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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약혼녀가 아니야 (27)화 (27/74)

27화

“더 할 말 있습니까.”

“…….”

서흔이 입술을 깨물자 그의 시선이 발갛게 부풀어 오른 입술로 향했다.

그의 눈빛이 진하게 물들었다.

서흔은 자신도 모르게 깨물었던 입술을 놓았다. 알 수 없는 쿵쾅거림이 속을 둥둥 울렸다. 그의 눈동자가 느리게 올라와 그녀와 시선을 맞췄다.

“…….”

“…….”

잠시 침묵이 두 사람을 감쌌다.

건욱이 그녀에게서 몸을 돌렸다. 갑자기 발걸음을 떼는 그의 뒷모습에 서흔이 움찔하며 한 발짝 떼었다가 멈칫했다.

“어디 가요?”

“잠시 시간 내서 나온 겁니다.”

뜨거운 눈빛과 다르게 무감하게 말하는 건욱에 서흔도 담담하게 말했다.

“아, 당분간 일은 쉬는 걸로 하죠.”

건욱이 당부를 잊었다는 듯 말을 덧붙었다.

“이미 충분히 쉬었어요. 제 일은 제가 판단해요. 당신이 참견할 일 아니에요.”

“그 손으로?”

건욱의 말에 서흔은 마음이 상했다. 그녀는 팔을 다쳤다고 쉴 수 있는 처지가 아니었다.

언제까지 매장을 다경에게만 맡겨둘 수도 없고 외주 일도 마찬가지였다.

지금까지 외주팀이 잘해 주고 있지만 그녀의 이름을 걸고 한 계약에 더 이상 피해를 끼칠 수는 없었다.

“왜, 이것도 거북스럽나.”

“네. 잘 아시네요.”

“유서흔 씨는 현재 민협의 약혼녀입니다. 교통사고를 일으킨 유력 용의자이기도 하죠.”

“난 사고를 내지 않았다고 말했잖……!”

서흔의 말을 저지하며 건욱이 손을 들었다.

“아직 언론이 잠잠해지지 않았으니 W그룹의 보호 아래 지내야 한다고 설명했던 것 같은데. 당신도 동의하에 이 집으로 들어왔고. 아닙니까.”

“지금껏 언론 막아 주고 있었다면서요. 계속 막아 주면 되잖아요. 이렇게 일도 못 하게 할 줄 알았으면 나도 여기 오지도 않았어요.”

서흔이 바르르 떨었다.

이 남자 처음부터 거만하고 도도한 줄은 알았지만 이렇게 제멋대로인 사람인 줄은 몰랐다.

아무리 보호라는 명목을 뒤집어쓴 감시라지만 일까지 못 하게 하다니, 이건 도를 넘어도 한참 넘어섰다.

“차민협이 누군지 몰랐나.”

알았다. 당연히 알았……지만. 서흔은 입술을 깨물었다.

민협의 경제적 위치와 뻔뻔한 성격, 그 모든 걸 알고 계약 약혼에 도장을 찍었다.

그렇다고 그녀의 일과 사생활까지 하나하나 간섭받을 거라 생각하지는 못했다. 민협이 계약서에 명시했던 내용에도 일에 관한 이야기는 없었다.

“이 정도 각오도 없이 W어패럴의 차민협과 약혼을 하진 않았을 텐데.”

거침없이 쏟아 내는 서흔의 말을 조용히 가르는 묵직한 목소리에 그녀는 단번에 할 말을 잃었다.

“그래도 난 일을 해야 해요.”

“우선 팔이 다 나으면 이야기합시다. 호텔 계약 건은 내가 처리해 두죠. 회장님께도 말씀드려 보겠습니다.”

“회장님이라요? W그룹 차일도 회장 말씀하시는 건가요? 왜, 그분이?”

“이 집이 차일도 회장의 집이니까.”

“네? 이곳이 차일도 회장님 댁이라고요?”

“같은 말을 두 번 반복하게 하는 악취미가 있나.”

태연히 대답하는 건욱에, 서흔은 입을 다물지 못했다.

이곳이 차 회장의 집이라니.

어째 점점 일이 커지는 것 같아 앞이 캄캄했다. 약혼과 사고, 동거까지. 원하지 않은 일들이 순식간에 일어나고 있었다.

“이 집은 당신 집이라고 했잖아요.”

서흔의 목소리가 떨렸다. 건욱의 집이라고 생각했을 때와 차일도 회장의 집이라고 했을 때 느껴지는 그 감정은 차원이 달랐다.

숨이 막히는 것 같았다.

“어렸을 때 살았던 집인 건 맞으니까.”

건욱이 손목을 들어 시계를 확인했다.

유학 가기 전까지 살던 곳이었지만 이제는 호텔 스위트룸이 집이나 마찬가지였다.

서흔과 함께 하기에 호텔은 안전한 장소는 아니었다. 새로운 집을 알아보던 차에 갑작스레 차 회장의 수족인 최 실장에게서 연락이 왔다.

서흔을 집으로 데리고 오라는 건 차 회장의 뜻이었다. 새로운 집을 얻겠다는 건욱의 말을 차 회장은 수용하지 않았다.

차 회장의 허락도 없이 진행된 민협의 약혼과 교통사고만으로도 그의 신경이 날카로웠다.

혹여라도 건욱과 민협의 약혼녀 사이에 추문이라도 돈다면 그것만큼은 절대 용납할 수 없다는 게 그의 뜻이었다.

“그럼 차 회장님 댁에서 계속 지내야 한다는 뜻이에요?”

건욱을 바라보며 서흔이 물을 때였다. 도어 벨이 울리고 여자 한 명이 들어왔다.

“안녕하십니까.”

검은색 바지 정장을 입고 단발머리를 깨끗하게 뒤로 넘겨 하나로 묶은 여자는 건욱을 보자마자 꾸벅 인사를 했다.

건욱이 인사를 받으며 서흔을 바라보았다.

“앞으로 당신을 24시간 보호해 줄 주선영 대리입니다. 이쪽은 유서흔 씨.”

“반갑습니다.”

서흔보다 서너 살은 많아 보이는 주 대리가 공손하게 서흔에게 인사를 했다. 불편한 마음을 꾹 누르며 서흔이 마주 인사를 했다.

“유서흔입니다.”

“편히 주 대리라고 불러 주십시오.”

“네.”

“앞으로 유서흔 씨의 모든 일정은 주 대리가 함께 소화할 겁니다.”

“이 집에서 한 발짝도 못 나가는 거 아니고요?”

“그렇게 하고 싶으면 그렇게 해도 괜찮고.”

끝까지 반항심을 내려놓지 않는 어린 학생 같은 서흔을 보며 건욱이 피식 웃었다.

“당신이 가만히 있는 편이 모든 사람의 일을 쉽게 만들어 주긴 할 겁니다. 나부터.”

“그럼 더더욱 나가야겠네요.”

당연히 그렇게 말할 줄 알았다는 듯이 건욱이 다시 피식 웃었다.

“일은 잠깐 쉬도록 할게요. 팔도 쉬어야 하니까 그건 저도 양보할게요.”

서흔이 큰 결심을 하며 숨을 내쉬었다.

“하지만 집에는 한 번 갔다 와야 해요. 이곳에서 지내려면 준비가 필요해요. 하다못해 갈아입을 옷도 없으니까요.”

지금 입고 있는 명품 원피스도 민협이 선물한 옷이라 사실 무척 불편했다.

퇴원할 때는 선택의 여지가 없어 입었지만 지금은 당장 편안한 옷으로 갈아입고 싶었다.

“주 대리가 안내해 줄 겁니다.”

“아, 고마워요.”

서흔은 주 대리가 같이 집으로 가 준다는 말인 줄 알고 얼굴에 화색이 돌았다.

“아가씨가 입으실 옷과 사용하실 물품들은 다 준비가 되어 있습니다. 지금 안내해 드릴까요?”

주 대리가 살짝 나서 건욱에게 허락을 구하듯이 묻자 금방 서흔의 표정이 일그러졌다.

“준비해 놓다니 그게 무슨 뜻이에요?”

“사용하는 데 불편함 없이 준비하라고 하긴 했는데 부족한 게 있으면 말해요.”

“차건욱 씨, 지금 무언가 오해를 하고 있나 본데 날 멋대로 하려 하지 말아요. 난 당신이 원하는 대로 움직이는 사람이 아니에요.”

건욱은 한숨을 삼켰다.

그 당신이란 여자 하나 마음대로 하지 못해 그가 얼마나 많은 시간을 할애하고 있는지 이 여자는 죽었다 깨어나도 모를 것이다.

“당신이 내 입의 혀처럼 구는 사람이었다면 이렇게 나와 대화할 일도 없었을 겁니다.”

명령 한 마디면 모든 일이 쉽게 끝났을 것이다. 건욱이 직접 병원으로 찾아가 이 집으로 그녀를 데리고 올 일도 없었을 것이다.

차 회장이나 주형과의 신경전도 필요치 않았겠지. 아니, 애초부터 갑자기 물거품처럼 사라져 버린 후 갑자기 민협의 약혼녀로 나타날 일도 없었을 것이다.

그것만큼은 그가 절대로 용납할 수 없는 일이었으니까.

“그럼 저녁 식사 때 봅시다.”

감정이 금세 사그라든 건욱의 입에서 무덤덤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저녁 식사 때요?”

매번 식사까지 같이해야 하는 건가 싶어 서흔은 저도 모르게 날카롭게 반응했다.

건욱이 무슨 말을 할 때마다 반응이 남다른 서흔은 그와 무척 다른 느낌이다. 그런 그녀가 신기하고 재미있었는데.

“예비 시할아버지에게 인사는 드려야지 않겠습니까.”

“……!”

“준비하고 있어요.”

살짝 당황한 서흔을 그 자리에 내버려 둔 채 건욱은 미련 없이 등을 돌렸다.

쿵, 하고 현관문이 닫혔다.

몇 초간의 정적이 흐르고 서흔은 긴장이 확 풀리는 기분이 들었다.

낯선 집의 낯선 환경에 떨어진 것이 큰 스트레스인 것 같았다. 하지만 건욱을 상대하는 것과 비교할 수 없었다.

민협과 약혼을 하며 건욱의 빚은 계좌로 보내려 했다. 이제 그를 더 이상 만나게 될 일은 없을 거라 생각했는데…….

교통사고가 난 뒤 그가 병원에 찾아왔을 때도 민협과 건욱이 사이가 좋지 않기에 그다지 부딪칠 일이 없을 거라 생각했는데.

이 집에서 같이 살게 되다니.

깊은 한숨이 흘렀다.

그러다 문득 그녀를 향한 집요한 시선이 느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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