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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약혼녀가 아니야 (41)화 (41/74)

41화

차건욱을 손을 넣으려면 서둘러야 했다. 그 여자, 유서흔을 봤을 때부터 예민하게 곤두섰던 신경이 목걸이를 본 후 짓눌리기 시작했다.

이건 직감이 보내는 경고였다. 이제껏 그녀의 직감은 틀린 적이 없었다.

“마음이 예쁘데이.”

차 회장이 수민의 말에 허허 웃었다.

“하지만 수민이도 우리 집안 사정 잘 알 거 아이가. 민협이가 아직 사경을 헤매고 있는데 그럴 수는 없재.”

이제 사고가 일어난 지 한 달이 조금 넘어서고 있었다. 민협은 혼수상태였지만 여전히 살아 있다.

사람들이 차 회장을 피도 눈물도 없는 냉혈한이라고 하지만 그도 사람이었다.

깨어나지도 못하는 민협을 두고 건욱을 결혼시킬 수는 없었다. 그러니 손수 수민의 마음을 붙잡고 달래 줄 수밖에.

그는 생일 연회를 열어 수민을 초대하고, 연주회에도 참석했다. 서흔을 손님 삼아 사냥하듯 놀이하는 그녀의 뜻도 모두 받아 주었다.

“조금만 기다려 보자.”

“네…….”

수민이 미소를 끌어 올리며 대답했다. 불안한 마음이 좀처럼 가라앉질 않았다.

그놈의 차민협 때문에 다 양보한다 쳐도 그 여자는 눈앞에서 치워 버리고 싶었다.

“그러면 차 상무님 깨어나실 때까지 서흔 씨도 이곳에 계속 있는 건가요?”

수민의 말에 차 회장이 막 들어 올린 찻잔을 탁 소리 나게 내려 두었다.

“신경 쓸 거 없다.”

그 정도 놀게 뒀으면 됐지. 장단을 맞춰 주는 것도 여기까지다. 차 회장은 허허 웃으면 말을 돌렸다.

“그래. 정 회장은 해외 출장 중이라고?”

“네……. 중국에 가셨어요.”

수민은 입술을 깨물었다. 쉽지 않으리라 생각했지만 역시였다. 직접 나설 수밖에.

채영이 잘하고 있을지 속을 태우며 그녀는 차를 한 모금 마셨다.

수민과 차 회장이 이야기하는 동안 채영은 화장실을 핑계로 위층을 둘러보았다. 어디에도 여자의 흔적은 보이지 않았다.

워낙 큰 저택이라 모든 방을 열어 볼 수도 없고 여자를 찾지 못하면 또 수민이 난리를 피울 텐데.

걱정을 지우지 못한 채 주방으로 향했다. 조리사 아주머니가 내주는 커피를 마시며 채영은 수민과 차 회장의 담소가 끝나기를 기다렸다.

“곧 봄이라고 점점 날씨가 따뜻해지네. 더 따뜻해지기 전에 팥죽이나 한번 쑤어 먹을까.”

용산댁이 팥을 꺼내 오며 조리사 아주머니에게 말했다.

“좋지. 회장님도 좋아하시고. 본부장님도 좋아하셨던 것 같은데.”

“아가씨도 잘 먹으려나.”

“별채에 한번 연락해 봐.”

큰 그릇에 팥을 쏟고 물을 받던 용산댁이 자리에서 일어나 인터폰으로 향했다.

“아가씨, 저녁에 팥죽 어때요? 괜찮아요?”

‘네, 좋아요.’라는 목소리가 작게 들렸다. 용산댁이 인터폰을 내려 두며 말했다.

“새알 만들게 찹쌀가루 좀 내와 봐.”

“알았어.”

“본부장님은 저녁 드시려나?”

“도 실장님께 여쭤보고. 안 되면 내일 아침으로 별채에 갖다드리자고.”

용산댁이 팥을 씻고 나서 조리사 아주머니가 가지고 나온 찹쌀가루로 반죽을 만들며 채영에게 물었다.

“뭐 더 드릴까? 케이크 먹을래요?”

“아니에요. 커피로 충분해요.”

채영이 고개를 흔들 때였다. 이 집사가 들어와 채영을 찾았다.

“아가씨가 찾으세요.”

“네. 커피 잘 마셨습니다.”

채영이 주방을 빠져나와 현관으로 향하자 수민이 차 회장에게 다음에 또 놀러 오겠다고 인사를 했다.

채영은 수민과 함께 본채를 나왔다.

“찾아봤어?”

채영은 고개를 흔들었다.

“본채에는 없는 것 같아요.”

“그럼? 대체 어디 있는 거야.”

“아주머니들 말씀 들어 보니까. 아무래도 별채에서 차건욱 본부장님이랑 같이 지내는 것 같아요.”

“뭐?”

수민이 소리를 높였다. 건욱과 서흔이 같이 지낸다니 믿을 수가 없었다.

“별채가 어딘데?”

채영은 안뜰을 지나올 때 한쪽에 보았던 건물을 떠올렸다.

“이쪽이에요.”

수민과 채영은 별채로 향했다. 그들은 당당하게 현관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갔다.

거실에서 커피를 마시고 있던 서흔은 문이 열리는 소리에 고개를 들었다.

보통 이 집사님, 용산댁은 다이닝 룸 쪽에 달린 뒷문으로 다녔다.

현관문을 이용하는 건 건욱과 주 대리뿐이었다. 건욱이 이 시간에 퇴근했을 리는 없고 외출을 했던 주 대리가 돌아온 건가 싶어 인사를 할 때였다.

“왔어요?”

뜻밖의 사람들이 시야에 들어왔다.

“무슨 일이시죠?”

아침에 용산댁이 손님이 온다고 약과를 만든다고 하더니 정수민을 말한 모양이었다.

“차 회장님은 본채에 계세요. 뜰을 지나서 위쪽으로 가면 돼요.”

길을 잘못 들었나 싶어 설명하는 서흔을 무시하고 수민이 거실을 가로질렀다. 그녀는 서흔의 맞은편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서흔의 눈썹이 위로 올라갔다.

“지금 뭐 하는 거죠?”

길을 잘못 들었다거나, 서흔을 만나러 왔다거나 답은 없었다. 수민은 1층과 2층으로 이루어진 별채 안을 둘러보며 입을 열었다.

“여기 별채 건욱 씨가 지내는 곳 같은데. 왜 당신이 이곳에 있어요?”

다짜고짜 쳐들어와서 심문하듯이 말하는 수민이 서흔은 불쾌했다.

“제가 대답해야 하나요.”

“나 차건욱 씨랑 결혼할 사람이에요. 물어볼 권리 충분히 있다고 생각하는데.”

“그럼 차건욱 씨한테 직접 물어보세요. 당신 말대로 당신이랑 결혼할 사람은 내가 아니잖아요. 내가 대답할 일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서흔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만 나가 주세요.”

이 여자와 실랑이를 하고 싶지 않아 자리에서 일어나 인터폰이 있는 다이닝 룸으로 걸음을 옮겼다.

이 집사에게 손님이 길을 잘못 들은 것 같다고 말하려 인터폰을 드는데 뒤따르는 소리가 들리나 싶더니 수민이 서흔의 팔을 잡아챘다.

“네가 아니면 누가 대답해. 남의 남자 넘보는 주제에 왜 이렇게 뻔뻔해.”

“넘보다니요? 누가 누굴?”

“내 남자랑 같은 집에 사는 외간 여자를 그럼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는데. 내 남자한테 거액의 목걸이를 받아내는 여자를 넌 뭐라고 생각할 건데.”

서흔은 헛웃음을 터트렸다.

그래. 그녀는 지금 민협의 약혼녀였다. 건욱과는 엄밀히 따지면 남남이지만 남들 눈에는 아주버님과 제수씨로 보일지도.

가깝고도 무척 먼 관계. 그런 두 사람이 한 지붕 아래 지낸다는 것이 어떤 눈으로 비칠지 신경 쓰이기도 했었다. 하지만.

“웃어, 지금?”

수민이 바르르 떨며 손을 들었다. 하지만 내려치는 속도보다 채영이 다가와 수민의 팔을 잡은 게 빨랐다.

“놔! 이거 안 놔!”

“언니. 여긴 차 회장님 댁이에요.”

채영은 부들부들 떠는 수민을 보면서 잡은 손을 풀지 않았다. 여기서 사고를 냈다간 뒷감당은 모두 그녀 차지가 될 터였다.

“제발요…….”

채영이 고개를 설레설레 흔들자 수민이 손을 내렸다. 분을 이기지 못한 숨소리가 거칠었다. 그러나 차 회장이 있는 집에서 소란을 만드는 것보단 참는 게 낫다는 걸 그녀도 알고 있었다.

수민이 손을 내리자 채영이 손을 놓으며 뒤로 물러났다.

하……. 촌극이 따로 없었다. 서흔의 얼굴이 붉어졌다. 열이 올라 머리가 뜨거워졌다.

이런 취급까지 당하려고 계약서에 도장을 찍었던 건가. 1억의 돈의 가치가 이렇게까지 대단했던가.

서흔은 씩씩거리는 여자를 쳐다보았다.

처음부터 막말을 지껄였던 목소리나 멸시를 담은 눈빛, 치졸했던 장난, 저급한 생각, 거기에 함부로 팔을 들어 올리는 행동까지.

임진수와 다를 바가 없었다.

“차민협이 언제 깨어날지 알 수 없으니까 타깃을 바꿨나 본데. 수작질도 여기까지만 해.”

수민은 숨을 고르며 가방에서 봉투를 꺼내 바닥에 떨어뜨렸다. 묵직한 소리가 났다.

“현금이야. 지금까지 한 노력의 보상으론 충분할 거야. 그러니까 여기서 나가.”

이 여자 머리는 무슨 꽃밭일까. 대체 무슨 꽃밭이길래 이런 짓을 할까 생각하며 서흔은 허리를 굽혀 봉투를 주웠다. 그러곤 다시 수민에게 건넸다.

“왜 안 받아? 당신 이 돈 한번 벌어 보겠다고 이 집에서 이 수고 하는 거잖아. 그러니까 내가 쉽게 주겠다고.”

“싫어. 너무 적어서.”

봉투를 위아래로 흔들며 무게를 가늠한 서흔이 수민에게 바짝 다가서며 그녀만 들리는 작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내 인생 전부를 바꿀 찬스가 눈앞에 있는데 고작 이거 가지고 나가라니.”

마음은 열이 올라 터질 것 같았지만 서흔은 예쁘게 웃었다.

“게다가 당신이 방법도 알려 줬잖아. 생각도 못 했는데 고마워. 타깃을 바꾸라니……. 정말 좋은 생각이지 뭐야.”

“야!”

수민이 소리를 지르며 달려들자 서흔은 봉투를 수민의 품 안에 밀어 넣었다.

서흔의 힘에 밀려 수민이 뒤뚱거렸다. 그러자 채영이 달려와서 넘어지지 않도록 안았다.

서흔은 그 모습을 보며 인터폰을 들었다.

“이 집사님. 손님이 길을 잘못 드신 것 같은데요. 네……. 모시러 와 주세요. 지금 당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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