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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약혼녀가 아니야 (33)화 (33/74)

33화

“붙잡아 달라고 말할 거잖아요.”

그때처럼.

“미리 넘겨 준 겁니다.”

그의 손가락이 닿은 귓불 아래가 붉게 달아올랐다. 긴장감이 턱 끝까지 차오르는 것 같았다.

하지만 서흔과 다르게 건욱의 눈빛은 태연했고 행동은 자연스러웠다. 원래 이렇게 친절하고 다정한 사람이었나 싶게.

W호텔의 대표인 줄 몰랐을 때도 건욱은 언제나 그녀에게 툴툴거리면서도 그 바닥엔 친절이 깔려 있었다.

그때야 날 가지고 놀 목적이 있었기 때문이라는 생각이었지만 지금은 마땅한 이유가 떠오르지 않았다.

용의자라고는 하지만 민협의 약혼녀인 서흔은 그에게 중요한 사람이 아니었다.

아니, 용의자라고 생각한다면 오히려 친절한 그의 모습이 더욱 이상했다.

그런데, 대체 왜.

갑자기 병원에 나타났던 것도, 그가 직접 운전하여 집에 온 것도, 다이닝 룸에 숨겨진 컵라면을 찾아준 것도.

모두 다 ‘왜’라는 질문 아래 모여들었다.

“…….”

그녀의 시선에 담긴 의문을 눈치챈 걸까. 건욱이 입을 열었다.

“할 말이 있어요?”

“아니요.”

궁금한 것투성이라 할지라도 물어야 할 것과 묻지 말아야 할 것 정도는 구분할 수 있었다.

지금 그녀의 마음속 가득한 궁금증은 절대 물어보면 안 되는 것 중 하나였다.

“먹어요. 면 불어요.”

서흔은 그에게서 시선을 돌렸다.

그녀는 볼에 닿는 시선을 무시하며 남은 면발을 흡입했다. 어느새 조용한 다이닝 룸에는 면을 먹는 소리만 들렸다.

* * *

귓가에 무언가가 기어 다니는 것 같은 소리가 들려왔다. 자세히 듣지 않으면 잘 들리지도 않는 작은 소리였지만 살아 있는 무언가가 내는 소리라는 건 분명했다.

‘설마 바퀴벌레……?!’

화들짝 놀란 서흔이 눈을 번쩍 떴다. 온몸에 소름이 돋아 주변을 휙휙 둘러보는데 새하얀 천장과 고급스러운 가구들이 눈에 들어찼다 사라졌다.

잠깐. 여기는.

서흔이 처음 독립해서 살았던, 바퀴벌레가 이따금씩 튀어나오던 그 원룸이 아니었다.

“아…….”

이곳은 건욱이 그녀를 데리고 들어 온 별채였다. 호텔보다도 더 낙원 같은, 조금만 더 익숙해지면 집으로 돌아가기 싫을 것 같은 곳이었다.

그제야 귀에 닿았던 소리가 창밖의 짹짹거리는 새소리라는 걸 깨달았다.

몸의 긴장이 확 풀리자 한없이 푹신한 침구 속으로 퐁당 빠지는 느낌이었다.

서흔은 손을 뻗어 휴대폰을 들었다. 7시가 지나 있었다.

새벽 기상이 몸에 새겨졌던 때가 있었나 싶을 정도로 조금 늦게 일어나는 일상이 자연스럽게 몸에 익어가고 있었다.

이 푹신한 침구도, 당연한 듯 그녀의 요구에 맞춰 주는 고용인들도, 그녀가 움직일 때마다 동행하며 운전까지 해 주는 주 대리도.

아침저녁으로 가끔 집에서 부딪치며 인사를 나누게 되는 건욱도 자꾸만 익숙해지려 했다.

‘그래서 바퀴벌레 꿈을 꾼 건가.’

바퀴벌레가 나오는 그 원룸이 네 현실이라는 것을 잊지 말라고?

서흔은 끈적하게 들러붙는 괜한 감정을 털어 내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욕실에 들어가 거울을 보는데 어제 늦은 밤에 라면을 먹고 자서인지 얼굴이 퉁퉁 부어 있었다.

‘그 남자도 부었으려나.’

서흔은 고개를 흔들었다. 자신처럼 두 눈이 퉁퉁 부은 차건욱은 상상이 되지 않았다.

그는 멀쩡한데 자기만 이렇게 퉁퉁 부어 있는 얼굴로 대면한다면 같이 컵라면을 나눠 먹은 동기로서 무척 억울할 것 같았다.

서흔은 조금이라도 붓기를 가라앉히기 위해 손바닥으로 볼을 통통 두드리며 간단한 샤워를 했다.

방을 나가자 달그락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다이닝 룸으로 들어가니 용산댁이 아침을 차리고 있었다.

“어제 컵라면 먹었어요?”

“네? 네…….”

서흔은 몰래 간식 먹다 들킨 아이처럼 뜨끔하여 대답했다. 그녀는 얼굴을 붉히며 자리에 앉았다.

“대표님도 같이 드셨어요?”

“아…… 네.”

“잘 드시지도 않으시던 분이 갑자기 왜 컵라면을 드셨대. 시장하면 부르실 일이지.”

서흔은 왜인지 엄마에게 꾸중 듣는 아이 때로 돌아간 기분이 들었다.

“몸에 좋지도 않은 거, 많이 먹지 마요.”

“알겠습니다.”

“다음에 보면 대표님도 못 드시게 하고. 먹고 싶은 게 있으면 호출해요.”

용산댁이 살짝 콧잔등을 찡그리며 말했다.

“이 집사님 아시면 경을 치신단 말이야.”

“아…… 알겠습니다.”

아무래도 이 집사가 건욱의 식단에 신경을 많이 쓰는 것 같았다.

꾸중을 끝낸 용산댁이 부지런히 아침상을 준비했다. 오늘은 간단한 토스트와 삶은 달걀, 여러 과일 등이 식탁에 올라왔다.

서흔은 군침 도는 식탁을 보면서도 바로 포크를 들지 않고 2층을 흘끔 쳐다보았다. 용산댁이 우유를 따라 주며 말했다.

“대표님은 새벽에 일찍 나가셨어요. 조찬 모임 때문에요.”

어젯밤 같이 컵라면을 먹어서인가 저도 모르게 아침도 함께 먹을 수 있지 않을까 기대했던 마음이 사그라졌다.

“네.”

서흔은 작게 대답하고는 노릇하게 구워진 프렌치토스트에 시럽을 뿌리며 말을 이었다.

“여사님은 아침 드셨어요?”

“오늘은 일찍 먹었어요. 새벽부터 아주 주방이 난리예요.”

용산댁은 손을 부지런히 놀렸다. 얼른 다이닝 룸을 정리하고 주방으로 가야 했다.

“무슨 일 있으세요?”

“오늘이 회장님 생신이거든요.”

서흔은 예쁘게 잘린 토스트를 한입에 넣었다. 언뜻 얼마 전부터 차 회장의 생신이라 부산스럽게 준비 중이던 모습을 보았던 게 떠올랐다. 며칠 후라고 생각했던 생신이 벌써 오늘이었다.

“손님이 많이 오시겠네요.”

워낙에 규모 자체가 남다르게 큰 저택이니 손님이 많은 거야 문제없겠지만 일하는 사람들이 고생이긴 할 터였다.

“예년 같았으면 손님들이 많이 오셨겠지만 지금은 상무님 입원 중이시잖아요. 이번에는 조용히 가족들끼리 밥 한 끼만 하실 예정이래요. 그래서 이번엔 출장 요리사들도 안 오고 전부 우리가 해야 해요.”

“고생이 많으시겠어요.”

“고생은 뭐. 늘 하는 일인데.”

용산댁의 말에 서흔은 오늘은 특별히 더 조용히 별채에만 있어야겠다는 생각이었다.

이럴 때 외출이라도 할 수 있으면 좋겠지만 그럴 수 없었다.

“그럼 저녁 식사 하시는 건가요?”

“네. 부사장님 내외분도 오시고 대표님도 오시고 해야 하니까요. 아가씨도 늦지 않게 저녁 시간에 맞춰 준비하고 계셔요. 주 대리가 알아서 도와주겠지만.”

“네? 저도요?”

처음 듣는 이야기에 서흔의 눈동자가 큼지막해졌다.

“그런 이야기는 못 들었는데요.”

그녀를 인정하지도 않는 차 회장의 생신에 그녀를 부른다는 게 이해되지 않았다.

특히나 민협도 없는 마당에 자신이 참석해야 한다는 게 너무 부자연스럽게 느껴졌다.

“아, 이 집사님께 아직 못 들으셨어요? 어제 말씀하신다고 했는데.”

“아직이요.”

어젯밤, 서흔이 민협의 병문안으로 자리를 비우는 바람에 전달이 늦어진 것 같았다.

“어제저녁에 갑자기 회장님께서 아가씨도 함께하자고 하셨대요. 손님인데 당연히 함께하셔야 한다고.”

“하지만 저는…….”

눈치가 빠른 용산댁이 혀를 찼다. 듣지 않아도 서흔이 무슨 말을 하고 싶어 하는지 알 것 같았다.

오래되진 않았지만 서흔을 겪어 본 바로는, 확실히 일반 재벌 집 규수들과는 다르게 사람이 교만하지 않고 서글서글한 면이 있었다.

용산댁은 안타까운 마음에 하지 않아도 되는 말을 더했다.

“잘 들어요. 회장님이 말씀하신 건 그대로 따라야 해요. 그게 이 집안의 법도야.”

용산댁은 서흔이 민협의 약혼녀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회장님이 깐깐하시고 어려운 분이시지만 어쩌겠어요. 이 집안 어른이신걸.”

서흔은 입 안이 까끌해져 포크를 내려놓았다. 어디까지 차 회장이 휘두르는 대로 따라가야 할지 감이 잡히지 않았다.

차민협은 6개월을 버텨야 한다고 했지만.

지금 계약자인 그는 입을 열 수 없었다. 그렇다면 이대로 파혼을 하는 게 이들에게나 그녀에게도 좋지 않을까.

“물론, 상무님이 안 계시는데 혼자서 참석하는 게 쉽진 않을 거예요.”

용산댁의 이야기를 들으며 서흔은 마음을 다잡았다.

‘그렇게는 할 수 없어.’

그에게 1억이라는 돈을 빚지고 모른 척 도망칠 수는 없었다. 건욱의 오해가 진실이 되게 만들 순 없었다.

“그래도 이럴 때일수록 더욱 잘 보이려 애써야지. 요령껏 조용히 앉아 있다 나와요. 그래야 회장님도 더 마음에 차실 거야.”

“네.”

서흔은 힘겹게 대답했다. 소란스러운 마음이 좀처럼 가라앉질 않았다.

“하여튼 난 건너갈게요. 할 일이 너무 많네. 식사 다 하면 호출해요.”

용산댁이 뒷문을 열고 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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