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내 약혼녀가 아니야 (37)화 (37/74)

37화

서흔은 마지못해 자리에서 일어났다. 자신이 입을 옷인데 적극적으로 입어 보고 싶은 마음은 없었다.

수민의 연주회 일정이 다가올수록 가슴이 갑갑했다. 그런 자리가 익숙하지도 않았고 축하해 주고 싶은 마음도 없었다.

연주회 초대를 거절하지 못했던 건 건욱 때문에 욱하는 마음에서였다. 서흔은 가늘게 눈을 뜨고 건욱을 돌아보았다.

그 여자를 위해선 모든 것을 해 주겠다는 듯이 서흔을 채근했던 모습이 뇌리에서 떠나지 않았다.

그 연주회에 참석시키려고 이렇게 손수 옷까지 대령하는 꼬락서니를 보니 배알이 뒤틀리는 것 같았다.

“아무거나 추천해 주세요.”

서흔은 옷을 쓱 훑어보다가 매니저에게 부탁했다. 어떤 옷이든 무슨 상관이랴. 그 여자 연주회가 나에게 뭐가 중요하다고.

매니저가 난처한 듯 건욱을 돌아보자 건욱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건욱은 망설임 없이 검정 스커트와 블라우스 세트를 꺼냈다.

A라인으로 퍼져 무릎까지 오는 스커트와 벌룬 라인의 소매가 포인트인 화이트 블라우스 세트는 깔끔했지만 크게 감흥을 불러일으킬 만한 옷은 아니었다.

“매니저님께 말씀드렸는데 왜 차건욱 씨가 골라요?”

서흔은 차가운 목소리로 말했다.

다른 사람도 아니고, 건욱의 예비 신부인 정수민의 연주회에 그가 추천한 옷을 입고 가는 건 자존심이 도저히 허락하지 않았다.

‘당신이 고른 건 입기 싫어요.’

‘그냥 입죠.’

건욱과 서흔 사이에 말 없는 신경전이 파바박 튀었다. 집에 있을 때는 타인의 시선은 신경 쓰지 않고 편하게 말할 수 있었다.

하지만 이곳이 프라이빗 룸이라 해도 백화점은 개방적인 장소였다.

수많은 눈과 귀와 입이 모여 있었기에 건욱이 말했던 것처럼 말조심할 필요가 있었다.

“디자인도 별로고 마음에 안 들어요.”

“그럼 직접 골라요.”

“…….”

“마음에 드는 게 없으면 이거 그냥 입고요.”

건욱이 검정 스커트와 블라우스 세트를 그녀의 눈앞에 내밀었다. 서흔의 눈동자가 이글이글 불탔다.

“협박에 능한 거 알아요?”

“설마 그것만 잘할까?”

결국 서흔은 행거로 다시 눈을 돌렸다. 평소의 그녀라면 절대 고르지 않았을 강렬한 레드 색상의 드레스를 꺼냈다.

“이게 좋겠네요.”

계절감을 듬뿍 담은 톤 다운된 레드 색상에 하트 모양의 가슴 라인과 허리의 리본 포인트로 격식을 차리면서도 귀여운 느낌을 물씬 주는 드레스였다.

“그걸 입겠다고?”

“그럼요. 피팅 룸이 어디죠?”

“안내해 드리겠습니다.”

매니저를 따라 서흔은 옷을 들고 안쪽으로 사라졌다.

10분 후.

서흔은 어색한 자신의 모습에 쭈뼛쭈뼛 피팅 룸에서 나왔다.

그래도 어느 정도 값비싼 옷에는 적응되었다고 생각했는데 이 옷은 아니었다.

이렇게 몸의 곡선을 드러내며 가슴이 깊이 파인 옷은 입어 본 적이 없었다.

격식 있는 장소에 어울릴 법한 옷을 입고 있는 여자는 꼭 자신이 아닌 것처럼 우아하고 기품 있어 보였다.

“어머, 고객님 너무 아름다우세요.”

매니저가 호들갑을 떨면서 그녀를 거울 앞으로 이끌었다.

서흔은 거울로 둘러싸인 작은 디딤대 위, 건욱의 앞에 섰다.

건욱의 눈동자가 커졌다. 그는 시선을 서흔에게 고정한 채 그저 바라만 보았다. 눈을 돌릴 수 없을 만큼 서흔의 모습은 그를 사로잡았다.

강렬한 붉은 색은 그녀의 피부를 더욱 햐얗게 만들었고 얉은 천은 몸의 굴국을 그대로 드러냈다. 게다가 저 깊게 파인 가슴 선은…….

“다른 옷으로 하죠.”

“어? 너무 잘 어울리시는데…….”

매니저가 굳어지는 건욱의 얼굴을 보며 재빨리 말을 바꿨다.

“그, 그럼 다른 옷으로 더 보실까요?”

하지만 서흔의 생각은 달라 보였다. 그녀는 건욱과 눈도 마주치지 않으며 단호하게 말했다.

“아니요. 이 옷으로 할게요.”

서흔이 딱 잘라 말하자 건욱의 눈썹이 비뚜름하게 올라갔다. 그가 깊게 파인 가슴 라인을 못마땅하게 바라보았다.

“다른 것도 입어 봐요.”

“아니요. 난 이 옷이 마음에 들어요. 이걸로 할게요.”

더 이상의 의견은 듣지 않겠다는 듯이 피팅 룸으로 들어가 버렸다.

“그걸로 하죠.”

마지못해 건욱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재킷 안 지갑을 꺼내 카드를 내밀자 매니저가 재빠르게 다가가 카드를 받아 들었다.

“잠시 기다려 주시면 준비해 드리겠습니다.”

마음에 안 들어 할 때는 언제고 서흔이 옷을 갈아입고 나오자 이미 계산이 끝나 있었다.

“옷은 제가 살게요.”

집에 있는 옷이야 이미 구비된 것이라 어쩔 수 없지만 이런 것까지 신세 지고 싶지 않았다.

더더욱 정수민의 연주회에 가기 위해 구입하는 옷을 건욱에게 받고 싶지 않았다.

“선물입니다.”

“왜요?”

갑자기 선물을 주는 건욱에 서흔이 삐딱하게 물었다. 정수민의 연주회에 제대로 입고 오라는 뜻인가.

“예전에…….”

“예전에?”

“빚진 게 있으니 갚는 셈 치죠.”

“빚을 받을 게 아니라 나한테 졌다고요?”

아무리 생각해도 그에게 받을 빚은 없었다. 아리송한 그의 말에 질문을 던지려는데 건욱이 걸음을 틀었다.

“여긴 또 왜요?”

갑자기 주얼리 숍으로 들어가는 건욱을 서흔이 붙잡았다. 비딱한 감정이 좀처럼 가라앉지 않았다.

“잠깐 살 게 있어서. 들어갑시다.”

“그럼 보고 오세요.”

서흔이 몸을 돌리자 건욱이 그녀의 팔을 붙잡았다.

잠시 침묵이 흘렀다. 지나가는 사람들이 대치하고 있는 두 사람을 흥미롭게 바라보았다.

“봐 줘야 할 게 있습니다.”

슬쩍 살짝 잡은 팔이었지만 그의 단호한 의지가 쉽게 꺾일 것 같지 않아 서흔은 발을 돌렸다.

“오셨습니까. 본부장님.”

익숙한 듯 안쪽 VIP 룸으로 안내한 매니저가 깍듯하게 인사를 했다.

“여자 액세서리 좀 보여 주세요.”

“네, 잠시 기다려 주십시오.”

기다리는 사이 간단한 다과와 차가 나오고 손에 벨벳 장갑을 낀 매니저가 고급 상자를 몇 세트 들고 나왔다.

“제일 먼저 보여 드릴 것은 네크리스, 이어링과 브레이슬릿까지 한 세트로. 이번에 전 세계 단 100세트 한정판으로 나온 상품입니다. 우리나라에는 단 한 세트가 들어왔습니다.”

매니저의 설명이 한쪽 귀로 들어왔다. 한쪽 귀로 나가 흩어졌다.

아무래도 정수민에게 선물할 주얼리를 사러 온 것 같은데 굳이 자신이 같이 동행할 이유가 무엇인지 불편하기만 했다.

“장인 정신을 기반으로 처음부터 끝까지 폴리싱 가공을 마무리했습니다. 라운드 브릴리언트 다이아몬드 역시 백 퍼센트 수작업으로 이루어져 정교하게 세팅되었을 뿐 아니라 최고의 광채를 만나 보실 수 있습니다.”

이어진 설명이 무얼 말하는지 알겠다는 생각이 들 만큼 주얼리가 영롱하게 반짝였다.

“이걸로 주시죠.”

“다른 제품 더 보지 않으시고요?”

“괜찮을 것 같군요. 이걸로 주세요.”

“네, 준비해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한정판, 그것도 국내에는 단 한 세트를 들여온 명품 주얼리이니 수민이 얼마나 좋아할지 눈에 선하게 보였다.

매니저가 가져왔던 세트 모두를 가지고 나갔다. 서흔이 찻잔을 들며 말했다.

“나한테 빚진 게 있다는 말…… 무슨 뜻이에요?”

하지만 그녀의 물음에 건욱은 다른 질문을 던졌다.

“마음에 들어요?”

“뭐가요?”

“주얼리 말입니다.”

“그게 지금 중요한가요?”

“중요하다면. 봐 달라고 하지 않았습니까.”

“내 의견이 뭐 중요하다고요.”

“중요해요.”

“아니요, 중요하지 않아요. 당신뿐만 아니라 그 집에 있는 누구에게도 내 의견은 중요하지 않죠.”

더 이상 참지 못한 서흔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생신 연회도, 연주회도, 오늘 쇼핑까지 내 의견이 담긴 적이 있던가요.”

그 생신 연회부터 오늘까지 참고, 참았던 감정이 소용돌이쳤다.

“유서흔.”

그녀는 주얼리 숍을 빠져 나왔다. 바로 건욱이 그녀를 따라 나왔다. 서흔은 걸음을 빨리했지만 얼마 가지 않아 발을 멈췄다.

주 대리가 그녀를 기다리고 있었다.

“하……. 뭘 하겠다고.”

감정 하나 추스를 시간조차 그녀에게 허락하지 않는 사람한테.

주 대리가 그녀를 뒤따르던 건욱과 서흔을 번갈아 보며 건욱에게 물었다.

“댁으로 모실까요?”

건욱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에 주 대리가 서흔을 안내했다.

“가시죠.”

서흔이 주 대리에게 말했다.

“저한테는 물어보지 않으시네요. 나도 자유 의지가 있는 사람인데.”

“불만은 주 대리 말고 나한테 이야기해요.”

“여기서요?”

서흔의 냉담한 눈으로 건욱을 돌아보자 그가 고개를 저었다.

“아니, 집에서.”

“집에는 언제 올 건데요? 그곳이라고 우리가 대화할 시간이 있었던가요.”

건욱의 입에서 낮은 한숨이 새어 나왔지만 차갑게 가라앉은 서흔의 눈동자는 변함없었다.

“가시죠.”

주 대리의 깍듯한 예의에 서흔은 몸을 돌려 그녀를 따라갔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