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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약혼녀가 아니야 (35)화 (35/74)

35화

생각났다. 저 여자는 민협의 약혼녀였다.

주형은 사고 처리를 하며 병원에서 봤던 서흔의 얼굴을 떠올렸다.

“네가 어째서 이곳에…….”

도대체 민협의 약혼녀라는 아이가 왜 이곳에 있는지 알 수 없었다.

주형은 거짓으로 데려온 민협의 약혼녀 따위에게 신경 쓸 시간은 없었다.

어차피 진짜도 아니기에 아예 까맣게 잊고 있던 약혼녀가 갑자기 차 회장의 생신에, 이런 곳에 나타나니 너무 기막혔다.

“여길 어떻게 들어왔지?”

주형의 날카로운 눈빛이 서흔에게 꽂혔다.

전혀 반기는 목소리가 아니었다. 서흔은 그간의 있었던 일을 어떻게 설명해야 하나, 아니 설명을 해도 되는 건가 싶어 자신도 모르게 건욱을 바라보았다.

“여보, 누군데요?”

혜림은 부들부들 떨며 서흔을 향해 손가락질하는 주형에게 물었다.

“저는.”

더 이상 입을 다물고 있을 수 없어 서흔이 입을 여는데 갑자기 건욱이 그녀의 앞을 막아섰다.

마치 서흔을 보호하는 것처럼 막아선 건욱에게 주형과 혜림의 곱지 않은 시선이 쏟아졌다.

건욱에게 뭐 하는 짓이냐고 주형이 소리치려 입을 여는 그때, 쇳소리 가득한 목소리가 뒤에서 들려왔다.

“민협이 약혼자다.”

차 회장이 다이닝 룸으로 들어오고 있었다.

“인사하러 가던 날 사고 났다 카더만. 여즉 얼굴도 몰랐단 말이가.”

“정신이 없었습니다. 아버지, 아시잖아요.”

언제 얼굴이 일그러졌냐는 듯이 표정부터 달라진 주형이 빌빌거리듯 말했다.

“알제. 사고도 정리도 여즉이고, 말들도 많고. 그래가, 니 말대로 니들은 정신이 없을 것 같아 내 이리 데려다 놨다.”

“아, 죄송합니다. 아버지. 제가 먼저 챙겼어야 했는데.”

어설피 웃는 주형과 달리 혜림의 얼굴은 붉으락푸르락했다.

차 회장의 말은 귀에 잘 들어오지 않았다. 제 아들은 아직 눈도 못 뜨고 있는데 멀쩡히 걸어 다니는 서흔만 눈에 들어왔다.

사고도, 민협도, 오늘의 이 수모도 모두 이 여자 때문인 것 같아 분노가 치솟았다.

그런 혜림의 마음을 귀신같이 알아챈 주형이 혜림의 손을 꼭 잡았다.

주형 역시 혜림과 같은 마음이었다.

민협이 이 여자 이야기를 꺼낼 때부터 말도 안 되는 이야기라며 말렸어야 했다는 뒤늦은 후회가 들었지만 이제 와 되돌릴 수는 없었다.

주형은 억지로 끓어오르는 분노를 꾹꾹 누르며 표정을 갈무리했다.

“거기까지는 생각을 못 했어요. 그나저나 생신 축하드려요, 아버지.”

차 회장이 고개를 끄덕였다.

“축하드립니다.”

건욱이 인사를 건네자 서흔도 따라 고개를 숙였다.

“다들 앉으라.”

차 회장이 상석에 앉자 다들 자리를 잡고 앉았다. 그때 이 집사가 다이닝 룸으로 들어왔다.

“손님 도착하셨습니다.”

손님이란 소리에 다들 얼굴이 굳는데 이 집사의 뒤로 한 여자가 따라 들어왔다. 정수민이었다.

“안녕하셨어요, 회장님. 초대해 주셔서 감사해요. 제가 좀 늦었을까요?”

“좋은 시간에 딱 맞게 도착했구마.”

“생신 축하드려요.”

수민이 차 회장에게 준비한 꽃다발과 선물을 내밀었다.

“뭐 이런 걸 다 준비했노.”

“회장님 생신에 빈손으로 올 수 있나요.”

꽃다발을 받은 차 회장이 껄껄 웃었다. 그 장면을 바라보는 주형과 혜림은 간신히 억지 미소를 지었다.

회장님이 정말 많은 걸 준비했다 생각하며 건욱은 피식 웃어 버렸다.

“여기 정운그룹의 외동딸 정수민이. 알지?”

차 회장이 주형 내외에게 소개를 했다.

“네, 그럼요. 수민 양 잘 알죠. 아버님은 잘 지내시지?”

“네, 언제 한번 같이 뵙자고 말씀 전해 달라고 하셨어요.”

“그래요, 언제 필드 한번 같이 가야겠네.”

가깝지는 않지만 멀지도 않은 고등학교 선후배 사이인 수민의 부친에 주형이 넉살 좋게 대답했다.

“네. 전해 드릴게요.”

인사를 마친 수민이 건욱에게 고개를 돌렸다.

“건욱 씨, 오랜만이에요.”

“오랜만이네요.”

“초대해 주셔서 감사해요.”

초대는 차 회장에게 받았지만 수민은 건욱에게 환하게 미소 지었다. 그러다 건욱 뒤에 서 있는 낯선 여자를 보고 호기심 가득한 표정으로 물었다.

“이분은 누구실까요?”

자신을 가리키는 목소리에 서흔의 고개가 올라갔다. 뭐라고 소개를 해야 할까. 낯선 손님까지 맞닥뜨리자 정신이 없었다.

“여기는 민협이 약혼녀다. 인사해라.”

“안녕하세요, 정수민이에요.”

“이쪽은,”

“들었죠? 정운그룹 정수민 씨.”

차 회장이 수민을 소개하려는데 건욱이 끼어들었다. 차 회장의 눈매가 가늘어졌다.

“……유서흔입니다.”

서흔의 인사에 수민이 손을 내밀었다. 서흔이 손을 내밀어 잡자 정수민이 환한 미소를 지었다. 서흔도 거울처럼 마주 보며 억지로 미소를 지었다.

“자자, 다들 앉자. 이 집사.”

수민이 자연스럽게 건욱 옆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이 집사가 차 회장의 입맛에 맞추어 준비한 전복과 문어, 닭이 들어간 해신탕을 뚝배기에 내왔다. 전복을 넣어 갓 지은 영양밥도 각 자리에 놓였다.

차 회장이 해신탕을 한술 뜨자 식사가 시작되었다. 서흔은 기계적으로 수저질을 했다.

“그래, 요새 많이 바쁘나. 연주회 준비한다고 카든데.”

식기에 수저 부딪히는 소리만이 적막한 다이닝 룸을 감쌀 때 차 회장이 입을 열었다.

“제가 바빠 봤자 건욱 씨만 하려고요.”

수민이 살포시 웃었다. 지난번 맞선 이후 그를 보지 못했다는 것을 차 회장에 피력했다.

“와, 건욱이 바쁘다 켔나? 그거 다 파이다. 바빠 봤자 제 여자한테 시간 하나 못 내겠나. 안 그르나.”

제 여자?

차 회장의 말에 서흔의 시선이 저절로 건욱에게 향했다. 건욱은 서흔의 시선을 피하지 않았다. 두 사람의 눈빛이 허공에서 부딪쳤다.

“네.”

“그럼 우리 밥 먹을까요?”

기회를 놓치지 않고 수민이 기다렸다는 듯이 눈꼬리를 접으며 살랑거리듯 물었다.

“시간을 한번 맞춰 보도록 하죠.”

건욱이 무덤덤하게 대답했다. 만족스러운 대답을 이끌어 낸 차 회장은 다시 수민에게 시선을 돌렸다.

“정 회장은 어케 잘 지내나.”

“네, 잘 지내세요.”

“언제 자리 한번 만들어 봐라. 가족이 될 낀데 미리 인사하고 친해지면 좋지 않겠나.”

“네, 준비해 보도록 할게요.”

“건욱이도 시간 잘 비워 두고.”

“네.”

세 사람의 대화를 듣고 있던 주형은 무릎 위 주먹을 불끈 쥐었다.

아무리 장단을 맞추기 위해 이 자리에 앉아 있다지만 아버지의 뻔뻔스러운 태도가 도를 넘고 있었다.

차 회장은 원래 자잘한 정이 많은 스타일은 아니었다. 형, 차주태가 죽었을 때도 감정이란 게 아예 없는 사람처럼 뒷수습에만 몰입했던 사람이었다.

뼛속까지 사업가적인 기질만 타고난 것처럼 모든 일을 실리 위주 사고방식으로 판단하고 행동하는 사람인 걸 알지만.

멀쩡히 살아 있는 민협과 더불어 주형의 존재 자체를 이렇게 무시할 줄이야.

차 회장은 주형이나 민협은 그의 머릿속에서 지워 낸 것처럼 오로지 건욱만 바라보고 있었다.

아직 민협이 깨어나지도 못한 마당에 걱정은커녕 건욱의 결혼만 빠르게 추진하려 하다니. 주형은 이를 갈았다.

마음이 들끓는 건 주형뿐만이 아니었다.

‘가족이 될 사이라…….’

서흔이 들고 있던 수저를 조용히 테이블 위로 내려놓았다.

차 회장과 수민의 대화는 짧았지만 서흔은 많은 사실을 짐작할 수 있었다.

건욱과 수민 두 사람 사이에 결혼 이야기가 오간다는 것, 차 회장이 수민을 건욱의 짝으로 흡족해한다는 것이었다.

서흔은 자리의 불편함을 넘어서 심장이 짓눌리는 것 같았다.

식사를 하는 동안 쏟아져 나온 수민과 건욱의 이야기는 아직 정리되지 못한 채 서흔의 마음을 소란스럽게 만들었다.

건욱이 W호텔 대표라는 사실을 알게 된 순간부터 그녀를 기만했다는 건 알고 있었다.

하지만 현실은 그녀의 상상보다도 더 잔인했다. 충격이 그녀를 뒤흔들었다.

건욱은 수민과 결혼 이야기가 오가는 와중에도 아무것도 모르는 그녀와 술잔을 기울이고 키스를 나눴다.

‘내가 너무 바보 같아서…….’

제 엄마처럼 타인에게 휘둘리는 삶을 살지 않았고 앞으로도 그럴 거라 믿어 의심치 않았는데. 속절없이 다가온 남자가 그녀의 모든 벽을 와르르 무너뜨렸다.

순진했어, 내가 너무 순진했던 거야.

그녀는 건욱에게 철저하게 이용당했다.

알고 있었던 일이지만 잔인하게도 다시 한번 그 사실을 확인하자 심장이 난도질을 당한 것처럼 욱신거렸다.

서흔은 그저 흥밋거리에 지나지 않았다.

처음부터 끝까지 건욱이 그녀에게 진심이었던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단 한 번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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