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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약혼녀가 아니야 (45)화 (45/74)

45화

서흔은 오랫동안 욕조에 몸을 담갔다. 깁스를 하고 있던 팔을 이완시킬 겸 한참 동안 물 안에 앉아 있었다.

그런데도 몸이 어딘가 이상했다. 피부가 따끔거리는 것 같기도 했고 간질거리는 것 같기도 하고. 뜨겁기도 하고.

서흔은 욕조에서 일어나 간단히 몸을 헹구고 커다란 샤워 타월을 둘렀다. 그래도 좀처럼 열기가 가라앉질 않았다.

뜨거웠던 남자의 시선이 자꾸 생각났다.

‘아니야. 그 남자 때문이 아니야.’

깁스를 오랫동안 하다가 풀었으니 피부가 건조해서 간지러운 거라고, 답답해서 뜨거운 거라고 생각하며 보디로션을 오랫동안 꼼꼼하게 발랐다.

그러나 선선한 바람으로 머리를 말리고 침실로 돌아와서도 온몸에 답답한 열기가 느껴지는 것은 그대로였다.

“안 되겠다.”

서흔은 일어나 다이닝 룸으로 향했다. 맥주라도 한잔하면 좋을 것 같았다.

처음에는 잘 몰라 다이닝 룸이 텅 비어 인테리어만 완벽한 곳으로 보였는데 실상은 달랐다. 작은 편의점 하나쯤 옮겨 놓은 것처럼 이곳에는 없는 게 없었다.

서흔은 다이닝 룸의 상부 장과 하부 장을 하나하나 열어 보는 대신 처음부터 곧장 팬트리로 들어갔다.

왠지 컵라면처럼 맥주도 이곳에 있을 것 같은 예감이 들었다.

팬트리에는 각종 빵과 여러 종류의 과일잼, 치즈까지 다양하게 갖춰져 있었다. 국수와 스파게티 등 간단히 요리를 해 먹을 수 있는 재료도 있었다.

“어? 팬트리에 없나.”

그런데 아무리 살펴보아도 맥주 비슷한 보리 음료 하나 찾을 수 없었다.

“아! 냉장고.”

실온에 두면 맛이 없어서 냉장고에 넣어 두었을지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서흔은 팬트리에 있는 서브 냉장고 문을 열었다.

역시!

물과 탄산수, 주스 뒤 냉장고 안쪽으로 냉기를 가득 품은 캔 맥주와 각종 술이 진열되어 있는 것이 보였다.

서흔은 신나게 제일 애정하는 브랜드의 캔 맥주를 하나 꺼내 다이닝 룸으로 나왔다.

“거기서 뭐 합니까.”

“아! 깜짝이야!”

서흔이 뒤돌아보니 언제 내려온 건지 건욱이 보였다. 그는 거실을 지나쳐 다이닝 룸으로 들어오고 있었다.

“사람이 기척을 내고 다녀야죠. 깜짝 놀랐잖아요.”

“들키지 말아야 할 행동이라도 했나 보죠?”

건욱이 손을 뻗어 그녀가 들고 있는 캔 맥주을 빼앗으며 말했다. 손끝이 스쳤다.

그러자 목덜미에 닿았던 그의 손길이 생각나며 다시 열이 올랐다. 흠, 흠. 서흔은 괜히 헛기침을 하며 손바닥으로 부채질을 했다.

“맥주 서리라도 하나 보네.”

“서리라뇨. 당당히 깁스 푼 기념으로 축하주 한 잔 마시려는 건데.”

“깁스 푼 건 그냥 맥주 마시려는 핑계 같은데.”

실상은 열기를 식히기 위함이었지만 곧이곧대로 말할 필요는 없었다.

“이리 주세요.”

서흔이 빼앗긴 캔 맥주를 가져오자 건욱이 다시 손을 뻗었다. 서흔은 맥주를 더욱 콱 움켜쥐었다. 건욱이 피식 웃으며 손쉽게 캔 맥주를 가져갔다.

“왜 자꾸 가져가요?”

서흔이 눈을 흘기자 그가 캔 맥주를 따더니 한 입 마셨다.

“뺏어 먹는 게 맛있잖아.”

“뭘 뺏어 먹는 게 맛있어요? 냉장고에 맥주가 얼마나 많은데! 꺼내 먹으면 되잖아요.”

팬트리로 간 서흔은 냉장고 문을 활짝 열고 일렬로 늘어서 있는 캔 맥주를 손짓으로 가리켰다.

“그럼 당신도 하나 마시든가.”

건욱이 서흔의 뒤로 다가왔다. 냉장고와 건욱 사이에 갇힌 서흔이 이러지도 못하고 저러지도 못하는데 건욱이 손을 뻗었다.

그와의 거리가 순식간에 좁아졌다. 그의 체향이 진하게 느껴졌다. 자꾸만 폐부를 자극했다. 서흔은 숨을 멈췄다.

방금 전 것과 같은 브랜드의 캔 맥주를 꺼낸 건욱이 캔을 따서 먹여 줄 것처럼 그녀 입술 바로 앞으로 내밀었다.

그 모든 일련의 행동이 배속을 낮춘 영상처럼 느리게 움직였다.

천천히 눈을 깜빡인 서흔은 입술을 깨물었다. 그가 내민 맥주를 입으로 받아 마실 수도, 물러설 수도 없었다. 비켜 주면 좋으련만 그는 움직일 생각이 없어 보였다.

‘안 비키면. 뭐.’

후, 숨을 뱉은 서흔은 캔 맥주를 손으로 받아 들고는 무릎을 굽혀 열린 냉장고 문과 건욱 사이를 유유히 빠져나갔다.

피식 웃는 소리가 뒤에서 들려왔다.

목이 탔다. 차가운 캔 맥주를 벌컥벌컥 마시니 탄산을 품은 알코올이 짜릿하게 몸에 퍼져 나갔다.

“맛있네요.”

서흔이 말하자 건욱이 냉장고에서 캔 맥주를 몇 개 더 꺼내 아일랜드 테이블 위에 올려 두었다.

“땅콩? 오징어? 고민할 거면 내 마음대로.”

“땅콩, 좋아요.”

건욱은 익숙하게 상부 장 어딘가를 열어 땅콩을 꺼내 왔다. 한두 번 해 본 솜씨가 아닌 것 같았다.

“이거 마시면 내일 용산댁 아주머니한테 또 혼나는 거 아니에요?”

컵라면 사건을 잊지 않은 서흔이었다.

“그럴지도. 아직 재활 치료 중이니까.”

순순히 고개를 끄덕이며 건욱이 어느새 다 마신 캔을 손으로 구기고는 다시 한 캔을 더 땄다.

“자, 건배합시다.”

“뭐를 위해 건배해요? 내일 아주머니에게 혼날 것을 미리 기념할까요?”

“깁스 푼 것을 축하하며.”

건욱이 캔 맥주를 서흔의 캔 맥주에 콩 부딪쳤다.

“건배.”

서흔은 결국 웃으면서 그의 캔에 자신의 것을 부딪쳤다.

“건배.”

혀끝으로 넘어가는 맥주가 달았다. 저절로 흡족한 미소가 지어졌다.

쉼 없이 맥주가 들어갔다. 빈 캔들이 아일랜드를 채우기 시작했다.

“맥주 좋아해요?”

“맥주 싫어하는 사람 별로 없잖아요.”

“소주도 좋아하는 것 같길래.”

“소주도 좋아해요. 이러니까 술은 다 좋아하는 사람 같네. 하하.”

서흔이 맥주를 마시며 고개를 끄덕였다. 적당히 취하고, 적당히 즐기는 건 좋아하는 것 같았다.

“그럼 키스도 좋아하나.”

어느새 짙어진 건욱의 시선이 그녀의 입술을 훑었다. 두 사람 사이를 감싸는 공기의 밀도가 갑자기 촘촘해졌다.

긴장감을 이기지 못하고 서흔이 대답했다.

“잘 모르겠어요.”

항상 그와의 키스가 싫지 않았던 걸 보면, 지금도 원하는 걸 보면 좋아하는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했지만. 그녀는 고개를 흔들었다.

짙게 풍기는 그의 숨결이 조금씩 가까워지자 서흔의 속눈썹이 파르르 떨렸다. 심장이 쿵쾅쿵쾅 뛰어 댔다.

“나는 좋아하는데.”

그의 입술이 막 닿을 듯이 다가오자 그녀는 자신도 모르게 눈을 감았다.

[타깃을 차건욱으로 바꿨나 본데 더러운 수작질도 여기까지야.]

갑자기 수민의 목소리가 환청처럼 귓가를 사정없이 내리쳤다.

서흔은 눈을 번쩍 뜨며 고개를 휙 돌렸다. 나쁜 일을 하다가 들킨 것처럼 얼굴이 달아올랐다.

키스를 원했다.

정수민의 이야기가 떠오르지 않았더라면 그녀는 홀리듯 그와 열정적인 키스를 나눴을 것이다.

수민의 오해 따위가 중요한 건 아니었지만 그녀가 말하는 더러운 수작질을 할 생각은 없었다.

그런데도 순간 자신이 차민협의 약혼녀라는 사실을 잊고, 차건욱이 정수민과 결혼할 거라는 사실도 잊은 채 입을 맞출 뻔했다.

“맥주는 그만 마시죠.”

서흔은 입을 가리며 벌떡 자리에서 일어났다. 애초부터 그와 맥주를 마시지 말았어야 했다. 한순간의 다정함으로 그녀를 위한다고 착각하지 말았어야 했다.

그가 그녀를 기만했다는 걸 잊고, 다시금 그에게 빠져들지 말았어야 했다.

차가워진 표정으로 다 마신 맥주캔을 치우고 다이닝 룸을 나서던 서흔은 뒤에서 들린 목소리에 발걸음을 멈췄다.

“차민협과 파혼해.”

담담한 건욱의 목소리에 서흔은 몸을 돌려 그를 바라보았다. 그의 모습에 서흔은 차 회장을 떠올렸다.

[민협은 그냥 차민협이 아니다. W그룹의 차민협이다. 알고 있나?]

[그런 민협이랑 꽃집이나 운영하는 자네가 결혼할 수 있을 기라 생각하는 기가.]

멸시를 가득 담은 눈으로 자신을 보았다. 정리는 섭섭지 않게 해 주겠다고 하면서.

건욱의 마음이 차 회장과 같을 거라 생각하고 싶진 않지만.

건욱은 맥주를 한 모금 마셨다. 언뜻 보아서는 그가 파혼이라는 말을 꺼냈다고 생각할 수 없을 만큼 평온한 모습이었다.

“말해요. 파혼하겠다고.”

싫어요.

“그리고 나한테 돌아오겠다고.”

서흔은 대답하지 않았다. 싫다는 말도, 그렇게 하겠다는 말도 쉽게 나오지 않았다.

“차민협은 당신을 사랑하지 않아. 나 때문에 당신을 이용하는 것뿐이야.”

짙은 눈이 그녀에게 향했다. 그녀의 진심을 꺼내 보고 싶어 안달 난 것처럼 그녀를 따라붙었다.

하지만 그가 듣고 싶은 말은 해 줄 수 없었다. 서흔은 속삭이듯 말했다.

“그건 당신도 마찬가지잖아요.”

“유서흔.”

“당신은 당신의 모든 걸 나에게 숨겼어요.”

건욱이 가늘게 눈살을 찌푸렸다. 언짢은 남자의 심기가 말하지 않아도 느껴졌다.

“나한테는 당신이나 민협 씨나 다르지 않아요. 당신도 날 이용했으니까.”

“난 당신을 이용한 적이 없어.”

“하지만 사랑한 적도 없죠.”

“유서흔.”

“괜찮아요. 나도 당신을 사랑하지 않았고 우리는 서로를 충분히 이용했으니까.”

담담히 말을 마친 서흔이 발길을 돌리는데 뒷문을 열고 이 집사가 뛰어 들어왔다.

“본부장님! 상무님이 깨어나셨대요. 차민협 상무님이 깨어나셨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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