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4화
늦은 오후, 주 대리가 상자를 하나 들고 건너왔다. 상자 안에는 단정한 원피스가 들어 있었다. 이 집사가 급하게 준비한 것이라 했다.
급하게 준비했다고 해서 어설피 준비된 것은 없었다.
별채에는 헤어 및 메이크업 아티스트가 예약된 시간에 방문했고, 서흔은 전문가의 도움으로 완벽히 새로 태어났다.
서흔이 준비하는 동안 묵묵히 서서 지켜보던 주 대리는 그녀가 준비가 끝나자 7시쯤 본채로 오라는 말을 남기고 떠났다.
주 대리 역시도 차 회장의 생신 연회 준비로 무척 분주한 것 같았다.
서흔은 거실에 앉아 시계를 초조하게 바라보았다. 그러다 6시 40분이 되자 본채로 향했다.
어느새 찬바람이 조금씩 잦아들고 있었다. 서흔은 안뜰 터줏대감 같은 황장목 아래서 잠시 눈을 감고 숨을 골랐다.
‘긴장하지 말자.’
솔 냄새가 폐부 깊숙이 들어왔을 때였다. 낯선 목소리가 들려왔다. 서흔은 저도 모르게 나무 뒤로 몸을 숨겼다.
“아버님 진짜 노망나신 거 아니에요? 우리 민협이가 지금 혼수상태인데 어떻게 이럴 때 생일잔치를 하실 수 있어요?”
아무리 생각해도, 해도 너무했다. 병상에 누워 있는 민협을 차 회장이 어떻게 생각하는지 뻔히 들여다보여 더욱 화가 났다.
“건욱이가 사고가 났어도 이러셨겠냐고요!”
“쉿, 목소리 못 낮춰? 지금 여기가 어디라고 큰 소리야?”
잔뜩 긴장한 채 주형이 주변을 날카롭게 살피며 낮은 목소리로 으르렁거렸다.
“아니, 그렇잖아요. 우리는 하루하루가 전쟁터 같은데. 아버님은 아무렇지 않으신 것처럼 잔칫상을 받으시겠다고 이 난리를.”
금방이라도 울음을 터트릴 듯한 혜림이 입술을 피가 날 만큼 세게 꽉 깨물었다.
주형 역시 같은 생각이었다. 건욱이 병상에 있었다면 이렇게 생신 연회를 집에서 하는 일은 없었을 것이다.
차 회장은 옛날부터 큰아들만 싸고돌았다. 그건 형이 죽고 없는 지금도 똑같았다. 오직 차건욱만 그의 손자인 것처럼.
“울화통이 터져도 참아야지, 별수 있어? 괜히 밉보이지 않게 표정 관리 잘해.”
“당신은 그게 돼요?”
“안 되면? 차건욱 저놈에게 모두 다 빼앗길 셈이야? 저 노친네 속셈 모르겠냐고!”
혜림이 울음을 터트릴 듯 흐느끼자 주형이 날카롭게 대꾸했다.
차 회장의 속내는 뻔했다. 만약 민협이 깨어나지 못한다면 이제 W그룹의 후계자는 건욱밖에 남지 않는다.
차 회장은 리스크가 큰 선택보단 안전한 하나에 올인하는 사람이었다.
그가 건욱의 승계에 힘을 실으리라는 건 누가 보아도 뻔한 일이었다.
“난 가끔 아버님이 이러실 때마다 너무 무서워요. 아주버님 돌아가실 때도 그저 회사가 전부인 양 눈 하나 깜짝 안 하셨잖아요.”
“입조심하라니까.”
“내가 틀린 말 했어요? 지금 그까짓 승계가 중요하냐고요. 우리 민협이는 생사를 오가고 있는데.”
“목소리 낮추래도!”
날카로운 혜림의 말에 주형이 으름장을 놓았다.
“이게 다 차건욱이 때문이에요. 그 일만 없었어도 우리 민협이가 이렇게 되진 않았을 거라고요.”
갑자기 터져 나온 혜림의 목소리에 서흔은 놀라 입을 틀어막았다.
건욱이 오해를 받고 있는 것은 알았지만 민협의 부모님까지 그렇게 생각하고 있는 줄은 몰랐다.
“여보, 제발 어떻게 좀 해 봐요. 우리 민협이 이렇게 두고 나 못 참아요. 차건욱 그놈이 우리 민협이 이렇게 만들어 놓고 잘 먹고 잘 사는 꼴 죽어도 못 본다고요!”
“그래서 이러는 거잖아.”
주형이라고 참고 싶어서 참는 게 아니었다. 당장이라도 건욱을 감옥에 처넣고 싶은 걸, 아니 죽여 버리고 싶은 충동을 하루에도 몇 번씩 참아 넘기고 있었다.
차 회장은 당장 민협의 어패럴을 전문 경영인에게 맡기려고 했다. 그는 민협의 자리를 지키는 대신 교통사고를 조용히 처리하길 원했고 주형은 수긍할 수밖에 없었다.
그렇다고 가만히 참아 줄 생각은 없었다. 교통사고의 범인은 무조건 차건욱이 될 것이니까.
“나한테 다 생각이 있으니까. 오늘은 조용히 노친네 생신 축하하는 자리라고 생각해. 알았어?”
“……알았어요.”
혜림이 대답했다. 그녀는 가방 안에서 팩트를 꺼내 얼굴을 들여다보며 감정을 갈무리하느라 애를 썼다.
주형이 한참이나 그런 혜림을 기다리다가 입을 열었다.
“부적은 어떻게 됐어?”
“받아 왔어요. 민협이 베개 아래에 잘 넣어 뒀어요. 그 부적만 잘 지키면 늦어도 한 달 안에 깨어난대요.”
큰마음 먹고 한 장이나 들인 부적이었다. 그 부적을 생각하니 혜림의 마음이 점차 눈에 띄게 진정되었다.
어느새 혜림의 얼굴이 평소처럼 돌아왔다.
“그래. 우리 민협이 곧 깨어날 거야. 그러니까 그때까지 잘 버티는 거야. 알겠어?”
“네.”
혜림을 한껏 다독인 주형이 집 안으로 사라졌다.
한참 동안 숨죽이며 본의 아니게 남의 이야기를 엿듣게 된 서흔은 참았던 숨을 내쉬었다.
민협의 부모님인 듯한 두 사람은 그의 사고로 상심이 무척 커 보였다.
그런 와중에 차 회장의 생신 연회에 참석하게 되었으니 감정이 상할 수 있을 테지만.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사고의 가해자로 건욱을 지목할 줄은 몰랐다.
그녀로서는 상상하기 어려운 무서운 일이었다. 가족까지 건욱을 의심하다니.
차라리 듣지 않았다면 좋았을 텐데.
어떤 표정으로 민협의 부모님께 인사를 드려야 할지 난감했다.
게다가 왠지 민협의 부모님들도 차 회장처럼 그녀를 적대시할 것 같은 생각이 들었다.
‘오히려 그게 나을지도…….’
그녀를 환영하는 부모님이라면 거짓 약혼이라는 것에 대한 죄책감이 더욱 클 것이었다.
차 회장에게도, 민협의 부모님에게도 환영받지 못하는 약혼녀인 것은 상관없었다.
어차피 민협과의 약혼은 계약이었고 조만간 마무리될 일이니까.
그렇지만 긴장이 쉽게 가라앉지 않았다. 아무리 괜찮다고 생각해도 면전에서 그녀를 적대시하는 인물을 세 명이나 상대할 생각을 하니 숨이 갑갑해졌다.
‘핑계라도 대면 좋았을걸.’
이제 와 발길을 돌리기도 어려웠다.
단단히 마음을 다잡기 위해 눈을 감고 깊게 심호흡했다. 몇 번의 숨을 고르고 눈을 뜨는데 남자의 모습이 보였다.
검은 긴 코트를 입은 그는 어스름한 저녁 뒤 어둠을 몰고 들어오는 밤처럼 느껴졌다.
건욱도 서흔을 발견했는지 두 사람의 시선이 마주쳤다.
건욱의 시선이 평소와는 다르게 완벽하게 꾸민 그녀의 머리부터 발끝까지 천천히 내려갔다 다시 올라왔다.
“여기서 뭐 합니까.”
“회장님이 저녁 식사 함께하자고 하셔서요.”
서흔이 대답하자 건욱이 피식거렸다.
“회장님이 별짓을 다 하시네요, 이제.”
“오늘은 당신도 몰랐던 일인가 보네요.”
“그러네요. 놓친 게 또 있었네.”
그가 웃었다. 이 집의 최고 권력자는 차 회장이었다. 그 권력이란 무소불위의 독재였다. 통보는 있을지언정 합의는 없는 권력자.
그런 차 회장이 유서흔의 연회 참석 통보에 건욱을 건너뛴 것은 명백히, 서흔에게서 관심을 끊으라는 뜻이었다.
‘어차피 내칠 약혼녀를, 굳이 가족 모임에 초대를? 무슨 생각이지.’
서흔을 부른 이유가 분명 있을 텐데, 그 이유가 뭔지 짐작 가지 않았다.
그렇다면 부딪쳐 보는 수밖에.
“들어가죠.”
앞장서는 남자의 뒷모습에 아이러니하게도 서흔의 불편했던 마음이 차츰 가라앉았다. 그가 있어 다행이라는 생각도 들었다.
처음 교통사고를 당하고 그를 다시 만났을 때만 해도 그녀에게 가장 커다란 걸림돌은 차건욱 같았다.
그를 마주 보는 것도, 대화하는 것도, 이 집에 들어오는 것도 어려웠는데.
차 회장이나 민협의 부모님을 생각하니 오히려 건욱이 자기편인 것처럼 든든하게 느껴지는 건 왜인지.
지난번 차 회장과의 식사는 예고편에 지나지 않았다. 오늘 펼쳐질 본편은 어떨지 감도 잡히지 않았다.
하지만 막은 올랐고 무대에서 도망치기엔 너무 늦어 버렸다.
‘들어가자.’
마음을 다잡은 서흔은 건욱의 뒤를 따랐다. 현관문을 열고 들어서자 맛있는 냄새가 풍겼다. 보지 않아도 얼마나 진수성찬이 차려졌을지 짐작이 갔다.
다이닝 룸으로 향하자 주형과 혜림이 기다리고 있었다. 건욱과 서흔을 보자마자 두 사람의 얼굴이 구겨졌다.
“오셨습니까?”
건욱이 인사했지만 쌩한 두 사람의 시선은 건욱을 지나쳐 뒤로 향했다.
“안녕하세요.”
두 사람과 시선이 마주치자 서흔은 고개를 숙였다. 처음 뵙는 민협의 부모님은 예상했던 대로 차가운 반응이었다.
“누구죠?”
혜림이 서흔을 바라보며 물었다.
인사를 드리기로 하던 날 사고가 나는 바람에 혜림은 서흔을 보지 못했다.
어리둥절한 혜림과 달리 주형은 여자의 얼굴을 샅샅이 살폈다. 어딘가 낯이 익었다.
“너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