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8화
수민이 주얼리 숍으로 들어서자 매니저가 뛰어나와 그녀를 맞이했다.
“오셨습니까.”
매니저가 VIP 고객인 수민에게 단정한 미소를 지었다. 방문할 때마다 아무리 작은 것이라도 두 세트 정도는 기본으로 사가는 수민이었다.
취향이 까다롭고 비위를 맞추기가 어렵지만 워낙에 자주 방문하는 터라 숍에서는 신경 쓰는 고객 중 하나였다.
“이쪽으로 모시겠습니다.”
매니저의 안내에 안쪽 룸으로 들어간 수민이 소파에 앉았다. 채영이 뒤를 따라 들어와 옆에 섰다.
“한정판 세트 들어온 것 있죠? 그것 좀 보여 주세요.”
오늘 이 숍에 온 것은 한정판 세트 때문이었다. 날짜가 정해지지 않았을 뿐, 브랜드에서는 한 달 전부터 한정판 세트를 홍보했었다.
생각보다 고가라서 채영은 조금 무리라고 생각했지만, 수민은 이번 피아노 연주회에서 착용하기에 최고라고 생각했다.
최고의 피아니스트 정수민은 한정판 주얼리 정도는 걸쳐 줘야 격이 맞았다.
“아…… 그 제품은.”
매니저가 망설이다가 입을 열었다. 정수민의 심기가 불편해질 게 뻔하지만 숨긴다고 숨길 수 있는 내용은 아니었다.
“방금 전 다른 고객님께서 구매하셨습니다.”
“뭐라고요?”
수민의 눈매가 사납게 올라갔다.
“어머, 매니저님! 우리 하루 이틀 보는 것도 아닌데 언니한테 보여 주지도 않고 먼저 판매를 하다니요! 이게 말이 돼요!”
채영이 수민 대신 바르르 떨며 화를 냈다. 그래야만 수민이 자신에게 화풀이하는 걸 조금이나마 덜 수 있었다.
낮게 가라앉은 수민이 눈초리만 바짝 올린 채 매니저를 바라보았다.
“……누군데요?”
매니저는 입 안이 바싹 마르는 걸 느끼며 입술을 달싹였다.
“아, 그게. 고객님 정보는…….”
“매니저님! 안 되겠네. 잠깐 저 좀 보죠!”
채영이 쿵쿵 소리를 내며 룸을 나갔다. 매니저가 할 수 없이 채영을 따라 잠시 자리를 비웠다.
“매니저님, 고객 정보를 함부로 발설할 수 없다는 거, 저도 잘 알아요.”
방금 전까지 화를 내던 채영이 맞나 싶을 정도로 애처롭게 매니저에게 말을 꺼냈다.
“그런데 우리 언니, 곧 연주회 하시는 거 아시죠? 최고의 무대에서 최고의 아티스트가 최고의 의상을 갖춰 입었는데 한정판 주얼리 세트가 없다고 생각해 보세요. 그게 말이 돼요?”
“……죄송합니다.”
“연주회가 끝이 아니에요. 언니 연주회에 W그룹 차일도 회장님과 차건욱 본부장님까지 다 오셔요.”
무슨 말인지 알죠, 라는 식의 채영의 말에 워낙에 눈치에 이골이 난 매니저는 눈이 번쩍 뜨였다.
W그룹과 정운그룹 간의 결혼설이 사실이었다는 걸 정수민의 최측근인 김채영에게 직접 확인한 것과 다름없었다.
아무래도 그녀 생각으로 차건욱 본부장의 방금 전 구매는 정수민을 위한 선물 같았다.
“차건욱 본부장님이요?”
“네.”
“사실은…….”
매니저는 주변 눈치를 살피고 조용히 채영의 귀에 속삭였다.
“그 한정판 세트 차건욱 본부장님이 사 가셨습니다.”
선물용이라는 이야기도 언뜻 들었다는 뉘앙스를 전달하니 놀란 채영이 두 손으로 제 입을 가렸다.
“어머! 진짜로 차건욱 본부장님이 구매하신 거예요?”
“네. 본부장님께서 미리 말씀 안 하시고 구매하셨으니 두 분만 비밀로 알고 계시면 좋을 것 같아요.”
매니저가 귀띔을 하자 고개를 끄덕인 채영이 기분 좋게 룸으로 들어갔다.
“언니! 한정판 세트 말이에요.”
“우리가 살 수 있어, 없어? 그것만 말해.”
또 채영의 사설이 길어질 것 같아 수민이 인상을 썼다.
“그거 살 필요 없을 것 같아요. 글쎄 한정판 세트 차건욱 본부장님이 구매하셨대요! 언니 연주회 서프라이즈 선물인가 봐요!”
자신이 선물을 받는 사람처럼 흥분한 채영이 빨갛게 달아오른 얼굴로 방방 뛰었다.
“……그게 진짜야?”
잔뜩 치켜 올라갔던 수민의 눈초리가 부드럽게 곡선을 만들며 아래로 내려왔다.
건욱이 제 선물을 준비할 줄은 몰랐는데. 수민의 가슴이 두근두근 뛰었다.
“그럼요! 아, 어떻게 언니가 원하는 걸 미리 그렇게 딱 아시고 구매하셨는지 센스가 장난 아니시네요. 언니, 받을 때까지 절대 모른 척하셔야 돼요! 서프라이즈니까. 아셨죠?”
채영은 이미 수민이 받은 것처럼 호들갑을 떨어 댔다. 수민의 마음 역시 채영의 행동만큼이나 야단스러웠다.
빨리 연주회 날이 되기를 수민은 바랐다.
* * *
연주회 날이 빠르게 다가왔다.
서흔은 지난번 백화점에서 샀던 옷을 꺼내 입었다. 처음 피팅 룸에서 입어볼 땐 어색하기만 했는데 커다란 전신 거울 앞에 서보니 오히려 자신 같지 않아 느낌이 꽤 좋았다.
레드 드레스를 입은 유서흔은 완전히 다른 사람이었다.
차민협의 약혼녀로서 차 회장의 집에서 지내는 그녀는 다른 사람이니 이보다 더 그녀에게 잘 어울릴 옷은 없었다.
특히나 건욱이나 그의 옆에 선 정수민을 상대하기 이보다 좋은 갑옷은 없었다.
상처받은 자존심과 흔들렸던 마음은 레드 드레스 안에 숨겨 둘 것이다.
건욱에게 흔들렸던 과거의 자신을 잊고 자신감 넘치게 꼿꼿이 얼굴을 드러낼 생각이었다.
“옷은 다 입었고.”
허전한 목에 뭐라도 걸쳐야 할까.
서흔은 작은 액세서리 숍처럼 세트별로 구비되어 있는 서랍장을 열었다.
다 고급스럽고 우아한 주얼리 세트지만 딱 눈에 띄는 것이 없었다.
주 대리님에게 골라달라고 해야 하나, 고민할 때 똑똑 노크 소리가 들렸다.
“들어오세요.”
“주 대리님, 이것 좀 골라 주실래요?”
“주 대리는 주차장에 있습니다.”
그녀가 주얼리에 고정된 고개를 들자 문에 기대 서 있는 건욱이 보였다. 그날 이후 아직 제대로 대화를 나누지 않은 서흔은 그와 있는 게 불편했다.
“웬일이세요?”
“준비 끝났습니까.”
“액세서리만 하면 될 것 같아요.”
그러고 보니 주 대리는 그녀가 메이크업과 헤어 디자이너의 손길을 받는 동안 미리 드레스와 구두, 가방까지 세팅해 맞춰 두곤 했다.
그런데 오늘은 왜 주얼리를 빼놨지?
깜빡할 스타일은 아니라는 생각에 서흔이 의아해하며 목걸이 하나를 들어 거울에 비춰 목에 대 봤다.
거울 너머로 서 있는 건욱이 시야에 들어왔다.
“별로야.”
묻지도 않았는데 평가하는 건욱에 서흔이 콧잔등을 찡그렸다. 제 눈에도 완벽하게 어울려 보이지는 않았지만, 저렇게 대놓고 아니라고 하니 기분이 상했다.
서흔은 목걸이를 내려두고 더 잘 어울리는 걸 찾기 위해 고개를 숙였다.
건욱은 희게 드러난 목덜미를 바라보며 서흔에게 가까이 다가갔다.
“찾는다고 어울리는 게 나올 것 같진 않은데.”
“뭐라고요?”
뺨이 화르르 불타오른 서흔이 바짝 몸을 세웠다. 흰 얼굴에 생기가 돌 듯이 붉은빛이 점점이 번졌다.
그 모습이 털을 세우는 고양이 같아 건욱은 설핏 웃으며 목걸이 하나를 그녀의 목에 길게 늘어뜨렸다.
“뭐예요?”
정수민에게 선물한다고 철석같이 믿고 있던 그 한정판 세트였다.
왜 나한테 이걸.
당황한 서흔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선물.”
“이걸 왜 나한테……?”
“저번에 빚진 게 있다고 했잖아요.”
“그러니까 빚진 게 대체 뭔데요? 난 당신한테 받을 게 없어요. 이건 너무 과해요. 안 받을래요.”
“처음이자 마지막 공식적 외출이 될 수 있는 자리입니다. 격 떨어지는 액세서리는 안 됩니다.”
“차건욱 씨.”
격이 떨어지다니.
“이따위 것으로 격이 높아지는 거라면 난 필요 없어요.”
건욱은 그녀의 분노를 들으며 목걸이의 체인을 채웠다.
“당신이야 언제나 훌륭하지. 비루하고 나약한 건 나와 차 회장이니 당신이 좀 감수해 줘요.”
목 뒤로 살짝 닿았다 떨어지는 그의 손끝에 서흔은 움찔했다. 그녀는 몸을 비틀었다.
“비켜요.”
“움직이지 말아요.”
그녀의 말을 사뿐히 무시한 건욱이 이번엔 벨벳 케이스에서 이어링을 꺼냈다.
“잘못하면 다칠 수도 있어요.”
“하고 싶지 않다고요!”
서흔은 격을 운운하는 주얼리에, 그리고 그의 손길만 닿으면 바르르 떨리는 심장에 자존심이 상했다.
“이 세트, 전 세계 100개 한정판입니다. 국내에는 이 세트 단 하나고요.”
“그래서요?”
“끊어지거나 손상되면 그것도 보상받을 겁니다. 슈트 값에 얹어서.”
건욱은 말도 안 되는 핑계를 대며 고집스럽게 그녀의 귓불에 이어링 하나를 걸었다.
귓불에 느껴지는 선명한 촉감에 서흔의 속눈썹이 파르르 떨렸다.
“긴장됩니까.”
“국내에 들어온 유일한 한정판 세트라면서요. 이거 망가지면 보상하라면서요?”
“잘 아네.”
건욱이 낮게 웃음을 흘리며 브레이슬릿까지 그녀에게 채워 주었다.
“어떻습니까.”
그녀보다 머리 하나는 더 큰 건욱이 거울 속 서흔에게 시선을 고정한 채 그녀의 드러난 어깨에 손을 올렸다.
서흔은 제 모습을 바라보았다. 전문가의 손길이 듬뿍 담긴 메이크업과 헤어, 완벽하게 소화한 레드 드레스와 우아함을 더욱 배가시킬 주얼리까지.
완벽했다. 그래서 자존심이 상했다.
“마음에 들어요?”
그녀의 귓가를 울리는 낮은 목소리에 서흔은 거울 속 그와 시선이 마주쳤다.
거울 속 그의 눈빛이 마치 그녀의 드러난 하얀 살결을 샅샅이 핥는 것 같았다. 아랫배에 낯선 긴장이 고였다.
“……늦겠어요.”
서흔은 떨리는 시선을 내리며 어깨를 잡은 손길에서 벗어났다.
“준비하고 끝나면 나와요.”
건욱이 가볍게 웃으며 방을 나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