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3화
“엇, 저것도 천만 원짜리 아니에요?”
놀란 서흔이 저렇게 값비싼 재킷을 쉽게 던져도 되냐는 듯이 눈을 휘둥그렇게 뜨자 건욱이 피식 웃었다.
“나 돈 많은 거 아직도 모릅니까.”
“알지만 돈 많다고 그렇게 옷을 함부로 할 건 아니죠.”
“함부로 한 거 아닙니다. 값이 어떻든 상황에 따라 용도에 맞춰 쓸 뿐이지.”
건욱은 넥타이도 풀어 던진 뒤, 와이셔츠 소매를 반 이상 접어 올렸다.
“아니, 잠깐만요! 삽질해 봤어요?”
“왜 삽질도 못 해 봤을 것 같아요?”
“네. 남의 손에 삽을 쥐여 주면 쥐여 줬지 잡아 봤을 것 같진 않은데.”
“일리 있는 편견이네요.”
고개를 끄덕이는 건욱에 서흔이 눈을 흘기자 그가 낮게 웃었다.
“목장갑도 줘요. 손에 물집 잡히면 이 집사님한테 혼나.”
그녀의 손에서 목장갑까지 빼앗아 낀 건욱이 삽을 제대로 잡고 땅에 푹 꽂았다 바로 흙을 퍼 올렸다.
식은 죽 먹기라는 듯이 그는 한쪽 팔을 깁스한 그녀와 달리 손쉽게 삽질을 뚝딱뚝딱 해냈다.
건욱의 이마에 땀방울이 송골 맺혔다. 와이셔츠 아래로 드러난 팔뚝의 근육은 불쑥 솟았고 땀과 함께 진한 페로몬이 흘러나왔다.
서흔은 그에게서 눈을 뗄 수가 없었다. 심장이 미친 듯이 내달리기 시작했다.
몸을 숙이고 여러 번 땅을 파낸 건욱이 몸을 세웠다. 홀린 듯 그에게 시선을 고정하고 있던 서흔이 화들짝 놀라 한 발짝 물렀다.
“뭘 보고 있어요? 나 본 거예요?”
건욱이 서흔에게 한 발짝 다가왔다.
“어……. 삽질 잘하네요.”
“난 뭐든 잘합니다.”
“자꾸 그렇게 말하면 재수 없다는 소리 많이 들을 텐데.”
“아니, 부럽다는 말 많이 듣는데.”
건욱이 오만하게 대답하며 더욱 바짝 서흔에게 다가왔다. 그의 눈빛이 서흔의 모든 것을 꿰뚫어 보듯 또 짙어졌다.
“요즘은 나도 바라는 게 생겨서 무척 속앓이 중입니다.”
“당신이 속앓이를요?”
세상 부러울 것 없고, 세상 무서울 것 없어 보이는 남자에게는 어울리지 않는 단어였다.
“어울리지 않아요.”
“뭐든 어울릴까.”
건욱이 긴 손가락으로 서흔의 턱을 들어 올렸다. 두 사람의 눈동자가 오롯이 마주했다.
“차민협은 당신에게 어울리는 사람입니까?”
“왜 갑자기 그런 걸 물어요.”
서흔은 갑자기 더워지는 공기에 바짝 마른 입술을 핥았다.
“궁금해서.”
그의 시선이 그녀의 혀를 따라 촉촉해지는 입술을 훑었다.
“내 앞에만 서면 이렇게 얼굴을 붉히면서.”
“…….”
“이 젖은 입술로 내 입술 물어 놓고선.”
서로의 입술이 닿을 만큼 가깝게 다가선 건욱에 서흔은 긴장감에 숨이 바짝 멈추는 것 같았다. 목이 막혀 무슨 말을 할지 몰랐다.
“왜 그랬어요? 섭섭하게.”
건욱이 손을 들어 올렸다. 서흔은 숨을 멈추고 눈을 꼭 감았다.
“본부장님 오셨습니까?”
갑자기 들린 정원사의 목소리에 서흔은 화들짝 놀라 눈을 떴다. 마른 솔잎이 눈앞에서 흔들렸다.
“모자에 붙어 있길래.”
건욱이 서흔의 손바닥 위에 마른 솔잎을 내려 두고는 다시 삽을 들고는 정원사에 다가갔다.
“이거 그건가요? 각시석남?”
“아. 본부장님 왜 삽을 들고. 이리 주세요.”
“괜찮아요. 오랜만에 하니까 재밌네요. 예전에는 아버지랑 많이 했었는데. 여기 심을 거죠?”
정원사와 실랑이를 하며 건욱이 다시 꽃을 심을 구덩이를 파기 시작했다.
서흔은 마른 솔잎을 꼭 손에 쥐었다. 심장 한구석이 계속 쿵쿵 뛰어 댔다.
* * *
두꺼운 코트를 입고 모자와 선글라스로 얼굴을 가린 정화는 어두운 복도를 걷는 박 대리를 따라 걸음을 옮겼다.
최상위층 VIP들만 출입 가능한 이 클럽은 민협과도 여러 번 왔던 곳이었다.
별개의 룸으로 이뤄진 공간은 각각의 통로를 갖춰 프라이빗한 만남을 즐기기엔 이곳만 한 곳이 없다고 민협이 말하곤 했다.
복도에 깔린 붉은 융단이 걸음을 옮기는 두 사람의 발소리를 잡아먹었다. 긴장한 정화의 거친 숨소리만이 복도를 가득 채웠다.
제일 안쪽 룸에 도착한 박 대리가 노크를 하고 들어갔다. 커다란 테이블을 ‘ㄷ’ 자로 감싼 소파, 그 상석에 주형이 앉아 있었다. 그 옆에 한 비서가 서 있었다.
박 대리가 주형을 보며 고개를 숙였다. 정화도 덩달아 고개를 숙이자 박 대리가 그녀를 밀어 넘어뜨렸다.
정화가 무릎을 꿇으며 주저앉았다.
“간도 크지.”
주형이 싱글몰트 위스키를 따르고는 잔을 빙글빙글 돌렸다. 입가에 비릿한 미소가 지워지지 않았다.
이정화. 이제 막 주가를 달리기 시작하는 신인 여배우였다. 민협이 잠깐 데리고 놀기 좋은 딱 그만큼의 존재.
그런데 고작 이 작은 여자 하나가.
고작 이따위가.
“감히 내 아들을 죽이려고 해!”
주형이 잔을 테이블 위로 내리쳤다. 깨진 잔 사이로 붉은 피와 함께 술이 흘러넘쳤다.
한 비서가 급히 다가와 손수건을 꺼내 주형의 손을 지혈했다.
“잘못했습니다. 한 번만 용서해 주세요. 아이를 가졌어요. 민협 씨 아이를 가져서.”
“감히 누가 누구의 씨를!”
주형이 소리치자 한 비서가 눈짓했다. 그것을 시작으로 박 대리의 발길질이 시작됐다.
무참히 쏟아지는 폭력에 정화는 저도 모르게 배를 감싸며 뒹굴었다. 맞을 때마다 온몸이 충격에 흔들렸다.
“살려 주세요.”
정화는 상석의 남자가 민협의 아버지 차주형임을 알고 있었다.
그는 눈빛 하나만으로도 그녀를 얼어붙게 만들었다. 그가 결코 만만한 사람이 아니라는 것은 본능적으로 알 수 있었다.
잘못하다가 여기서 그녀뿐만 아니라 아이까지 잃을지도 모른다는 공포가 그녀를 사로잡았다.
“제발 살려 주세요……. 제발…….”
통증으로 시야가 흐릿해졌다. 정화는 스폰서 자리를 제안받고 나간 자리에서 처음 만났던 민협을 떠올렸다.
잘생기고, 젠틀하고, 부유한 민협에게 호감을 느끼게 된 건 순식간이었다.
그와의 시간은 즐거웠고 밤은 더욱 달콤했다. 한 번 깨달은 감정은 걷잡을 수 없이 크기를 부풀렸다.
“정말 사랑해서 그랬어요. 너무 사랑해서. 사랑밖에 할 수 있는 게 없어서 그랬어요.”
정화는 울음을 터트렸다. 그녀는 민협의 여자가 되고 싶었다. 오로지 하나뿐인 민협의 여자, 정화는 그런 여자가 되고 싶었다.
하지만 만남을 거듭할수록 뜨거워지는 그녀와 다르게 민협은 차갑게 식어 갔다.
그래서 계획했다. 그를 잡을 방법을. 아이를 갖게 되면 민협도 그녀를 버리지 못하리라고 생각했다. 그건 정화의 순진한 착각이었다.
“제발 살려 주세요. 우리 아이만이라도. 제발 아이를 살려 주세요.”
민협은 아이의 존재를 인정하지 않았다. 그녀도 돌아보지 않았다. 그에게 돌아온 건 냉혹한 이별이었다.
거기서 끝이 아니었다. 기획사와의 계약은 해지됐고, 모든 일이 끊겼다. 그녀는 나락으로 떨어졌다.
마지막으로 들려온 건 민협의 약혼 소식이었다. 그녀에게 남은 건 이제 독기밖에 없었다. 내가 가질 수 없다면 남에게도 줄 수 없었다. 그녀는 업자를 고용했다.
“제발 아이만 살려주시면 뭐든지 다 할게요. 시키시는 건 뭐든지 다 할게요. 제발 살려 주세요.”
주형이 손을 들어 올리자 발길질이 멈췄다. 박 대리가 정화를 일으켜 세워 소파 끝자리에 그녀를 앉혔다. 그녀는 불안한 마음을 감추며 코트 속에 손을 넣었다.
“정말 무엇이든 할 수 있겠어?”
“네!”
주형의 말에서 한 줄기 빛을 본 정화가 고개를 끄덕였다.
“여태껏 범인이 잡히지 않은 건 네가 운이 좋아서가 아니야. 우리가 경찰 조사를 막고 있었기 때문이지. 곧 경찰 조사가 시작될 거야. 범인이 너라는 게 금방 밝혀지겠지.”
“네…….”
“하지만 나는 범인이 너라고 생각하지 않아.”
이정화가 범인임을 찾아내는 것은 생각보다 어렵지 않았다. 그렇다면 건욱 쪽에서도 알아내는 건 시간문제였다.
다행이라면 건욱보다 먼저 정화를 찾아냈다는 것과 접촉할 수 있었다는 것.
“아! 맞, 맞아요. 제가 한 게 아니에요.”
정화는 눈치가 빨랐다. 그가 말하는 의도를 알아챈 정화는 침을 꼴깍 삼켰다.
“아마도 너에게 민협의 차에 손을 대라고 사주한 사람이 있을 거야.”
“누가…….”
“가령……. W호텔 대표 차건욱이라든가.”
“!!!”
주형이 고갯짓을 하자 박 대리가 커다란 더플백을 탁자 위에 올렸다. 가방을 열자 현금 다발이 가득 들어 있었다.
“헉!”
정화는 숨을 들이켰다.
“너는 이 현금을 받았을 거야. 사주의 대가로 말이야. 그렇지?”
“네……. 맞아요.”
정화는 고개를 끄덕였다.
“차건욱 대표가 저한테 말했어요. 차민협을 죽여야겠다고.”
주형이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으며 손을 뻗자 한 비서가 재빠르게 새 잔에 싱글몰트를 따라 건넸다.
‘민협이가 이제 눈만 뜨면!’
그는 앞으로의 일이 무척 기대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