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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약혼녀가 아니야 (28)화 (28/74)

28화

아, 주 대리님.

“음, 저 갈아입을 옷이 어디 있는지 좀 알려주시겠어요?”

“이쪽으로 오십시오.”

서흔은 주 대리를 따라 1층 복도로 들어갔다. 별채에 들어설 때까지만 해도 이렇게 넓은지 몰랐는데 규모가 상당했다.

길게 이어진 복도를 지나 들어가자 화장실과 게스트 룸, 드레스 룸이 나왔다.

제 작은 원룸보다 몇 배는 커 보이는 드레스 룸 가운데에는 커다란 거울이 있었다.

거울을 중심으로 한편에는 원피스 및 정장 등 외출복들이 걸려 있었고 맞은편에는 홈웨어로 입기엔 너무나 고급스러운 옷들이 걸려 있었다.

그 아래에는 가방과 구두, 헤어 액세서리 등이 전시되어 있었는데 드레스 룸 자체가 하나의 편집숍처럼 없는 게 없었다.

“이게 다…… 내가 입어도 되는 옷이에요?”

슬쩍 보아도 모두 새 옷 같았다. 어떻게 안 것인지 다 제 사이즈에 맞춘 옷들이었다.

“네, 편히 입으시면 됩니다. 속옷은 서랍 안에 있습니다.”

“속옷까지 있어요?”

당황한 서흔의 얼굴이 발갛게 물들었다. 아니, 이 남자는 제 속옷 사이즈는 어떻게 알아서 이렇게까지 철저한 준비를 했나 싶었다.

“이 안쪽으로 들어가시면 욕실과 연결되어 있습니다. 점심 식사는 30분 후에 준비됩니다. 쉬시다가 그때 다이닝 룸으로 오시면 됩니다.”

깍듯이 인사를 하고 주 대리가 물러났다.

서흔은 홈웨어 중에서 가장 무난한 스타일의 바지와 스웨터, 갈아입을 속옷을 꺼내 들고 욕실로 향했다.

드레스 룸과 욕실 사이에는 메이크업 룸이 있었다. 그곳엔 그녀가 사용하기에 차고 넘치는 화장품들이 정리되어 있었다.

서흔은 눈앞에 보이는 커다란 월풀 욕조 안에 몸을 담그고 싶은 욕망을 꾹 누르고 간단히 샤워를 했다.

오전 내내 건욱과 함께하느라 긴장했던 몸과 마음이 조금씩 누그러졌다.

생각이 많았다. 민협은 차 회장의 이야기는 하지 않았다. 우선은 부모님께 인사 먼저 드리자는 것이 계약의 전부였다.

어떻게 행동해야 할지 감이 잡히지 않았다. 다만 차 회장의 눈 밖에 나지 않게 조심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직 아무도 그들의 계약을 몰랐다. 지금도 교통사고에 대해 의심받는 상황인데 계약 약혼까지 알려지면 곤란해지는 건 그녀가 될 것이다.

아무도 눈치채지 못하게 완벽하게 약혼녀 행세를 하는 게 서흔이 걸을 수 있는 유일한 길일 것 같았다.

서흔은 다경에게 연락해 당분간 일을 쉬어야 한다는 소식을 전했다.

다경은 W그룹의 갑질이라고 열을 내면서도 보호를 받는 게 나쁘지 않을 것 같다는 의견도 조심스레 전했다.

서흔은 민협 덕분에 편히 지내고 있으니 걱정 말라고 다경을 안심시켰다.

다경을 속이고 싶지 않지만 계속 그럴 수밖에 없는 상황에 깊은 한숨이 흘러나왔다.

똑똑.

주 대리가 밖에서 식사가 준비되었다는 말을 전했다. 서흔은 짧은 죄책감을 꾹 눌러 담고 다이닝 룸으로 향했다.

통창이 한 면을 차지하는 거실을 지나 안쪽으로 들어가니 다이닝 룸에 정갈한 한식이 한 상 차려져 있었다.

“아직 어떤 걸 좋아하시는지 몰라 한식으로 차렸어요. 어서 드세요.”

자신을 용산댁이라고 소개한 50대 아주머니가 살갑게 그녀에게 말을 걸었다.

“음식은 가리지 않고 잘 먹어요. 너무 맛있어 보여요. 감사합니다.”

“맛있게 드세요. 전 건너가 있을 테니, 드시고 두시면 돼요.”

“네, 감사합니다.”

서흔이 꾸벅 고개를 숙여 인사하자 용산댁이 화통한 미소를 지으며 별채를 나갔다.

“주 대리님은 식사 안 하세요?”

달랑 수저가 한 벌 뿐이라 자리에 앉으면서도 서흔은 주 대리에게 시선을 향했다.

“저는 먹었습니다.”

“네…….”

“그럼 식사하십시오.”

주 대리가 인사 후 거실로 나갔다. 그녀는 커피 테이블에 앉아 태블릿PC를 켰다.

혼자 식사를 해야 한다는 불편했던 생각도 주 대리가 식사 시간에 별도로 할 일을 하는 걸 보니 조금 사라졌다.

먹음직스러운 음식이 눈앞에서 맛있는 냄새를 폴폴 풍기니 굶주린 배가 요동쳤다.

서흔은 윤기가 흐르는 밥 한 숟가락에 맑은 콩나물국을 먹었다.

대체 어떤 마법의 재료를 쓴 것인지 혀가 마비될 정도로 맛이 기가 막혔다.

배가 부를 만큼 충분히 식사를 마친 서흔이 자리에서 일어나자 주 대리가 고개를 들었다. 그녀는 본채와 연결된 인터폰을 들어 상을 치워 달라는 이야기를 전달했다.

“커피 머신이 있는데 원두는 어디 있을까요?”

“제가 내려 드리겠습니다.”

주 대리가 익숙하게 커피 머신을 켜고 원두를 찾았다. 서흔은 작동 방법과 원두의 위치 등등을 빼곡히 눈에 담으며 입을 열었다.

“주 대리님, 정확히 주 대리님의 업무가 어떤 것인지 여쭤봐도 되나요?”

“대표님이 말씀하셨듯이 유서흔 씨의 보호 역할입니다. 유서흔 씨가 움직이실 때마다 동행할 겁니다. 이곳에서 지내시면서 도움이 필요할 땐 언제나 저에게 말씀하시면 됩니다.”

주 대리의 설명을 들어 보면 경호의 역할 뿐 아니라 전담 비서 같은 역할도 곁들이는 것 같았다.

어쩌면 그건 건욱의 배려일지도 모르겠지만 그것마저도 사람을 부리는 데 익숙한 건욱의 시선이었다.

“네. 알겠어요. 내일 민협 씨 면회를 가고 싶은데 면회 시간이 몇 시인지 좀 알아봐 주실 수 있을까요?”

약혼녀로서 그녀가 제일 처음으로 해야 할 일은 민협의 면회였다.

열렬히 사랑하여 평범한 그녀와 약혼을 감행한 민협을 생각했을 때 꼭 해야 할 일이었다.

병원에서는 엘리베이터를 타고 몇 층만 오르면 민협의 병실에 갈 수 있었지만, 간병인은 그녀를 병실에서 나가지 못하도록 막았다. 병실 밖에는 경호원도 배치되어 있었다.

결국 입원했을 동안 서흔은 단 한 번도 민협을 보러 가 보지 못했다.

이제는 퇴원을 했으니 민협을 찾아가 봐도 되지 않을까 싶었다.

“음. 면회는 대표님께 말씀드려 보도록 하겠습니다.”

“차건욱 씨가 안 된다고 하면 면회 못 가는 건가요?”

“…….”

무응답은 결국 서흔의 말이 맞는다는 뜻이었다. 면회도 건욱의 허락이 있어야만 갈 수 있다니. 서흔은 눈살을 찌푸렸다.

결국 이 집에서 지내는 한, 그녀가 할 수 있는 것이라곤 모두 그의 통제 아래 허락을 받아야만 가능한 것들이었다.

민협의 약혼녀로 지내는 동안은 어쩔 수 없이 받아들여야 한다는 것을 알면서도 이 잠깐의 시간이 그녀의 숨을 조여 오는 것처럼 느껴졌다.

“차 회장님과 저녁 식사는 몇 시인가요?”

“7시입니다.”

“그동안 난 뭘 하죠?”

“지하로 내려가시면 피트니스 룸과 영화를 감상할 수 있는 홈 시어터, 게임 존이 있고 2층으로 올라가시면 미니바와 서재가 있습니다. 대표님의 공간을 침범하지 않는 선에서 자유롭게 이용하셔도 됩니다.”

이런 상황이 아니었다면 여유 넘치고 행복한 생활이었겠지만 이런 것들은 그녀가 원하는 것이 아니었다.

그저 답답하기만 했다.

“그럼, 쉬십시오.”

조용히 혼자 생각하던 서흔을 바라보던 주 대리가 다시 거실 소파에 앉았다.

할 일 없이 제 방으로 돌아온 서흔은 테이블에 앉아 커피를 마셨다.

이렇게 아무것도 하는 일 없이 조용히 흘러가는 시간은 병원에서 겪은 걸로 충분했다.

답답함을 참다못한 그녀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방 안의 가구 모두를 하나하나를 확인했다. 서랍을 열어 보고 안을 살펴보며 시간이 지나가길 바랐지만 누군가 그녀의 시간만 붙잡아 둔 것처럼 시간은 좀처럼 흐르지 않았다. 시간이 고여 있는 기분이었다.

방에서 나온 서흔은 무작정 지하로 내려가 집을 둘러보았다. 정말 피트니스 룸과 홈 시어터, 게임 존이 갖춰져 있었다.

서흔은 엘리베이터를 타고 2층으로 향했다.

“서재에 가 볼까.”

건욱의 공간이 있다는 생각에 살짝 망설이긴 했지만 그의 공간에 발 들일 생각은 없었다.

엘리베이터 문이 열리고 2층 공간이 눈에 들어왔다. 2층에도 커다란 거실이 자리 잡고 있었다. 안쪽으로 미니바도 보였다.

가장 중앙에 위치한 굳게 닫힌 문 안쪽이 건욱의 공간 같았고 나머지 방들은 문이 열려 있었다.

한 걸음 더 가까이 다가가 보니 열린 문 사이로 책장에 빼곡히 꽂혀 있는 책이 보였다.

“우와.”

절로 감탄이 흘러나올 만큼 책이 많았다. 그녀의 키보다도 훨씬 더 높은 책장은 사다리가 없이는 꺼낼 수도 없는 곳도 있었다.

서흔은 웬만한 작은 도서관보다 많은 장서를 쓱 둘러보다가 문득 낯익은 제목의 책을 꺼냈다.

그녀가 처음 꽃에 대해 공부할 때 보았던 식물도감이었다.

“이런 책도 보나?”

의외라는 생각에 책장을 넘기던 그는 중간중간 메모가 적힌 글귀를 보며 멈칫했다.

오래전에 쓴 것 같은 메모에 서흔은 본격적으로 자리를 잡고 앉아 읽기 시작했다.

* * *

건욱은 평소답지 않게 차 회장과의 저녁 식사 때문에 일찍 퇴근을 했다. 그가 돌아오자 주 대리는 퇴근하고 숙소 동으로 건너갔다.

어색한 집에 들어오자 낯선 공기가 그를 맞이했다. 그리고 그 어디에도 서흔의 기척이 느껴지지 않았다.

건욱은 닫힌 여자의 방을 힐끗 바라본 뒤 넥타이를 느슨하게 길게 늘어뜨리며 계단을 올라갔다.

빨리 샤워라도 할 생각이었던 건욱은 서재의 열린 문 사이로 잠든 서흔을 발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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