까? 아이스로 드릴까? 아직 날씨가 추우니까 따뜻한 게 좋겠죠?”
“아이스로 텀블러에 담아 주세요.”
건욱이 열이 오른 얼굴로 일어서며 말했다.
“들고 가시게요?”
“네. 조금 늦었네요.”
커피를 내려 텀블러에 담아 내밀자 건욱이 받아 들고는 몸을 돌렸다.
“다녀오겠습니다.”
서흔은 더 이상 묻지 못하고 인사했다.
“잘 다녀오세요.”
“저녁에 봅시다.”
잠시 멈칫한 건욱이 엘리베이터로 향했다. 용산댁이 그 모습을 보면서 말했다.
“제때 식사도 못 하시고.”
안타까움이 얼굴에서 가득 느껴졌다.
“상무님 깨어나신 건 너무 기쁜 일인데. 이러다가 우리 본부장님 몸 상하시는 거 아닌지 모르겠어요. 상무님 사고 나고부터 그 일까지 맡아 하시느라 몸이 세 개가 되어도 모자라다는데……. 커피 마실래요?”
용산댁이 물었다.
“네. 저도 차갑게 부탁드릴게요.”
뜨거운 커피를 마셨다간 답답한 마음이 더 뜨끈해질 것만 같았다.
“왜들 이런 날씨에 차가운 걸 마신대. 그러다 감기 걸려요.”
엄마처럼 잔소리를 하며 용산댁이 아이스커피를 내밀자 서흔은 얼음을 아작아작 씹으며 벌컥벌컥 커피를 마셨다. 답답한 마음이 조금 가라앉았다.
“보고 싶죠?”
“네?”
“다들 왜 안 데리고 가는지 몰라. 약혼자가 깨어났다는데 얼마나 보고 싶겠어. 본부장님은 뭐라고 안 하셔요?”
“아직은 면회 가긴 어려울 것 같아요.”
그때 다이닝 룸에 연결된 인터폰이 울렸다. 용산댁이 인터폰을 받았다.
“아, 네. 집사님. 네……. 알겠어요.”
용산댁이 서흔을 돌아보며 말했다.
“회장님이 찾으신다는데. 건너오라네요. 이 아침부터 무슨 일이시래.”
“…….”
이렇게 빠를 거라고는 생각지 못했는데. 서흔은 서둘러 일어나며 본채로 향했다.
현관문을 열고 들어가자 이 집사가 기다리고 있었다. 이 집사를 따라 서재로 들어가니 차 회장이 소파에 앉아 있었다.
서흔이 고개 숙여 인사한 뒤 자리에 앉자 이 집사가 문을 닫고 나갔다.
차 회장의 눈빛이 쏟아졌다. 그의 눈동자는 새하얗게 센 머리와 다르게 전혀 힘을 잃지 않았다.
한 마리 호랑이를 앞에 둔 기분을 느끼며 서흔이 입을 열었을 때였다.
“민협 씨는…….”
“깨어났다는 소식은 들었재?”
“네…….”
“고만 정리하자.”
“…….”
“인연이 얄궂었다 생각해라. 엮이지도 않을 인연이 엮여가 서로 고생한 기다.”
서흔도 정리하고 싶었다. 하지만 계약은 민협과 한 것이지 차 회장과 한 것이 아니었다.
우선은 민협을 만나야 했다. 서흔이 마른침을 삼키며 입을 열었다.
“민협 씨, 한 번만 만나게 해 주세요.”
차 회장이 고개를 흔들었다.
“여기까지가 끝인 기라. 민협이 부모하고도 이야기 끝냈다. 민협이도 당분간 치료에 집중해야 하고.”
“회장님!”
그녀는 1억을 받았고 그 값은 제대로 치르고 싶었다. 이렇게 도망치듯 나가고 싶지 않았다. 민협에게 설명이라도 하고 싶었다.
“잘 맞지 않는 나무를 접붙여 봤자 싹도 마르고 꽃도 안 핀다. 잘 맞는 나무를 접붙여야 좋은 열매를 얻을 수 있는 기재. 사람도 똑같은 기라.”
긴말은 필요 없다는 듯이 소파 옆 탁자 서랍을 열더니 봉투를 꺼내 테이블 위로 놓았다.
“섭섭지는 않을 기다. 짐은 이 집사가 정리해 둔다 캤으니 별채로 돌아가는 즉시 나가래이.”
“돈은 필요 없습니다.”
서흔은 봉투에 눈길도 주지 않았다. 그녀는 꼿꼿이 차 회장을 바라보았지만 그녀의 의사와는 상관없는 것 같았다. 차 회장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마지막 수단이었다.
“사과해 주세요. 아직 사과하지 않으셨어요. 사과해 주시면 그때 나가겠습니다.”
당돌한 서흔의 요구에 차 회장이 헛웃음을 지었다.
“하하하. 그래? 그러자. 내 오해했데이. 그 점은 내 사과하마. ……이제.”
그의 눈동자가 언제 웃었나 싶게 분노로 새카매졌다. 검은 눈동자가 날카롭게 벼려졌다.
“떠나래이.”
차 회장이 문으로 향하며 싸늘하게 말했다.
“끌어내기 전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