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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약혼녀가 아니야 (40)화 (40/74)

40화

애초에 아무것도 없으면서 반반한 얼굴 하나 믿고 이 바닥을 넘보는 것들은 자신들과 급이 얼마나 다른지 하나하나 알려 줘야 했다. 그래야 싹을 밟아 줄 수 있었다.

“꽃집 운영해요.”

“사업이라고 하긴 그렇지. 작은 꽃집 가지고.”

수민이 끼어들어 부연 설명을 하자 세 친구들이 경악했다.

“아버지는 뭐 하시는데요? 성함이 어떻게 되세요.”

“아버지 성함은 모릅니다.”

“아버지 성함을 모른다고요?”

예의를 밥 말아 먹은 것 같은 이민정이 서흔을 발아래 두고 짓밟듯이 말했다.

“아버지는 제가 태어났을 때부터 안 계셨어요. 꽃집은 제힘으로 직접 일군 사업입니다.”

“뭐야, 그럼 미혼모 자식이에요?”

어라. 입에 걸레를 물었나.

더 이상은 참을 수 없었다. 서흔은 여상하게 입을 열었다.

“아버지가 세 분인 이민정 씨보다는 나은 것 같은데요.”

“뭐라고요!”

바르르 떠는 이민정 옆에서 김지선이 거들었다.

“이봐요! 어디서 막말이에요. 없는 거 티 내는 거예요? 못 배운 거 티 내는 거예요? 대학 어디 나왔어요? 나오긴 했어요?”

“한국시립대 환경원예학과를 나왔습니다.”

“허! 거기가 어딘데? 서울에 있긴 해요? 그리고 뭐? 원예? 환경? 그건 뭐 배우는 건데요? 농사짓는 거 배우나, 지방 어느 시골에서?”

“우리나라에서는 입학할 대학이 없어 외국에 나가 수억의 기부금을 내고서야 대학을 다녔던 김지선 씨보다야 더 유익한 것 잘 배웠으니 걱정 안 하셔도 됩니다.”

“야! 네가 그걸 어떻게 알아!”

김지선이 소리를 지르며 난리를 피우자 한유라가 만류했다.

“정말 급 떨어져서 대화 못 나누겠네. 대체 당신 같은 여자가 어떻게 차민협 상무님하고 약혼한 거지? 당신 같은 밑바닥 여자랑 약혼할 리가 없는데!”

“그건 내가 대답할 문제는 아닌 것 같네요. 한유라 씨. 나도 모르니까 묻고 싶으면 차민협 상무한테 직접 물어보세요. 수많은 여자들 중에서 왜 날 선택했는지.”

너무 당당하게 자신에 대해 말하는 서흔에 여자들은 모두 입을 다물었다.

‘그는 이런 상황을 예측하기라도 한 건가.’

며칠 전 주 대리는 사교계 인사들의 이력을 알아 두라며 커다란 파일을 들고 왔다. 도움이 될 거라는 건욱의 뜻이라 했다.

서흔은 혹시나 싶어 파일을 열어 보았다. 차민협 약혼녀로서 역할에 도움이 될까 싶어 읽기 시작했지만 재미있어서 놓을 수가 없었다.

파일 안 인물들의 이력에는 단순한 경제적, 정치적 성과뿐 아니라 사생활상의 취약점까지 모두 적혀 있었다.

굳이 사생활까지 알고 있어야 할까, 싶었지만 오늘에서야 그 이유를 명확히 알 것 같았다.

“인사는 이제 다 나눈 것 같은데. 그럼 전 이만 나가 볼게요.”

더 이상 이런 곳에 있고 싶지 않았다. 서흔은 몸을 돌려 문으로 향했다.

수민의 표정이 눈에 띄게 어두워졌다. 이를 눈치챈 채영이 앞으로 나섰다.

“어딜 가요!”

채영은 문으로 향하는 서흔의 어깨를 잡아 돌려세우려 했지만 애꿎게 목걸이에 손이 긁혔다.

“아얏!”

채영이 비명을 지르며 서흔의 목걸이를 쳐다보았다. 그녀는 그대로 그 자리에 굳어 버렸다.

“!!”

서흔의 목에는 수민이 그렇게 찾아 헤맸던 한정판 목걸이가 걸려 있었다.

차건욱 본부장이 구매해 간, 한국에는 단 한 세트밖에 없는 목걸이가. 수민에게 선물로 줄 거라 믿어 의심치 않았던 목걸이가 서흔의 목에 걸려 있었다.

“언니…….”

수민이 채영을 밀치고 서흔 앞에 섰다. 그제야 지금까지 몰랐던 것이 이상할 정도로 영롱하게 빛나는 목걸이가 눈에 들어왔다.

“그 목걸이…… 어떻게 당신이.”

수민의 목소리가 잘 나오지 않았다.

기가 막혔다.

자신에게 당연히 선물할 거라고 기대했던 그 목걸이가 왜 이 여자의 목에 있는 거지?

그것도 차민협의 약혼녀라는 여자의 목에 걸려 있는지 그녀의 상식으론 이해되지 않았다.

“이 목걸이에 무슨 문제라도 있는 건가요?”

서흔이 인상을 설핏 찌푸렸다.

하지만 수민은 대답하지 못했다. 당혹스러운 표정으로 서 있는 그녀를 지나쳐 서흔은 대기실을 빠져나갔다.

* * *

연주회는 성황리에 마무리되었다. 목걸이의 충격에 빠져나오지 못한 수민을 달래고 얼러 무대에 올린 것은 채영이었다.

그녀는 조금만 삐끗하면 떨어지는 낭떠러지 위에 서 있는 기분으로 진땀을 빼고 나서야 연주회를 마칠 수 있었다.

그리고 채영은 오늘도 살얼음판 위를 걷고 있었다.

“그게 사실이야?”

안주로 놓인 치즈가 말라가는 탁자 위에는 와인 병이 쌓여 갔다.

“네……. 매니저에게 다시 확인해 봤는데……. 본부장님이 구매해 가신 게 맞대요.”

채영의 보고를 들으며 수민은 잔에 와인을 가득 따랐다.

“그런데 왜 그게 그 여자 목에 걸려 있는데.”

“그건 저도 잘…….”

채영이 말에 수민이 날카롭게 소리쳤다.

“겨우 그까짓 년이 어떻게 그 목걸이를 가지고 있냐고!”

수민은 분에 차 소리 지르며 연거푸 와인을 마셨다.

“훔치지 않고서야 그 여자가 무슨 수로 목걸이를 손에 넣느냐고!”

“하지만……. 올 때부터 본부장님이랑 같이 왔는데 훔쳤다면 본부장님이 모르실 수가…….”

“그럼 지금 정말로 차건욱이 주기라도 했다는 거야?”

수민은 입을 닦으며 채영을 노려봤다.

“왜? 동생 여자한테 그 비싼 목걸이를 주는데. 그렇게 싫어하던 차민협의 여자한테 대체 왜 그걸 주는데.”

수민의 말에 채영이 무슨 생각이 스쳐 지나간 듯 놀란 입을 두 손으로 막았다.

“뭔데?”

“그게……. 그러니까.”

“빨리 말 안 해?”

“혹시 두 사람 금단의 사랑 아닐까요? 그러니까 불륜…….”

순간이었다. 수민의 팔이 올라가고 퍽 하는 소리와 함께 이어 쨍그랑 하고 와인 잔이 산산조각 났다.

“아악!”

채영이 머리를 감싼 채 주저앉았다. 이마를 짚은 손가락 사이로 뜨끈한 피가 흘렀다.

“너 미쳤어? 뭐 불륜?”

수민의 방방 뛰는 소리를 들으며 채영이 익숙하게 탁자 위에 놓인 휴지로 상처 부위를 지혈했다.

“말이면 단 줄 알아!!”

수민이 탁자 위에 있던 말라 버린 안주들을 채영에게 집어 던졌다. 채영은 날아오는 안주들을 맞으며 휴지만 꾹 눌렀다.

휴지가 붉게 젖어 가는데 벌컥 문이 열리며 수민의 엄마가 들어왔다.

“이게 무슨 소리야?”

“엄마!”

수민이 울음을 터트렸다. 수민과 채영의 모습을 본 수민의 엄마가 딸이 또 사고를 쳤구나 싶어 한숨을 터트렸다.

“엄마, 나 빨리 차건욱이랑 결혼시켜 줘. 회장님이랑 상견례 날짜 잡아 달라고!”

엄마는 통곡하는 수민을 꼭 껴안으며 다독였다.

“알았어. 그러니까 울지 마. 왜 울고 그래. 엄마 속상하게.”

“빨리!”

알았다, 대답하며 수민의 엄마가 휴대폰을 꺼내 전화를 걸었다.

“여보, 차 회장님한테 연락 좀 해 봐요. 빨리 상견례 날짜 잡자고……. 알았어요.”

간단히 통화를 끝낸 수민 엄마가 채영을 돌아보았다.

“넌 내려가서 치료받고. 여사님 올라와서 2층 치우라고 해.”

“네…….”

채영은 우는 수민을 달래는 이모를 등지며 1층으로 내려갔다. 채영의 이마 사이로는 끝없이 끈적한 피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 * *

채영은 고급 보자기로 포장된 선물을 들고 수민의 뒤에 서 있었다.

커다란 저택의 담벼락을 보려고 고개를 들었더니 다섯 바늘을 꿰맨 이마가 따끔거렸다.

그 난리를 치고도 분이 풀리지 않았는지 수민은 차 회장에게 전화를 걸었다. 연주회에 와 주셔서 감사하다고 인사드리러 찾아뵙고 싶다고. 실상은 차 회장 댁에 있는 그 여자를 만나러 온 길이었다.

“회장님.”

“뭐, 이리 인사를 다 왔나.”

차 회장이 반갑게 수민을 맞이했다.

“어려운 걸음 해 주셨는데 당연히 감사 인사 전해야죠. 저 정말 너무 행복했어요. 덕분에 홀가분한 마음으로 은퇴할 수 있었고요.”

수민과 차 회장이 마주 앉자 이 집사가 차 회장이 좋아하는 보이차와 약과를 내왔다. 차 회장이 보이차를 한 모금 마시며 말했다.

“아니다. 내조만 하겠다는 그 마음이 예쁜 기라. 정 회장에게는 들었다. 상견례 서두르자꼬.”

차 회장이 약과를 먹으며 오물거렸다.

“저는 지금까지 피아노가 인생의 전부였거든요. 은퇴하고 나니까 무언가 빈 것같이 허전하다고 할까요.”

피아노를 그만둔 건 아쉽기보단 홀가분했다. 항상 자신의 어깨를 짓누르는 짐을 내려놓은 기분이었다.

“그런데 건욱 씨 보면 그런 기분이 안 들어요. 제게는 빈자리를 꽉 채워 주는 그런 사람이에요. 그래서 자꾸 욕심이 나요. 어서 그 사람 옆에 있고 싶다고.”

차건욱을 향한 마음을 사랑이라 정의할 순 없었다. 몇 번 보지 않은 남자에게 순정을 쌓을 만큼 순진하지 않았다.

하지만 절대 놓칠 수 없는 남자였고 꼭 가지고 싶은 남자였다.

“건욱 씨와 빨리 가정을 꾸리고 내조할 수 있다면 좋겠다고 생각하고 있어요.”

수민은 수줍은 듯이 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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