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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약혼녀가 아니야 (30)화 (30/74)

30화

서흔의 답은 필요치 않다는 듯이 차 회장은 묵묵히 식사를 이어갔다. 건욱도, 서흔도 더 이상의 말은 하지 않았다.

무엇을 먹는지도 모른 채 기계적으로 수저질을 이어가던 서흔은 차 회장이 자리에서 일어나고 나서야 수저를 내려놓았다.

그녀는 옆에 놓인 물을 마셨다. 체했는지 가슴이 갑갑했다. 어느새 다가온 용산댁이 소화제를 쓱 내밀었다.

“하나 먹어요.”

“감사합니다.”

서흔은 거절하지 않고 소화제를 마셨다. 소화제의 도움을 받지 않으면 단단히 더부룩한 속 때문에 잠을 못 잘 것 같았다.

“차건욱 씨는 안 먹어도 돼요?”

대화의 중심이 차 회장과 서흔이었다 해도 같은 자리에 앉아 있던 건욱도 속 편하진 않을 것 같았다.

“대표님은 안 필요하지 싶은데. 어째, 대표님도 하나 드려요?”

“됐습니다.”

건욱이 웃으며 말하자 용산댁은 더 권하지 않았다.

“과일 드릴까요?”

용산댁의 물음에 건욱이 서흔을 쳐다보자 서흔이 손사래를 쳤다. 지금도 더부룩한 속에 무언가를 더 넣을 수는 없었다.

“아니요, 전 괜찮습니다.”

“여사님, 잘 먹었습니다.”

건욱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서흔도 따라 일어나 잘 먹었다는 인사를 한 뒤 현관을 나섰다.

본채에서 별채로 이어진 길은 작은 공원 산책로처럼 디딤돌 양옆으로 나무들이 쭉 심어져 있었다.

지금은 겨울이라 황량한 가지만 남아 있지만 봄 여름을 지나는 동안은 무척 푸르게 우거질 터였다.

“근데 혹시 내 첫인상 좀 별로예요?”

“무슨 뜻입니까.”

건욱이 서흔의 뜬금없는 말에 미간을 구겼다. 

“지금 보니까 날 처음 보는 사람들한테 그다지 좋은 인상을 남기지 못하는 것 같아서요.”

“회장님 말하는 겁니까?”

“차건욱 씨도요. 기억나죠? 엄청 인상 쓰면서 번호 찍으라고 했던 거.”

건욱의 표정을 흉내 내는 서흔의 얼굴을 본 그가 낮게 웃었다.

얼마 전의 일인데도 갑작스러운 민협의 약혼과 교통사고 때문인지 무척 오래된 일처럼 느껴졌다.

“첫인상 때문은 아닐 겁니다.”

건욱이 아는 차 회장은 서흔처럼 자신 앞에서 기죽지 않고 할 말은 하는 사람을 좋아했다.

이 집사 역시 오랫동안 이 집에서 일을 할 수 있는 건, 그녀의 능력 덕분이기도 하지만 직언을 서슴지 않는 성격 때문이기도 했다.

첫 만남에서 서흔은 차 회장에게 사과를 요구할 만큼 담대한 모습을 보였다. 다른 건 몰라도 그녀의 성격만큼은 차 회장도 마음에 들었을 것이다.

성격을 보는 건, 차 회장이 부릴 사람에 한한 것이고 집안으로 들일 사람의 제1의 조건은 그들과 동등한 집안이었다.

차 회장이 기대했던 조건과 완전히 어긋난 서흔은 건욱의 어머니를 떠올리게 만드는 데 충분했을 것이다.

가진 거라곤 잘난 얼굴과 몸밖에 없었던 우리 어머니. 그 외모로 아버지를 홀려 그의 인생을 박살 냈다던 우리 어머니.

그런 어머니에게 단단히 홀린 것으로도 모자라 먼저 떠나 버린 아버지도 떠올랐을 것이고 그것이 차 회장을 그토록 분노케 했을 것이다.

그 때문에 차 회장이 서흔에게 민협을 떠날 것을 요구하는 건 그의 입장에선 당연한 일이었다.

“알아요. 그래서 속상하네요. 사람을 무슨 등급 나누듯이 이렇게 평가한다는 게 이상하기도 하고, 억울하기도 하고.”

팔 깁스 때문에 반만 걸쳐 입은 카디건은 보온 목적을 상실한 것처럼 느껴졌다. 스산하게 스치는 찬바람이 뼛속까지 들어왔다. 서흔은 으스스한 몸을 잔뜩 움츠렸다.

“신경 쓸 필요 없습니다.”

상념을 떨쳐 내며 건욱이 한 걸음 내디뎠다.

“어떻게 신경을 안 써요?”

“신경을 쓰면 뭐가 달라질 것 같습니까.”

“그건 또 그러네요.”

보통 고집이 센 노인 같지 않았다. 스스로 뱉은 말은 지켜야 하는 것을 기본으로 생각하는 노인이 손바닥 뒤집듯 마음을 바꿀 것 같지도 않았다.

어차피 민협의 진짜 약혼녀도 아닌데 차 회장의 눈에 들기 위해 노력하고 싶은 마음도 없었다.

“그럼 신경 꺼요. 앞으론 회장님 만날 일도 많지 않을 테니.”

건욱의 말투는 단호했다. 그의 말이 맞을지도 몰랐다. 쉽게 변하지 않을 상황에 신경을 쓰는 것만큼 에너지 낭비는 없었다.

게다가 좋게 생각해 보자면 민협이 의식을 되찾기만 하면 6개월이 채 지나지 않더라도 약혼은 강제로 종료될 수도 있었다.

“참, 저 내일은 민협 씨 병문안 갈 거예요.”

처음엔 단순히 민협의 약혼녀 역할에 최선을 다하기 위해서 떠올린 면회였다.

하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걱정되었다. 어쨌든 같이 사고를 당한 사람인데 그가 괜찮은지 눈으로 직접 확인하고 싶었다.

“주 대리에게 면회 시간을 확인해 달라 부탁했는데 차건욱 씨한테 확인해 본다고 하고 지금껏 말씀이 없으시네요.”

“병문안은 안 가도 됩니다. 차민협 말고 당신 팔이나 신경 쓰는 게 어때요.”

건욱은 내내 깁스를 벗지 못하는 서흔의 팔을 힐끗 쳐다보았다.

“내 팔보다 민협 씨 안위가 더 중요해요. 사고가 난 뒤로 한 번도 민협 씨 얼굴을 못 봤어요. 너무한 거 아닌가요?”

한껏 슬픈 얼굴을 지어낸 서흔에 건욱의 표정이 싸늘해졌다.

“중환자실 면회 시간은 정해져 있습니다. 그 시간에는 항상 작은아버지와 작은어머니가 가시고요. 짧은 면회 시간은 민협의 부모님께 양보하는 것이 낫지 않나.”

차 회장부터 워낙 손이 귀한 집안이라서 인지 건욱도 외동이었고, 민협도 외동이었다.

교통사고가 난 뒤 혜림은 병원에서 살다시피 했고, 아버지인 주형 또한 자주 병원에 방문했다. 괜히 서흔과 부딪치게 만들 필요는 없었다.

“그래도 가 보고 싶어요. 면회 시간 아니라도 잠깐 얼굴이라도 보고 오는 건 상관없잖아요.”

간절한 서흔의 마음이 통했을까. 건욱이 입을 열었다.

“면회 시간이 아니면 중환자실에 들어갈 방법은 없습니다.”

“아…… 그래요.”

“딱 한 번, 면회가 가능한 날짜를 알아보는 걸로 하죠.”

서흔이 눈에 띄게 안도하는 모습을 보였다.

“단, 지켜야 할 것들이 몇 가지 있습니다.”

건욱은 기본적으로 주 대리의 의견에 따라 움직여야 한다는 것을 알려 주었다.

건욱과 동반하지 않았을 경우에는 어떤 언론과도 접촉이 불가능했고 독단적인 행동은 허용되지 않았다.

현재 민협의 약혼녀로서 위치는 쉽지 않았다. 고려해야 할 사항도 많았고 특히 행동이나 언변에 조심해야 했다.

그래야만 민협을 비롯한 그 누구에게도 피해가 가지 않았다.

“지킬 수 있습니까.”

“물론이에요.”

서흔의 확답에 건욱이 고개를 끄덕였다. 서흔의 시선이 그에게 닿았다.

“건욱 씨.”

“…….”

“고마워요.”

“차민협을 볼 수 있어서? 아니면 나한테.”

건욱이 잠시 그녀의 진심을 엿보려는 듯 고개를 기울였다.

“당연히…….”

“전자겠지.”

이미 서흔의 마음은 정해져 있다는 듯이 자조하며 그가 시선을 거두었다. 그는 성큼성큼 별채로 들어갔다.

“…….”

전할 수 없는 말을 삼키며 서흔도 그의 뒤를 따랐다.

* * *

며칠 후, 서흔은 주 대리와 함께 병원을 찾았다. 병원 앞에는 몇몇 기자들로 보이는 사람들이 맴돌았다.

서흔은 살짝 긴장했지만 주 대리의 안내로 VIP들이 다닐 수 있는 통로를 통하여 병원으로 들어갈 수 있었다. 다행히 기자들을 마주치는 불상사는 없었다.

머리부터 발끝까지 소독을 한 차례 한 뒤, 멸균 가운을 입고 들어간 중환자실에서 마주한 민협의 얼굴에 서흔은 입술을 세게 깨물었다.

자신이 알던 차민협 같지가 않았다. 눈을 감고 있는데도 눈매가 퀭했고 얼굴은 잔뜩 거칠었다. 볼은 홀쭉했고 혈색이 좋지 않았다. 전보다 여위었고 활기찬 생명의 기운은 느껴지지 않았다.

서흔이 상상했던 것보다도 민협의 상태는 나빠 보였다. 그녀는 이유를 알 수 없는 죄책감을 느꼈다.

같은 차를 타고 있었음에도 그녀는 팔을 다친 거 외에 커다란 부상은 없었다.

원치는 않았지만 좋은 곳에서, 좋은 음식을 먹으며 쉬고 있었다. 물론 이런 생활 자체가 감사하기만 하고 행복하다고 볼 수는 없었다.

그녀를 향한 차 회장의 적대감과 건욱의 오해는 화가 났고 불편했지만, 상상조차 할 수 없는 고통 속에 누워 있는 민협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었다.

‘제발 깨어나게 해 주세요.’

서흔은 민협이 건강해지기를 간절히 기도했다. 하느님이든, 부처님이든, 알라신이든 그 누구라도 그녀의 간청을 들어주기를 바랐다.

민협이 일어나는 순간, 그녀의 인생이 또다시 어떻게 소용돌이칠지 모르겠지만 그래도 이렇게 그가 누워있는 것보다는 더 낫지 않을까.

‘차민협 씨, 빨리 일어나요.’

서흔은 두 손을 꼭 붙잡고 기도하고, 또 기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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