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9화
편안해 보이는 통이 넓은 바지와 스웨터를 입은 서흔은 책을 읽다가 잠든 건지 두꺼운 책을 가슴 위에 올려 둔 채였다.
평소 볼 수 없었던 모습에 건욱이 가까이 다가갔다. 눈을 감고 있는 여자는 편안해 보였다.
처음 그의 품에 떨어졌을 때 보았던 긴장감이나, 병원에서 보았던 불편함, 이 집으로 데리고 왔을 때 보았던 불안함이 느껴지지 않았다.
새로운 모습이었다. 눈이 감겨 있으니 속눈썹이 더욱 길어 보였다. 표정이 다양해 이야기할 때마다 찡긋대던 미간과 코끝도 지금은 반듯했다. 자주 깨무는 습관 때문인지 유난히 붉은 입술은 다물고 있는 지금도 붉었다.
작게 내쉬는 고른 숨소리도 마음에 들었다. 건욱이 더욱 가까이 다가갈 때였다.
“으음.”
기대 누운 의자가 불편했는지 서흔이 몸을 뒤척거렸다. 그 바람에 책 위에 올려 있던 손이 아래로 밀리더니 바닥으로 툭 떨어졌다. 다행히 깁스한 팔은 아니었다.
동시에 무게를 이기지 못한 책이 바닥으로 떨어지려 했다. 건욱은 책이 바닥으로 떨어지기 직전 손을 뻗어 책을 잡았다.
그 충격에 놀라 서흔이 눈을 떴다. 숨결이 닿을 만큼 가까운 거리에 건욱의 얼굴이 보였다.
왜 이 남자가 여기에.
몽롱한 기분이 들어 서흔이 느리게 눈을 깜박였다. 흐릿하던 시선이 또렷해지며 그의 얼굴이 더욱 선명해졌다.
비스듬히 고개를 기울인 건욱이 조금씩 시선을 떨어뜨리며 가까워지는 것 같았다.
알 수 없는 전율이 몸을 울렸다.
서흔이 질끈 눈을 감자 그의 낮은 목소리가 몸을 타고 넘어온다.
“원래 이렇게 태평한 스타일이었나.”
번쩍. 서흔이 눈을 다시 활짝 뜨며 몸을 일으켰다. 건욱은 그녀에게 책을 건네준 뒤 이미 멀어진 후였다.
“아무 데서나 잠이 들고.”
오후에 이야기를 했을 때만 해도 서흔은 이 집에서 지내야 하는 것에 대해 무척 반감이 많아 보였다.
그런데 지금 이렇게 편하게 잠든 모습을 보니 크게 걱정은 하지 않아도 될 것 같았다.
“책을 봐서 잠이 오는 거라면 책을 방으로 가져가요. 아무 데나 누워 있지 말고.”
“지금 핀잔주는 거예요?”
서흔이 코끝을 찡그렸다. 어쩌다 보니 깜빡 잠든 것 가지고 기회를 놓치지 않는 건욱이 아주 얄미웠다.
“눈치챘습니까.”
“이봐요, 차건욱 씨.”
“회장님과의 식사는 본채에서 합니다. 시간이 얼마 안 남았는데 준비 다 한 겁니까.”
“네.”
건욱이 말한 준비가 마음의 준비라는 것을 서흔은 알았다.
차 회장과의 식사 자리가 부담스럽지 않은 건 아니었지만 웬만하면 부담감을 많이 내려놓으려 노력하고 있는 중이었다.
걱정한다고 해서 변하는 건 없으니까.
“그럼 이따 봅시다.”
건욱이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어요.”
서흔이 먼저 서재를 나갔다. 건욱은 그녀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제 방으로 들어갔다.
* * *
커다란 식탁에 앉아 있자니 내내 모른 척했던 긴장감이 스멀스멀 그녀의 등줄기를 타고 올라왔다.
이번엔 맛깔스럽게 차려진 음식들도 전혀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그저 어려운 자리에서 체하지 않고 식사를 끝낼 수 있기를 바랄 뿐이었다.
“회장님 오십니다.”
이 집사의 말에 건욱과 서흔이 동시에 자리에서 일어났다.
차일도 회장은 뉴스 속 자료 화면이나 사진에서 보았던 모습보다도 조금 더 늙어 보였다.
하지만 눈빛이 살아 있는 눈매나 강건해 보이는 입매는 상대를 저절로 긴장시키게 만들었다.
“유서흔입니다. 처음 인사드립니다.”
꾸벅 고개를 숙이며 인사를 하자 차 회장이 손짓을 하며 자리에 앉았다.
“앉으라. 식사 먼저 하자.”
건욱과 서흔은 자리에 앉았다.
“이 집사와 용산댁이 건욱이, 니 왔다고 바쁘게 움직였데이.”
차 회장이 잘 차려진 음식을 보더니 한 마디 툭 던졌다.
그는 건욱이 집에 들어온 것에 흡족한 것 같았다. 하지만 건욱은 달랐다.
“어차피 길게 있지 않을 겁니다. 크게 마음 쓰시지 말라 전하겠습니다.”
“자신 있다, 이 말이가.”
차 회장의 날카롭게 벼려진 시선이 건욱에게 꽂혔다. 절로 움츠러들 것 같은 눈빛에 서흔은 마음이 조마조마했다.
“그러려고 여기에 부르신 거 아닙니까.”
건욱은 여상히 대답했다. 이 정도의 긴장감은 익숙한 것처럼 태연히 밥 한 수저를 떠 입에 넣는 모습이 보통 담대한 스타일이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오래는 못 기다린다.”
“오래 기다리실 일 아닙니다.”
“내 지켜보마.”
용과 호랑이의 싸움을 보는 듯 심장이 쫄깃한 서흔은 접시에 코를 박을 듯 먹는 데 집중했지만, 그 시간은 오래가지 않았다.
“민협이 약혼녀라고.”
“네.”
급하게 냅킨으로 입을 닦고 서흔이 말했다.
“맹랑하다. 어른에게 말 한 마디 없이 약혼을 했다, 이 말이재?”
“죄송합니다…….”
민협의 부모에게 인사를 드리러 가던 길에 사고가 났다. 차 회장에게 인사드린다는 말은 민협에게 듣지 못했다.
계약이고, 가짜 약혼이었다. 아마 민협도 차 회장에까지 인사드릴 생각은 없었을 것이다.
서흔도 이렇게 커질 일이었다면 계약서에 도장을 찍지 않을 테고.
“민협은 그냥 차민협이 아니다. W그룹의 차민협이다. 알고 있나?”
차 회장은 철저한 실리주의자였다. 그에겐 결혼도 비즈니스의 일환이었고 그룹에 어떠한 이득도 없는 결혼은 용납할 수 없었다.
지금껏 민협의 결혼에 대해 차 회장이 왈가불가하지 않았던 것은 욕심 많은 주형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굳이 차 회장이 나서지 않아도 주형 내외라면, 민협이라면 알아서 번듯한 집안의 여자와의 혼사를 추진할 터였으니 굳이 신경 쓸 필요가 없었다.
“그런 민협이랑 꽃집이나 운영하는 자네가 결혼할 수 있을 기라 생각하는 기가.”
그렇게 믿었던 민협이 데리고 온 여자가 평범하기는커녕 한참이나 밑지는 여자라는 사실에 차 회장은 배신감이 들었다.
서흔의 존재는 차 회장을 평생 괴롭히는 큰아들의 악몽을 더욱 생생하게 살아나도록 만들었다.
다시는 건욱의 어미 같은 사람을 집안에 들이는 것은 절대 용납할 수 없었다.
“그리 생각했던 기가!”
중간중간 힘이 실려 꺾이는 어조에 고스란히 못마땅함이 드러났다. 잔뜩 찡그린 눈매가 서흔에게 향했다.
살갗에 닿을 듯 느껴지는 차 회장의 적대감에 서흔은 심장이 오그라들었다.
“그렇다면 왜 절 이곳으로 부르신 건가요?”
“정말 모르는 기가, 모른 척하는 기가.”
“…….”
건욱이 말처럼 그녀를 교통사고의 유력한 용의자로 생각하는 걸까.
그래도 그건…… 가능성의 한 조각이 아니었던 건가. 차 회장을 비롯한 다른 사람들까지 그녀를 그렇게 보고 있는 건가.
모멸감이 똬리를 틀고 그녀의 몸 구석구석을 조이기 시작했다.
“회장님도 제가 교통사고와 연관이 있다고 생각하시는 건가요?”
“가능성은 언제나, 누구에게나 존재하는 기라.”
차 회장은 대답하며 혀를 끌끌 찼다. 시선은 그녀를 향하지도 않은 채였다. 그는 서흔을 철저히 무시하고 있었다.
“회장님, 전 교통사고와 아무런 관련이 없습니다.”
무자비하게 쏟아졌던, 그녀를 향한 말도 안 되는 비난을 잠자코 듣고만 있던 서흔이 차 회장을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민협과 약혼이 아무리 계약이라고 해도 이런 멸시와 오해를 받을 이유도 없었다.
“그러니까 사과해 주세요. 제가 그 사고와 관련이 없다는 게 밝혀지면 저를 오해했던 것에 대해 사과를 해 주세요.”
“뭐라? 이런 당돌한 아를 봤나.”
차 회장의 눈동자에 불꽃이 튀었다. 서흔은 담담히 그의 눈빛을 곧게 받았다.
잠시 동안 침묵이 내려앉았다. 매서운 눈빛을 빛내던 차 회장이 입을 열었다.
“니가 주장하는 것처럼 교통사고의 범인이 니가 아닐 수 있다. 그래, 그게 밝혀지면 오해에 대해 내 사과 하마.”
차 회장이 약조를 하자 서흔이 감사하다고 꾸벅 고개를 숙였다.
“하나를 받았으면 니도 하나를 내 줘야지.”
머리 위로 서늘하게 떨어지는 목소리에 서흔이 고개를 들었다.
“사고 정리될 때까지 조용히 있는 기다. 그리고 그때가 되면 니는 더 이상 민협의 약혼녀가 아닌기다. 알겠나.”
감히 우리 집안에는 어울리지 않는 것.
말하지 않아도 차 회장의 시선에 담긴 그녀를 향한 감정은 명확했다.
“내 정리는 섭섭지 않게 해주마.”
서흔은 입술을 콱 깨물었다. 그들이 원하지 않아도 그녀는 사라질 생각이었다.
차민협이 깨어나기만 하면. 그녀가 먼저 이 더러운 세계에서 사라져 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