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9화
서흔은 계단을 오르는 건욱을 따라 걸음을 옮겼다. 지나가면서 몇 번 공연장을 본 적은 있지만 직접 공연을 보기 위해 온 것은 처음이었다.
동그란 형태를 띤 건물은 단순히 공연장 하나라고 생각했던 것과는 다르게 대규모 시설이었다.
건물 안에는 오페라 극장과 소극장 같은 공연 예술 공간과 오페라 하우스와, 콘서트홀, 리사이틀 홀의 음악당 그리고 미술관, 박물관 등의 전시 공간으로 나뉘어 있었다.
서흔과 건욱은 공연홀을 지나 연주자들이 대기하고 있는 대기실로 향했다. 노크를 하고 들어간 큰 규모의 대기실은 꽃과 각종 선물들로 가득 차 있었다.
“건욱 씨!”
건욱이 들어가자 화려한 드레스를 입고 메이크업을 수정하고 있던 수민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축하드립니다.”
건욱이 인사하자 그와 서흔을 뒤따르고 있던 도 실장이 큰 꽃바구니를 내밀었다.
수민은 꽃바구니를 받으며 세상을 다 가진 사람처럼 환한 미소를 지었다.
“고마워요.”
그간의 연습으로 쌓였던 스트레스가 단번에 사라지는 기분이었다.
오늘을 마지막으로 수민은 정상에서 내려와 새로운 삶의 엘리베이터를 올라타게 될 것이다. 그리고 그녀를 기꺼이 끌어올려 줄 사람이 바로 눈앞에 있는 차건욱이었다.
수민은 꽃바구니를 채영에게 넘기고는 건욱에게 바짝 다가섰다.
“바쁜데 와 줘서 고마워요.”
붉은색 입술을 유혹적으로 놀리며 수민은 건욱의 팔을 잡고 소파 쪽으로 그를 이끌었다.
서흔은 그 모습을 뒤에서 가만히 바라보고 있었다. 건욱과 함께 대기실에 들어왔지만 수민은 그녀를 알아보지 못한 듯했다.
딱히 먼저 나서서 인사를 전하고 싶지도 않았다. 자신에게만 이중적으로 대하는 수민에게 기분 좋게 인사할 마음은 들지 않았기에 그랬다.
‘요즘 무엇은 내 기분대로 했었던가.’
서흔은 설핏 웃다 건욱과 시선이 마주쳤다.
그녀는 고개를 숙이고는 시선을 피했다. 간혹, 간혹 마주치는 건욱의 눈빛은 항상 그녀를 꿰뚫어 보듯이 짙어 숨이 막히는 기분이었다.
저 눈빛으로 얼마나 많은 여자를 흔들었을지. 그의 앞에서 눈에 들려 애쓰는 저 여자의 행동도 조금은, 이해되었다.
“오는데 불편하진 않으셨어요? 주말 저녁이라 차가 많이 막히진 않을까 걱정했거든요.”
수민은 두근거리는 마음으로 건욱을 자리에 앉혔다. 언제쯤 그녀를 위한 서프라이즈 선물을 꺼낼지 기대하며.
“괜찮았습니다. 독주회라 떨리시겠습니다.”
“이 정도 긴장감은 당연한 건데, 은퇴 기념이라서 그런지 많이 떨리네요. 제게 중요한 분들도 많이 찾아주셔서 더욱 그렇고요.”
“그렇군요.”
건욱이 짧게 대답하는데 대기하고 있던 도 실장이 다가왔다.
“본부장님, 잠시만.”
도 실장이 건욱의 귀에 작게 속삭이자 건욱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먼저 일어나야 할 것 같습니다. 좋은 연주 기대하겠습니다.”
건욱이 서흔에게 나가자 눈짓하는데 수민이 막아섰다.
“아직 저는 서흔 씨랑 인사도 제대로 못 나눴는데. 서흔 씨, 조금만 더 있다 가요.”
수민이 한껏 아쉬운 표정을 지으며 서흔에게 다가갔다.
마음 같아선 단칼에 거절하고 싶지만 서흔은 지금 차민협의 약혼녀로 이 자리에 서 있는 것이었다. 함부로 행동할 순 없었다.
“괜찮죠, 서흔 씨?”
“네. 괜찮아요. 저는 인사 나누고 자리로 갈게요.”
서흔이 고개를 끄덕이자 건욱은 그녀를 혼자 두고 자리를 비워도 될지 잠시 망설이다 도 실장과 함께 대기실을 빠져나갔다.
“정말 올 줄 몰랐네요.”
문이 닫히자 서흔에게는 앉으라는 말 한마디 없이 수민이 혼자 소파에 앉았다.
“오라고 초대한 것 아닌가요.”
“그렇긴 했지만.”
단 1초 만에 모습을 바꾸는 수민이 이젠 놀랍지도 않았다.
서흔과 수민의 다른 점이라면, 그녀는 자신의 밑바닥을 서흔에게 내보이는 데 거리낌이 없었고 서흔은 그렇지 않다는 점이었다.
“나한테 할 얘기가 뭔가요.”
서흔은 최대한 예의를 지키려 노력하며 입을 열었다.
무슨 소리를 하는지 궁금하지 않았지만, 굳이 그녀를 초대한 이유를 빨리 말해 주길 바랐다.
그때 노크 소리와 함께 한 무리의 여자들이 대기실로 들어왔다. 모두 수민의 친구들인지 수민과 여자들이 서로 반갑게 인사를 나누었다.
차라리 이 틈에 빠져 주는 게 나을 것 같아 서흔이 자리를 피하기 위해 문 쪽으로 향하는데 한 여자가 말했다.
“수민아, 네 손님 그냥 가시는데.”
“어머, 서흔 씨 왜 말도 없이 가요? 마치 도망가는 것처럼.”
“친구분들 오셨으니 저는 먼저 가 볼게요. 말씀들 나누세요.”
“그러지 말고 같이 이야기해요. 제가 소개할게요.”
수민이 서흔의 팔짱을 끼며 환하게 웃으며 말했다.
“왼쪽부터 대민전자 이민정 씨, 동진제약 김지선 씨, 우선식품 한유라 씨. 고등학교 때부터 친한 제 친구들이에요.”
“네, 안녕하세요.”
회사가 그들의 정체성이라도 되는 듯 강조하는 소개가 특이했다.
있는 집안 자제들은 소개도 별스럽게 한다고 생각하는데 수민이 서흔을 여자들에게 소개했다.
“이쪽은 W어패럴 차민협 씨의 약혼녀 유서흔 씨.”
“어머! 그 소문 속의 차민협 약혼녀를 이렇게 다 만나게 되네요. 그럼 수민이 너, 결혼하면 두 사람 가족 되겠네.”
이민정이 이죽거리며 말을 하자 수민이 고개를 기울이며 서흔을 바라보았다.
“글쎄, 그건 두고 봐야지.”
그 눈초리 속에는 서흔은 수민과 같은 집안의 사람이 되지 않으리라는 확신이 담겨 있었다.
“어쨌든 반가워요.”
여자들이 소란을 떨며 손을 내밀었다. 서흔은 얼떨결에 인사를 나누었다.
“그런데, 서흔 씨네는 뭐해요? IT? 식품? 호텔? 한 번도 유서흔 씨 집안이 뭐 하는지 듣지를 못했네요.”
“그러게. 내 친구들 중에도 서흔 씨를 아는 사람이 아무도 없더라. 고등학교 동창도 그렇고, 대학 동창들도 그렇고. 혹시 대학 어디 나왔어요?”
“얘들아, 그런 질문 너무 실례다. 서흔 씨는 우리랑은 다른데.”
“우리랑 다르다고?”
수민의 말에 여자들의 눈동자가 서흔에게 몰렸다.
* * *
건욱은 도 실장을 따라 수민의 공연이 있을 리사이틀 홀로 들어갔다. 붉은 의자들이 무대를 중심으로 계단 형식으로 배치되어 있었다.
그들의 자리는 박스석에 마련되어 있었다. 양옆이 커튼으로 가려져 있는 박스석은 조용히 공연을 감상하기에 알맞았다.
“오, 건욱아.”
건욱이 들어가자 먼저 도착해 그를 호출했던 차 회장이 손을 들었다.
“이리 와서 인사드려라.”
차 회장과 함께 서 있는 남자를 알아본 건욱이 다가가며 고개를 숙였다.
“안녕하십니까, 정 회장님.”
“어, 오랜만이네. 차 대표.”
정수민의 아버지이자 정운그룹 회장인 정운채가 건욱을 보며 너털웃음을 지었다.
“아닌가, 이제 본부장이라고 불러야 하나?”
“편한 대로 불러 주십시오.”
“그럴 수야 있나. 파격 승진인데 제대로 불러야지. 안 그렇습니까, 차 회장님.”
정운채의 너스레에 차 회장은 흐뭇하게 웃었다. 본부장, 이란 세 글자는 단순한 단어가 아니었다. 그건 미래의 W그룹을 주인을 지칭하는 말과 같았다.
“하모. 교수가 장관이 됐는데 계속 교수님이라 부를 수는 없는 기재.”
“그럼요. 그럼요.”
정운채의 대답에 건욱은 쓴웃음을 삼켰다.
호칭 따위 딱히 상관없었지만, W그룹의 승계에 맞춰 계산기를 두드리는 두 사람의 속내가 빤히 들여다보이는 것 같았다.
“그나저나 차민협 상무 일로 상심이 크시겠습니다.”
“말도 못 한다. 속이 썩어 문드러지는 기분이데이.”
민협을 주제 삼아 이야기를 나누는 두 사람의 목소리에 여자의 목소리가 겹쳐졌다.
이야기를 하고 싶다던 정수민과 인사를 나누겠다 말하는 유서흔은 결 자체가 다른 사람들이었다.
친해질 수도 없고, 친해질 이유도 없는 그런 애매한 관계.
그런 두 사람이 모여 할 이야기라 해 봤자 정수민이 치졸한 수로 서흔을 골탕 먹이려는 것밖에 없을 것이다.
치켜뜰 땐 고양이 같아지는 눈매나, 그에게도 절대 지지 않는 말솜씨를 보면 수더분하게 당할 것 같지는 않은데.
그래도 데리러 가 봐야 하나 생각하며 건욱은 묵묵히 서 있었다.
* * *
둥그런 눈들이 서흔에게 몰리자 수민은 속으로 짜릿한 쾌감이 몰아치는 것 같았다.
확실히 친구들을 부르길 잘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미리 언질을 준 것도 없는데 어쩜 이리 제대로 판을 깔며 깔아뭉개기 적절한 말만 골라 하는지 박수라도 쳐 주고 싶었다.
“유서흔 씨네는 무슨 사업 해요? 무얼 하길래 우리랑은 달라?”
“뭐, 유별난 사업이라도 하시나?”
여자들의 질문에 수민이 비릿하게 웃으며 서흔을 바라보았다.
“사업 하나 하긴 한다고 들은 것 같은데. 서흔 씨, 뭐였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