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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약혼녀가 아니야 (32)화 (32/74)

32화

엘리베이터를 타고 VIP 주차장으로 향한 건욱과 서흔은 주차되어 있는 차량으로 향했다. 하지만 어디에도 기사님은 보이지 않았다.

“운전 직접 하려고요?”

“왜 그렇게 놀라요. 운전 직접 하는 사람 처음 보는 것처럼.”

그냥 막연히 기사님과 함께 왔으리라고 생각했다. 퇴원하는 날도 기사님과 함께 왔으니까.

하지만 오늘 이 남자는 마치, 자신을 데리러 온 것처럼 병원까지 와서 직접 운전하는 차에 그녀를 태웠다. 병문안을 왔다는 그는 정작 병문안도 하지 못했다.

서흔은 이 상황이 의아하고 이상했다.

“아니에요.”

“아닌 게 아닌데.”

“아닌 게 맞아요. 이제 그만 출발해요.”

이쪽은 그만 쳐다보고요.

갈수록 오해가 눈덩이처럼 불어나는 기분에 서흔은 입을 꾹 다물어 버렸다. 집으로 돌아오는 동안 차 안엔 침묵이 감돌았다.

언뜻 코끝을 스치는 묵직한 머스크 향이 그녀의 신경을 곤두세웠다.

그나마 다행이라면 이제 낯익은 차 회장 댁이 눈앞에 보이기 시작했다는 것이었다.

꼬르륵.

‘흡!’

그러다 갑자기 제 배 속에서 나는 소리에 서흔이 화들짝 놀라 숨을 삼켰다.

생각해 보니 민협의 병문안 때문에 괜히 마음이 심란해 저녁을 건너뛰었다.

한 끼 정도 굶는다고 죽는 것도 아닌데 갑자기 밥을 달라 아우성치는 배에 서흔은 난감했다.

못 들었겠지?

서흔은 자신도 모르게 창문에 고정해 두었던 시선을 떼고 힐끗 건욱을 바라보았다. 그의 시선은 정면에 고정되어 있었고 별다른 표정의 변화도 없었다.

다행이라는 생각이 물감 번지듯 퍼져나갈 때 그런 그녀를 비웃듯이 다시 배가 요동쳤다.

꼬르륵. 꼬르륵.

“저녁, 안 먹었습니까.”

별채 주차장에 차를 세운 건욱이 물었다.

“그것까지는 몰랐나 봐요. 집안에서 일어난 일인데. 저에 관한 건 뭐든지 다 안다면서요.”

“여사님께 전화 넣어요. 간단한 요깃거리를 준비해 줄 겁니다.”

“아니, 괜찮아요.”

서흔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차에서 내렸다. 이렇게 늦은 시간에 용산댁을 다시 움직이게 만들고 싶지 않았다.

두 사람은 주차장에서 이어진 별채로 향하는 통로 계단을 한 칸씩 올라갔다.

“제가 알아서 할게요.”

“요리 할 줄 알아요?”

“아니요.”

그녀는 꽃을 다루는 손재주를 가진 것과 다르게 요리를 하는 손재주는 영 꽝이었다.

“그럼?”

집 안으로 들어온 건욱이 실내용 슬리퍼로 갈아 신으며 앞서 걸어가는 서흔을 무척 의심스러운 눈초리로 바라보았다.

“제 저녁은 제가 알아서 할게요. 신경 쓰지 마시고 2층으로 올라가시면 됩니다. 그럼.”

서흔은 팔을 높이 치켜들어 2층을 가리키며 마치 사교댄스 추듯이 고개를 숙여 인사를 했다.

건욱이 2층으로 올라간 것을 본 서흔은 방으로 들어갔다. 부끄러운 소리를 들킨 것 같아 얼굴이 달아올랐지만 신체 현상은 그녀도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서흔은 손을 씻고 편한 옷으로 갈아입었다. 당장 아우성치는 배를 잠잠히 만들어야 했다. 그녀는 조용히 문을 열고 나와 다이닝 룸으로 들어갔다.

우선 그것이 있을 것으로 추측되는 아래 선반부터 하나하나 열어보았다.

지금껏 용산댁이 알아서 아침, 점심, 저녁을 준비해 주었던 터라 이곳에 무엇이 있는지 알지 못했다. 그녀가 해 본 것이라곤 커피를 내리는 것뿐이었다.

“어디 있을 텐데…….”

상부장까지 하나하나 열어 보다가 찾는 것이 없자 서흔은 팬트리 문을 열고 안쪽으로 들어갔다.

“여기서 뭐 합니까.”

“아! 깜짝이야!”

언제 내려왔는지 갑자기 들린 건욱의 목소리에 깜짝 놀란 서흔은 뒤를 돌아보았다.

“!”

건욱이 바로 제 뒤에 서 있었다. 놀라 고개를 드니 그의 숨결이 볼을 간지럽혔다. 순간 머리가 핑 도는 것 같았다.

건욱이 너무 가까웠다.

서흔이 본능적으로 뒤로 물러서다 잘못 바닥을 디딘 다리가 휘청였다. 건욱이 재빠르게 그녀의 허리를 잡아당겼다.

그녀를 껴안은 건욱의 얼굴이 아까보다도 더욱 가까워졌다.

“…….”

“…….”

길어야 1초밖에 되지 않는 시간의 정적이 숨 막히듯 그녀를 에워쌌다.

건욱이 곁에 있는 것만으로도 공기의 밀도가 달라지는 것 같았다.

목이라도 졸린 것처럼 쥐어짜듯 그녀의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놔 줘요.”

건욱이 천천히 그녀의 등허리를 잡은 손에 힘을 주어 그녀의 몸을 위로 올려 세웠다.

“이제 제대로 서 있을 수 있겠어요?”

“네.”

몸을 일으킨 서흔의 심장이 빠르게 뛰었다.

‘당황해서 그래.’

갑자기 넘어질 뻔한 순간의 아찔함에 그리고 결국엔 타인의 도움으로 넘어지지 않은 것에 대한 당황함으로.

이렇게 두근거리는 것이라고.

서흔은 빠르게 뛰는 심장을 진정시켰다.

“찾는 게 뭡니까.”

“말하면 찾아줄 수 있어요?”

서흔은 뛰는 가슴을 가라앉히며 의심의 눈초리로 그를 바라보았다.

건욱이 집에서 식사를 하는 걸 본 적이 드물었다. 그 적은 식사 시간 말고는 다이닝 룸에는 잘 오지도 않는 그가 어디에 무엇이 있는지 알까?

오히려 그녀가 머무르는 시간이 더 길었던 것 같은데. 눈치도 서흔이 더 있는 것 같고. 그가 알 것 같진 않았다.

“내일 아침에 여사님이 보고 도둑고양이가 들어온 줄로 오해하는 것보다 나을 것 같은데.”

“도둑고양이라뇨, 아무리 그래도 내가 당신보다는 잘 알 것 같은데요.”

“찾는 게 뭐라고?”

건욱은 자신만만한 표정이었다. 절대 그럴 리 없다는 생각에 그녀는 오히려 찾아보라는 듯 입을 열었다.

“컵라면이요.”

“컵라면? 인스턴트식품 많이 먹으면 수명이 짧아져요.”

건욱이 눈썹을 치켜세우며 팬트리 안쪽, 서랍 하나를 열었다. 그 안의 깊숙한 곳에 얼핏 보면 보이지 않는 컵라면을 꺼냈다.

건욱이 꺼내 주지 않았더라면 그녀가 혼자 찾기엔 어려웠을, 몰래 숨겨 둔 것이 분명해 보이는 컵라면이었다.

“거기 컵라면이 있는 줄 어떻게 알았어요? 인스턴트식품 많이 먹으면 수명이 짧아진다는 고급 정보를 아시는 분이?”

“비밀입니다.”

수상한 눈초리로 서흔이 바라보자 건욱이 말해 줄 생각이 없는지 입을 다물었다.

“아무튼 놀랍네요. 이 집도 사람 사는 집이었네요. 컵라면이 다 있고.”

“없을 줄 알았어요?”

“네.”

“그런데 왜 찾았어요?”

“혹시 있을지도 모르고 없으면 아무거나 있는 거, 먹으려고요. 어쨌든 찾아줘서 고마워요.”

컵라면을 받아 든 서흔은 잠시 고민했다. 정수기 물보다는 팔팔 끓인 물을 넣고 싶었지만 물이 끓을 때까지 기다리기엔 너무 허기졌다.

게다가 물을 끓일 주전자는 또 어디 있을지 알 수 없었다. 그런데…….

“왜 컵라면이 2개예요?”

“사람이 2명이잖아요.”

“차건욱 씨도 저녁 안 먹었어요?”

건욱은 자연스러운 손길로 컵라면 비닐 포장을 제거하고 수프를 안에 넣은 뒤, 정수기에서 뜨거운 물을 받았다.

뚜껑을 다시 덮고 그 위에 젓가락으로 입구를 오므리는 일련의 행동에 서흔은 눈을 떼지 못했다.

“컵라면이랑 김치도 같이 먹을래요?”

“네.”

서흔의 당연한 대답에 건욱이 냉장고에서 김치를 꺼내 작은 접시 위에 덜어 아일랜드 테이블 위에 두었다.

“앉아요.”

건욱의 고갯짓에 서흔은 얼결에 아일랜드 테이블에 나란히 그와 함께 앉았다.

“한두 번 먹어 본 솜씨가 아니네요. 괜히 컵라면 숨겨 둔 곳을 아는 게 아니었어요. 그렇죠?”

어쩐지 2층으로 올라가라고 인사까지 했는데 따라 내려왔다 싶었다.

“3분 지났네.”

건욱은 시간을 흘깃 확인하더니 뚜껑을 아예 떼 버리곤 면발을 젓가락으로 휘휘 저었다. 강렬한 냄새에 서흔의 입 안에 저절로 침이 고였다.

“익었어요?”

서흔도 부리나케 뚜껑을 제거하고 면발이 웬만큼 익은 것을 확인했다.

“맛있겠다. 잘 먹겠습니다!”

서흔은 젓가락으로 면을 한 번 휘젓고 난 뒤 바로 탱탱한 면발을 한입 가득 넣었다.

아, 이 짜릿한 조미료의 맛!

이 집에 들어온 뒤로는 맛있고 건강한 음식 위주로 먹다 보니 이런 인스턴트의 맛은 무척 오랜만이었다.

서흔은 끝없이 혀끝에 녹아드는 면발을 후루룩 먹었다.

너무 먹는 데 집중해서였나. 긴 머리가 자꾸만 앞으로 쏟아지는데 오른손으로 젓가락을 들고 먹고 있고 왼손은 여전히 깁스를 한 채였다.

머리칼을 뒤로 넘기고 싶은데 먹으면서 동시에 어떻게 할 수가 없었다.

건욱에게 부탁할까 고개를 돌리는데 그때 귓가에 부드러운 손끝이 닿았다. 서흔이 일시에 동작을 멈췄다.

“!”

손을 뻗어 그녀의 머리칼을 귀 뒤로 넘겨 준 건욱이 태연히 손을 내렸다. 서흔이 고개를 돌려 그를 바라보았다.

“……지금 뭐한 거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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