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2화
서흔은 다이닝 룸으로 갔다. 아직 얼음을 먹기엔 이른 계절이지만 그녀는 아랑곳없이 얼음을 동동 띄운 찬물을 벌컥벌컥 들이켰다.
목을 타고 넘어가는 냉기는 솜털까지 바짝 세우며 장기까지 얼려 버릴 만큼 차가웠지만 어째 수민을 만났던 날의 기억은 사라지질 않았다.
며칠 전 수민이 다녀간 후로 서흔은 불쑥불쑥 화가 치솟는 일이 잦아졌다.
왜 그렇게 화가 나는지 모르겠지만 이 짜증을 어떻게 처리해야 할지 몰랐다.
한동안 얼음을 아그작아그작 씹던 서흔의 휴대폰이 울렸다. 오랜만의 다경의 연락이었다.
“응, 다경아.”
-잘 지내나 보다. 연락 한번 없는 거 보니.
“일이 좀 많았어.”
-그래?
“플로라유는 어때?”
-슬슬 봄이 오고 있지. 화이트데이 꽃다발 주문이 많이 들어와서 정신없어.
다경의 목소리 너머로 사르륵거리는 소리가 들리는 거 보니 예약 꽃다발을 만들고 있는 것 같았다.
“직원님, 사장의 빈자리를 너무 철저히 채우는 거 아닙니까. 나중에 나 돌아갈 자리 없을 것 같아서 걱정이 많이 되는데요.”
서흔은 다경이 관리하는 플로라유의 SNS를 빠짐없이 보고 있었다.
워낙에 센스를 타고나서인지 다경이 사진 찍어 올리는 꽃다발은 정말 예뻤다.
그 덕에 꽃다발 문의도 많고 예약 주문도 계속 밀려드는 상황이었다.
-통째로 넘기시는 거 어때요? 비싸게 쳐 줄게.
“꿈도 꾸지 마.”
서흔의 단호한 말에 다경이 깔깔거리며 웃었다.
-손은 어때?
“답답해. 꽃도 못 만지고 나무도 못 보고.”
-꽃이야 못 만지겠지만 보는 거야 자유잖아. 거기는 정원 없어? 드라마 보면 회장님 댁에는 엄청 커다란 정원 있고 그러던데.
“정원 있는데 한 번도 안 가 봤어.”
-왜? 들어가면 안 되는 정원이야?
“아닐걸?”
-그럼 안에서 답답해하지 말고 가 봐. 힐링도 하고. 그래야 빨리 낫지.
“그래야겠다.”
-그럼 난 바빠서 이만.
“응. 고생해. 미안해 또 연락할게.”
-응.
서흔은 다경과 전화를 끊고 밖을 나섰다. 특별한 일이 없는 한 이 집을 벗어나지 않아서인지 모든 게 새로웠다.
별채에 작은 산책로가 나 있었는데도 산책은 생각 한번 하지 못했다니. 어리석었다.
서흔은 산책로를 따라 걸었다. 다경의 말대로 봄이 오고 있었다. 정원으로 향하는 길에도 푸르른 봄의 냄새가 진했다.
서흔이 폭풍우처럼 몰아닥쳤던 일들에 휩쓸리는 동안 겨울은 물러나고 어느새 싹이 서서히 올라오고 있었던 것이다.
깊은 숲 냄새를 따라 한 바퀴 쓰윽 돌고 오니 어느새 키가 높은 황장목과 아담한 사이즈의 소나무들이 잘 정비된 정원이 나타났다.
돌로 경계석을 만들어 놓은 작은 연못도 둘러보고 한편에 마련된 야외 테이블에 잠시 앉아 보기도 했다가, 정리가 완벽히 된 잔디를 손으로 조심스레 쓸어 보기도 했다.
“밟고 있기가 미안하네. 일부러 밟는 건 아니야, 오해 말아 줘.”
손끝에 닿는 초록이 몸으로 퍼져 물들었다. 얼음의 차가움으로도 얻지 못한 마음의 평화가 일시에 찾아왔다.
서흔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렇게 바라보는 것도 좋지만 뭐라도 하고 싶었다. 마침, 잔디를 정리하기 위해 움직이기 시작하는 정원사가 보였다.
“안녕하세요.”
서흔은 꾸벅 인사를 했다. 작업복을 입은 정원사는 마치 예전 서흔의 아버지 역할을 했던 아저씨를 떠올리게 하는 푸근한 인상의 사람이었다.
“혹시 별채 화단도 손 볼 생각이신가요?”
메인 정원이야 차 회장의 소관이기에 그녀가 뭘 할 수는 없지만 별채 앞에 작은 화단을 꾸미는 것 정도는 괜찮지 않을까.
“별채 화단이요? 지금 손 볼까요?”
정원사의 물음에 이런 것도 차건욱에게 허락을 받아야 하는 건가 싶은 생각이 들었다. 그에게 연락을 해 봐야 하는 걸까.
괜히 망설여졌다. 이때 주 대리가 곁에 있으면 좋을 텐데 주 대리는 서흔이 집에 있을 때는 특별한 일이 아니고선 나타나지 않았다.
“지금 준비할게요.”
서흔의 고민을 다른 식으로 해석했는지 정원사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지금 가능해요? 그럼 혹시 저도 같이해도 될까요?”
놀란 서흔의 눈이 활짝 뜨였다.
“같이요?”
난색을 표하는 정원사에 서흔이 어떠한 피해도 주지 않을 거라는 확신을 담아 자신감 있게 대답했다.
“제가 원예과를 나왔거든요. 꽃이랑 나무 가꾸는 거 좋아해요. 폐 끼치지 않을게요. 별채 앞 작은 정원은 같이 할 수 있을 것 같은데.”
“아무리 그래도 깁스한 팔로는 무리일 텐데요.”
“저, 오른손잡이예요.”
서흔이 멀쩡한 오른손을 번쩍 들어 흔들었다. 정원사은 의욕이 넘치는 서흔에 고개를 끄덕였다.
“뭐, 하고 싶다면야.”
“그럼 준비하고 오겠습니다.”
서흔이 옷을 갈아입고 나오자 별채 앞에 화단에 심을 꽃이랑 장비가 준비되어 있었다.
새롭게 화단을 변경할 생각이었는지 화단 이미 갈아엎어져 있었다.
서흔은 능숙하게 갈퀴로 흙을 조금 더 고른 다음 삽을 들었다.
처음 그녀가 심을 식물은 커다란 로즈마리였다. 향기도 좋지만 크게 피어나 꽃까지 달리면 보랏빛이 무척 예쁘기에 좋아하는 식물 중 하나였다.
서흔은 커다란 모종이 들어갈 공간을 만들기 위해 삽을 들어 땅을 파고 떠낸 흙을 옆으로 옮겼다.
“지금. 뭐 합니까.”
그렇게 몇 삽도 뜨지 않았는데 뒤에서 들린 목소리에 서흔이 고개를 돌렸다.
“이 시간에 웬일이에요?”
퇴근하고는 거리가 먼 오후 시간이라 갑자기 나타난 건욱이 놀라웠다.
그는 머리부터 발끝까지 서흔의 차림새를 훑어 내렸다. 밀짚모자를 쓰고 앞치마를 두른 그녀는 장화를 신고 목장갑을 손에 끼고 있었다. 당연히 한 손에만.
“팔 하나 깁스한 걸로는 모자라 이러고 있는 겁니까.”
“신경 쓸 거 없습니다. 난 내 할 일 할 테니까 차건욱 씨는 차건욱 씨 갈 길 가죠?”
깁스는 한 팔로도 충분하거든요? 서흔은 구시렁거리더니 멈췄던 삽을 다시 들었다.
힘차게 땅에 삽을 박았다. 이제 삽을 들어 흙을 떠 올리기만 하면 되는데, 지지대 역할을 해 줄 왼쪽 팔이 없으니 힘이 제대로 들어가지 않았다.
“할 수 있는 거 맞습니까.”
“아직도 안 갔어요?”
서흔이 콧잔등을 찡그렸다. 그녀는 삽을 다시 고쳐 잡고 힘을 바짝 주어 삽을 들어 올렸다.
좀 더 힘 있게 삽을 땅속에 박으려고 했는데 중심이 흔들리면서 몸이 휘청였다.
“어엇!”
엉덩방아를 찍겠다 싶어 본능적으로 눈을 콱 감았다. 삽이 쿵 하고 떨어지는 소리가 나며 그녀도 딱딱한 곳에 부딪혔다.
그런데 생각보다 아프지 않았다. 흙이라면 서늘할 텐데 맞닿은 곳이 뜨겁기도 했다.
‘설마…… 아니겠지.’
서흔의 심장이 불안하게 쿵쿵 뛰었다.
“손 나을 때까지는 가만히 있지. 다시 병원에 입원하고 싶지 않으면.”
불안한 예감은 왜 항상 적중하는 걸까.
서흔은 건욱의 품에 안겨 있었다. 덕분에 그녀가 바닥에 볼썽사납게 넘어지는 불상사는 없었지만.
“잠깐 중심이 흔들렸던 것뿐이에요. 그래 봤자 엉덩방아예요. 오버하지 말아요.”
서흔은 그의 품에서 벗어났다. 아무렇지 않게 머리를 쓸어 올리며 바닥에 삽을 집었다.
대학 시절 삽질로 이름을 날리던 유서흔이었다. 이런 삽질 따위 한 손이 불편해도 요령으로 충분했다. 그녀는 다시 한번 제대로 흙을 파내기 위해 삽을 땅에 꽂았다.
“정말 계속할 겁니까.”
건욱이 찌푸린 얼굴로 팔짱을 낀 채 그녀를 바라보았다.
“네.”
서흔은 삽을 발로 힘을 주어 누른 뒤 힘을 실어 들어 올렸다. 다행히 이번엔 중심을 잃지 않고 제대로 땅을 파낼 수 있었다.
그렇게 두세 번 삽으로 흙을 퍼 올려 옮기니 모종을 심을 만한 구덩이가 생겼다.
서흔은 로즈마리 모종을 구덩이 안에 잘 넣고 손으로 꾹꾹 흙을 잘 채워 넣었다.
빈 공간에 유일한 주인공처럼 로즈마리 작은 나무 하나가 심어져 있는 모습을 보니 뿌듯했다.
“유서흔 씨.”
다시 새로운 구덩이를 파기 위해 삽을 드는 서흔을 건욱이 못마땅한 어투로 불렀다.
“아직도 안 갔어요? 한가한가 봐요? 계속 그렇게 보고 서 있을 생각인가요?”
서흔이 숨을 한 번 고르며 그를 쳐다보았다. 그는 자리를 떠날 생각이 없어 보였다.
“이리 줘요.”
“네?”
“삽. 이리 달라고요.”
“왜요?”
“당신 다른 쪽 팔까지 부러지는 꼴은 못 보겠으니까. 이리 줍시다.”
서흔의 손에서 삽을 받아 든 건욱이 재킷을 벗어 잔디에 휙 던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