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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약혼녀가 아니야 (36)화 (36/74)

36화

서흔은 고개를 들었다. 정면으로 차건욱과 정수민이 나란히 앉은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다시 심장이 시큰거리는 것처럼 들쑤셨다. 나란히 앉아 있는 건욱과 수민의 모습은 그녀의 심기를 뒤틀리게 만들었다.

그녀와는 다르게 반짝이는 수민의 얼굴이, 당당하게 건욱 옆에 앉은 수민의 행동이, 모두에게 환대받는 수민의 존재가.

그녀를 비참하게 만들어서라고. 그래서 이렇게 심장이 욱신거리는 것이라고. 서흔은 생각했다.

짧은 저녁 식사가 끝이 났다.

서흔은 물을 한 모금 마셨다. 음식을 거의 먹지 않았음에도 입 안이 까슬하다. 깁스한 팔도 불편했고 빨리 자리를 벗어나고 싶었다.

주형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아버지, 먼저 일어나 보겠습니다.”

“민협이 면회 시간이가?”

“네.”

“그래. 가 봐야지. 애미도 고생해라.”

“네. 수민 양 천천히 있다 가요.”

“네, 안녕히 가세요.”

“조심히 가십시오.”

수민과 건욱이 일어나 주형 내외에게 인사를 하자 서흔 역시 어색하게 인사를 했다.

네 사람은 차와 과일이 준비된 응접실로 자리를 옮겼다.

서흔은 손을 씻고 싶다며 화장실로 향했다. 잠시라도 숨을 돌리고 싶었다.

화장실로 들어간 서흔은 찬물에 손을 담갔다. 열이 조금은 내려앉는 것 같았다.

차 회장도, 민협의 부모님도, 수민도 그녀가 지금 감당하기엔 너무 버거운 사람들이었지만 그렇다고 표를 내고 싶지 않았다.

오늘만 지나면 만날 일 없겠지.

마음을 다잡은 서흔이 화장실을 나가는데 문 앞에 수민이 서 있었다. 서흔이 지나치려 하자 수민이 입을 열었다.

“왜 여기서 지내는 거예요?”

“네?”

수민의 질문이 무슨 뜻인지 몰라 서흔이 뒤돌아보자 미소를 지운 수민이 물었다.

“아무리 차 회장님이 마음이 너그러우셔도 그렇지, 아직 정식 약혼한 것도 아닌데 이렇게 지내는 거 너무 염치없지 않아요?”

식사 시간 내내 애교 가득한 여자는 어디 갔는지 무시가 담겨 있는 수민의 눈동자가 차가웠다.

“혹시 일부러 그러는 건가요? 이렇게라도 붙어 있으려고?”

“……무슨 이야기가 하고 싶은 거죠?”

“그냥 궁금했어요, 없는 사람들은 다 그런 건가. 염치도 없고, 자존심도 없고, 낄 데 못 낄 데 구분도 못 하고.”

이게 수민의 본 모습일까. 날 선 말투와 그녀를 무시하는 듯한 눈동자가 방금 전의 모습과는 너무 상반됐다.

“초면에 말이 너무 심하네요.”

“정곡을 찔리면 꼭 말이 심하다고 하더라.”

수민은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차민협 상무도 없는 이런 자리에 정말 나올 줄은 몰라서 하는 말이에요. 대담한 건지, 무모한 건지 궁금해서.”

“이봐요.”

“앞으론 생각 좀 하고 행동해요. 너무 계산만 하지 말고. 그러다 큰코다칠 테니까.”

방금 전까지 막말을 서슴지 않았던 수민은 태연히 서흔을 지나쳐 화장실 안으로 들어가 문을 잠가 버렸다.

서흔은 뭐라도 항변하려 벌렸던 입을 다물었다. 상대를 잃은 그녀는 전의를 상실해 버렸다.

서흔이 응접실로 돌아오고 얼마 지나지 않아 수민이 그녀 앞에 마주 앉았다.

“회장님, 이렇게 귀한 자리에 초대해 주셔서 감사해요.”

“와 줘서 내가 고맙지. 다음번에도 편히 놀러 오거래이.”

수민의 인사에 차 회장이 흐뭇하게 미소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네. 자주 놀러 올게요. 그리고……. 회장님께 부탁드리고 싶은 게 하나 있는데 들어주실 거죠?”

거절이라곤 당해 본 적 없는 듯한 당돌한 질문이었다.

“뭐꼬?”

“제가 이번에 연주회를 하거든요. 시간 되시면 참석해 주실 수 있으실까요?”

수민이 이번 연주회를 끝으로 은퇴하고 결혼을 준비하려 한다는 것을 차 회장은 알고 있었다.

그는 내조를 위해 은퇴를 결정했다는 수민의 마음이 참으로 흡족했다.

“하모. 가야지. 건욱이랑 함께 가마.”

건욱의 의사를 묻지도 않은 채 차 회장이 확답을 했다.

민협의 사고 후 차 회장은 승계 작업을 서두르고 있었다. 그 사고는 그의 경각심을 불러일으켰다.

큰아들을 잃은 것처럼, 민협이를 잃은 것처럼 모든 것을 잃을 수도 있다는 걸.

그래서 생일을 핑계 삼아 수민을 초대해 건욱과 자리를 만들었다.

건욱은 수민을 달가워하지 않았지만, 그것이 두 사람의 결혼에 커다란 영향을 미칠 건 없었다.

결혼 역시 비즈니스의 한 측면일 뿐이니, 건욱은 그의 결혼을 받아들이게 될 터였다.

제 아비의 과거사를 모르지 않았고, 건욱은 제 아비처럼 미련하지 않았으니 차 회장은 걱정할 게 없었다.

“서흔 씨도 함께 오세요~”

수민이 천진난만한 얼굴로 서흔을 바라보았다. 표정과 다르게 마음속으로는 계산을 끝낸 후였다.

수민은 처음 건욱의 옆에 서 있던 서흔을 봤을 때부터 마음에 들지 않았다.

채영의 이야기 속 공주님이라는 말에 SNS를 검색하다 발견한 ‘신데렐라’라는 별칭에는 기가 막힐 정도였다.

평범하다 못해 형편없는 집안에 학력, 꽃집 운영 경력도 별 볼 일이 없었다.

가진 거라곤 순진한 듯 색기 가득한 반반한 얼굴밖에 없는 여자였다.

감히 자신과 동급이 되어 W그룹의 며느릿감으로 소문이 도는 것만으로도 자존심이 상했고 덩달아 자신마저 급이 떨어지는 것처럼 치욕스러웠다.

이런 감정을 오래 갖고 싶지 않았다.

수민은 서흔을 연주회에 초대해 수많은 사람들 앞에서 수민과 서흔이 얼마나 다른 위치에 있는 사람인지를 보여 줄 생각이었다.

“아니요. 저는…….”

서흔은 어떻게 거절의 말을 골라야 할지 망설였다. 수민의 입장에서는 그녀만 빼놓고 초대할 수 없어 그냥 던지는 말일 터였으니 그녀가 안 간다고 해도 상관없었다.

“혹시 클래식 피아노 안 좋아하세요?”

그런데 수민이 서흔의 말을 툭 자르며 상처받은 표정을 드러내며 난감해했다.

“제가 괜한 부담을 드렸나 봐요.”

한껏 미안해하는 수민의 말은 서흔에게 순수하게 다가오지 않았다.

서흔에게는 우아한 취미 따위는 없을 거라는 비아냥을 가득 담은 초대의 의도가 무엇인지 알기 어려웠다.

하지만 그 뜻을 알고 싶지도 않고, 가고 싶지 않아 거절의 말을 꺼내려 할 때였다.

“회장님. 제가 이번 연주회를 마지막으로 은퇴하려 생각하다 보니 많은 분들이 함께해 주셨으면 하는 마음에 욕심을 부렸나 봐요.”

수민이 가련한 표정을 지었다.

“하모. 여러 사람이 축하해 줘야지. 하지만,”

여러 사람이 있는 곳에 굳이 서흔이 나타나 구설수를 만들 필요 없다 생각한 차 회장이 수민을 말리려는데 건욱이 입을 열었다.

“함께 가죠. 초대를 거절하는 것도 수민 씨한테 예의는 아닌 것 같은데.”

건욱의 시선이 서흔을 향했다.

“그래요, 서흔 씨.”

수민은 환하게 미소 지었다. 건욱이 자신 편에 서서 말해 주자 한껏 의기양양해졌다.

“알겠습니다. 초대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서흔은 주먹을 꽉 쥐고 간신히 웃으며 대답했다. 아무렇지 않은 척, 민협의 약혼녀로서 고개를 끄덕였다.

“즐거운 시간 되면 좋겠어요.”

수민이 초대장을 전달하며 싱긋 웃었다.

* * *

“주 대리님과 이 집사님이 준비해 주셔도 될 것 같은데.”

차량에 올라타며 서흔이 볼멘소리를 했다.

“회장님 생신 연회 때는 이 집사님이 준비해 주셨잖아요. 제 사이즈도 잘 아시고 안목도 좋으시던데요, 저보다 더.”

“중요한 행사이니 직접 다녀오라고 하셨습니다.”

운전을 하는 주 대리가 백미러를 통해 서흔과 시선을 맞췄다.

중요한 행사는. 서흔은 건욱의 명령을 전달하는 주 대리에 기운이 빠졌다.

집에 가만히 있으라 말할 땐 언제고 이제는 오라 가라 명령이 다양했다.

“…….”

잠자코 운전을 하는 주 대리를 보며 서흔은 옅은 한숨을 내쉬었다.

주 대리는 딱 필요한 말만 전달하고 그 외의 다른 말은 한마디도 하지 않는 과묵한 사람이었다.

편하기도 했지만, 한편으로는 답답하기도 했다. 지금은 확실히 후자였다. 어떻게 말을 해도 그녀의 뜻은 들어 주지 않는 벽창호였다.

결국 서흔은 그녀의 의지와 상관없이 백화점에 도착했다.

주 대리의 안내에 따라 백화점 안으로 들어가니 프라이빗 룸에 건욱이 소파에 앉아 그녀를 기다리고 있었다.

“바쁜 줄 알았더니, 꽤 한가해 보이네요.”

서흔의 그의 옆에 털썩 주저앉았다.

한가하다라.

건욱은 피식 웃으며 입을 열었다.

“준비된 옷 보도록 하죠.”

“네, 알겠습니다.”

매니저가 서흔의 사이즈에 맞춰 준비된 드레스가 걸린 행거를 끌고 나오자 건욱이 서흔에게 눈짓했다.

“한번 봐요.”

“제가요?”

“그럼 내가 고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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