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1화
중환자실에서 나온 서흔은 복도에 마련된 의자에 쓰러지듯 털썩 기대앉아 눈을 감았다. 기운이 확 빠진 느낌이었다.
“후…….”
속이 답답했다. 모르는 사람이 아프다는 이야기만 들어도 마음이 쓰이는 것이 사람이었다.
아무리 계약 약혼이라도 약혼자라는 사람이 사경을 헤매며 혼수상태에 있는 걸 눈으로 확인하니 마음이 좋지 않았다.
끝없이 바닥으로 가라앉는 기분에 서흔은 민협의 옆에 앉아 그동안 있었던 일들에 대해 간략히 이야기를 했다.
민협이 정말 그녀의 말을 들을 수 있을지, 없을지는 몰랐지만 짧은 면회 시간 동안 그녀가 유일하게 할 수 있는 일이었다.
좋은 의도였든, 그렇지 않았든 민협은 지란의 빚을 갚아 주었다. 하지만 그녀는 면회를 제외하고는 약혼녀로서 해 줄 수 있는 일이 아무것도 없었다.
“여기서 계속 이러고 앉아 있을 겁니까.”
갑자기 들리는 익숙한 음성에 서흔이 눈을 뜨자 건욱이 그녀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여기서 뭐 해요?”
서흔은 눈을 깜박였다.
“여긴 무슨 일이에요? 아직 퇴근 전 아닌가요?”
“퇴근했습니다. 보시다시피.”
“오늘은 일찍 퇴근하셨네요.”
“밤 9시가 이른 시간인가요.”
“항상 늦게 퇴근하잖아요. 일찍 나가고.”
그녀가 괜히 보안 업무를 한다고 오해한 게 아닐 정도로 건욱은 많은 시간을 회사에서 보냈다.
그와 부딪치는 시간은 같은 집에 산다고 생각하지 못할 만큼 적었고 서흔은 대부분의 시간을 혼자 보내고 있었다.
W호텔의 대표직과 W전자의 혁신 전략 기획 본부장을 겸임 중이라 더욱 바쁜 것 같았다.
“알고 있었습니까.”
건욱이 눈썹을 위로 치켜올렸다.
“당연한 거 아닌가요. 한 집에서 지내는데. 그게 그렇게 놀라운 일인가요?”
“전혀 관심 없는 줄 알아서.”
“하루 종일 그 큰 집에 혼자 있어 봐요. 없던 관심도 절로 생겨요. 아무튼, 병원엔 무슨 일이에요? 진료받으러 온 것 같진 않은데.”
“내가 아플 수도 있잖아요.”
덤덤히 이야기하는 건욱의 얼굴은 피로해 보였지만 별달리 아파 보이진 않았다.
“글쎄요. 찔러도 피도 눈물도 안 날 것 같은 사람이라 아플 거라는 상상이 안 가는데, 아프세요?”
“가족으로서 차민협 면회를 왔다는 생각은 안 들어요?”
“지금, 민협 씨 면회 온 거예요?”
놀란 서흔의 동그래진 눈동자를 보며 건욱이 고개를 끄덕였다.
“오늘 유일하게 작은아버지 내외분이 안 계신 날이라. 당신이 면회 간다고 했던 날이기도 하고.”
서흔이 그를 바라보았다.
“오늘 내가 병문안 오는 날인지 알고 있었네요.”
얼마 전 차 회장과의 저녁 식사가 두 사람이 마지막으로 대화를 나눈 시간이었다.
서흔은 오늘의 일정을 전달한 적도 없고 그가 제 일정을 신경 쓰고 있다고 생각지도 않았다.
“내가 당신에 대해 모르는 게 있을 것 같아요?”
“집에서 일어나는 일에 대해서는 차건욱 씨가 모르는 건 없다는 뜻이겠지만.”
“…….”
“남들이 잘못 들으면 무척 오해를 불러일으킬 수 있는 말이에요.”
서흔이 시선을 아래로 향했다. 그녀의 무릎 너머로 건욱의 구두가 보였다. 그 반질반질하게 관리가 잘된 구두는 건욱의 단면을 보는 것 같았다.
언제 어디서나 모든 것이 다 준비되어 있는, 충동적인 행동은 상상할 수 없고 생각 없이 내뱉는 말을 할 리가 없는 차건욱.
그런 당신이 하는 말은…… 단 한 마디도 쉽게 넘어가지가 않아. 단 한 마디도 쉽게 흘려 보낼 수가 없어.
“무슨 오해?”
서흔이 다시 고개를 들어 그의 눈빛을 바라보았다. 당신이 날 마음에 둔 것 같은 그런…… 오해.
눈길을 잡아끌던 조각 같은 외모와 심장을 뛰게 만들던 낮은 목소리, 단단하게 허리를 잡았던 손과 가끔 넋을 놓게 만들던 뜨거웠던 키스 같은 그런…… 오해들.
당신이 W호텔의 대표가 아니었더라면, 당신이 날 기만하지 않았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서흔은 상상에 불과한, 현실성 없는 가정을 마음속에서 지웠다.
어쨌든 지금 건욱과는 민협 때문에 연결되어 있는 것뿐,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었다.
“아니에요.”
그녀는 자리에서 일어나며 말했다.
“너무 늦었네요. 면회 시간은 이미 끝났어요.”
“아, 안타깝네.”
감정이라곤 전혀 느껴지지 않는 기계적인 반응이었다. 자연스러움이라곤 눈곱만큼도 없는 남자의 얼굴엔 뻔뻔함과 당당함만이 넘쳐흘렀다.
병문안을 왔다기에 그렇게 나쁜 관계는 아닌가 보다 생각했는데 이거야말로 오해였나 보다.
“저 먼저 갈게요. 주 대리님이 기다리고 있어서요. 차건욱 씨도 조심히 가세요.”
“주 대리는 퇴근하라고 했어요.”
서흔이 발걸음을 떼었지만 이어진 건욱의 말에 그녀의 눈빛이 의아해졌다.
“갑시다, 집에.”
건욱이 발걸음을 옮겼다. 서흔이 눈만 깜빡이며 있자 그가 다시 채근했다.
“안 갑니까.”
그는 병원에 왜 온 거지.
설마 날 데리러 온 걸까, 대체 왜.
의문이 꼬리를 잡고 이어졌지만 그녀는 그 답을 구하지 못한 채 자리에서 일어났다.
서흔은 건욱과 함께 엘리베이터로 향했다.
* * *
수민은 개인 비서이자 육촌 동생인 채영과 함께 병원을 찾았다. 마지막 연주회가 코앞인데 손목이 또 말썽이었다.
천재 피아니스트란 소리를 듣던 건 옛날이고 점점 떨어져 가는 실력과 연습 부재로 이제 더 이상 그녀의 연주를 찾는 사람은 없었다.
악평은 점점 늘어 갔고 버티는 데도 한계가 있었다. 결국 수민은 은퇴를 결심했다.
다행히 아버지의 도움으로 한국에서는 그녀의 실력이 여전히 부풀려 있었다.
결혼 이야기도 오가고 여러모로 적당한 프레임을 만들어 화려한 은퇴를 발표하기엔 적기였다.
이제 마지막을 장식할 연주회만 잘 치러 내면 되는데 손목이 말썽이었다. 그녀는 이 은퇴식을 아무런 잡음 없이 치러 내고 싶었다.
그래서 조용히 치료를 받고 VIP들만 지나다니는 통로로 돌아가는 중이었다.
“언니! 저기 차건욱 대표님 아니에요?”
채영이 엘리베이터로 향하는 건욱의 뒷모습을 언뜻 보고 급하게 수민의 귓가에 속삭였다.
“아니, 이제 차건욱 본부장님이라고 해야 하나요? 뭐라고 불러야 더 기분 좋아하실까요? 대표님? 본부장님?”
푼수처럼 계속 대표님과 본부장의 호칭을 번갈아 말하는 채영에 수민이 인상을 쓰며 건욱의 뒷모습을 찾았다.
“어디?”
“저기요.”
채영이 가리키는 곳을 보자 건욱과 한 여자가 엘리베이터를 기다리고 있었다.
“가서 인사할까요?”
“아니야. 됐어.”
수민은 완벽한 피아니스트로, 문제없이 정점에서 건욱 때문에 은퇴를 결심하는 여자이고 싶었다.
“그런데 저 여자는 누구야?”
멀찍이 떨어져 서 있지만 건욱과 일행으로 보이는 여자는 처음 보는 사람이었다.
그는 여자와 이야기를 나누며 웃고 있었다. 맞선 보던 날 그녀를 보며 짓던 무감했던 표정과는 다르게.
“어……. 낯이 익은데. 어디서 봤더라?”
채영이 기억을 더듬다가 휴대폰을 꺼냈다.
“기억났어요. 이야기 속 공주님이 저 여자 같아요! 차민협 상무님이랑 약혼했다는 그 여자요!”
“차민협 약혼녀?”
“여기요.”
수민은 채영이 내민 휴대폰 안의 사진을 보았다. 민협이 여자에게 반지를 주는 사진과, W호텔 로비에서 민협과 찍힌 여자의 사진이 보였다.
“저 여자 맞는 거 같죠?”
그녀는 사진 속 여자와 건욱 옆에 서 있는 여자의 얼굴을 자세히 살폈다.
“그때 난리 났었잖아요. 소문에는 차민협 상무가 W호텔 레스토랑에서 프러포즈했대요. 일부로 W호텔로 찾아갔다는 소문이 자자해요. 차건욱 대표님 자극하려고.”
채영이 호들갑을 떨며 수민의 귀에 속사포 랩처럼 말을 쏟아냈다.
“그런 두 사람이 로비에서 만났는데. 분위기 완전 살벌했대요. 그러고 나서 바로 호텔을 떠나다가 차민협 상무님 교통사고 나고. 그래서 사고의 범인이 차건욱 대표님이다, 아니다 말이 많은데.”
수위를 넘나드는 채영의 말에 수민이 날카로운 눈매로 째려보자 채영이 말을 멈췄다.
“죄송해요.”
“다른 건? 저 여자 어디 쪽 사람이야?”
정운그룹에 비할 바는 아니겠지만 욕심 많기로 유명한 민협이 아무 혼처나 골랐을 리가 없었다.
“그…… 그게. 평범한 집안이래요.”
“뭐?”
“정확한 소문은 아닌데요. 동네에서 조그만 꽃집 한다던데…….”
수민은 믿을 수가 없었다. 맞선 한번 잡아 보고자 열을 올리는 수많은 집안을 물리치고 약혼한 여자가 꽃집 하는 여자라고?
“그래서 W그룹에서 기사 막으면서 차민협 상무님 약혼에 대해서 쉬쉬한다고 말이 많아요. 그리고…….”
채영이 수민의 눈치를 보며 불안하게 양 손가락을 마주 톡톡 치며 말했다.
“저 여자 지금 차 회장님 댁에서 지낸다는 소문도 있어요. 그런데 대표님하고 같이 있는 거 보니 아무래도 맞는 것 같죠?”
수민은 입술을 비릿하게 올렸다.
“아무래도 그냥 지나칠 일이 아닌 것 같네. 저 여자에 대해 좀 알아봐. 알아낼 수 있는 건 모두 싹, 다.”
“네.”
채영은 불안한 눈동자를 굴리고 고개를 끄덕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