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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약혼녀가 아니야 (26)화 (26/74)

26화

“이 병실을 나가면 당신은 앞으로 직접 경찰이며, 언론을 상대하게 될 겁니다. 자신 있습니까.”

“지금 협박하는 거예요?”

“현실을 말해 주는 겁니다.”

건욱은 담담하게 앞으로 서흔에게 벌어질 일들을 설명하기 시작했다.

“먼저 경찰 조사부터 받게 될 겁니다.”

“상관없어요. 나는 아무런 일도 하지 않았으니까요.”

그녀는 결백했다. 경찰 조사 따위는 무섭지 않았다.

“W그룹이 막고 있는 기사들도 쏟아질 겁니다. 당신도 알지 못하는 당신의 관한 모든 이야기들이.”

하지만 기사 이야기는 달랐다. 언론에서 그녀의 이야기가 쏟아지는 일은 잘 상상이 되지 않았다.

“그래도 기자들은 계속 당신을 따라 다닐 겁니다. 새로운 기삿거리가 더 이상 나오지 않을 때까지. 당신의 가족, 친구, 직장 동료까지 모두 찾아갈 거예요.”

“하지만…….”

서흔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반박할 말이 없었다. 그녀는 언론이 알 권리를 주장하며 한 사람을 얼마나 갈기갈기 찢어발기는지 모르지 않았다.

그들은 그녀에서 그치지 않을 것이다. 그녀의 가족사도, 엄마의 치부도 만천하에 드러날 수 있었다.

“당신이 거부하는 그 보호. 이곳을 나가는 즉시 끝날 거라는 뜻입니다. 선택은 당신이 해요. 나와 함께할 건지, 말 건지.”

건욱은 그녀를 벼랑 끝으로 내몰면서 그게 싫으면 지금 그의 품 안으로 들어오라고 하고 있었다.

무엇도 선택하고 싶지 않았지만 다른 방도가 떠오르지 않았다. 결국 그녀에게 남은 건 자신을 옭아맬 건욱의 손을 잡는 방법밖에 없었다.

“알겠어요. 당신이랑 함께 갈게요.”

서흔의 대답에 건욱이 병실 문을 열었다. 그녀는 깊은 한숨을 쉰 뒤 그를 따라나섰다.

* * *

건욱과 함께 차를 타고 도착한 곳은 커다란 저택이었다. 저택 입구에는 CCTV와 경비원이 배치되어 있었다.

입구를 지나자 거대한 정원이 나타났다. 집이 아니라 무슨 미술관 같았다.

정원 곳곳에는 조경과 어울리는 조각과 미술 작품이 설치되어 있었다. 모던하게 지어진 커다란 두 동의 건물도 정원과 조화를 이뤄 무척 아름다웠다.

“이곳이 대체 어디에요?”

규모도 그렇고, 보안도 철저한 것이 일반 집 같아 보이지 않았다.

호텔 측에 그녀가 지낼 만한 조그마한 곳을 마련해 줄 거라 생각했는데 전혀 뜻밖의 장소에 서흔이 주변을 둘러보며 물었다.

“우리 집.”

“네?”

놀란 서흔이 눈을 동그랗게 뜬 채 건욱을 돌아봤다.

“당신 집이라뇨?”

이 남자는 대체 무슨 생각인 건지. 가끔은 건욱의 머릿속을 열어 보고 싶은 충동이 일었다.

“나, 차민협 씨 약혼녀예요.”

병원에 있는 동안 서흔은 W그룹에 관한 많은 이야기를 듣게 되었다. 

민협의 사고와 관련하여 건욱과 민협의 관계, W그룹의 승계 다툼, 그리고 건욱의 부모님에 관한 이야기 등등을 낱낱이 파헤쳐 계속 보도했다.

그를 만나기 전에 알고 있었다면 건욱에게 얽혀 드는 일은 없었을 텐데, 라는 후회가 들었지만 되돌리기엔 너무 늦은 후였다.

“당신은 차민협 씨 사촌 형이고요.”

그것도 무척 사이가 좋지 않은 사촌이었다.

“그런데?”

“그런 내가 당신 집에서 함께 지내면 남들이 어떻게 생각하겠어요?”

사촌을 죽였을지도 모른다는 더러운 평판을 한 몸에 안고 있는 건욱이었다.

살인 교사를 했을지도 모른다고 거론되는 사촌과 혼수상태에 빠진 남자의 약혼녀의 조합이라니.

“어떻게 생각하는데?”

이렇게 말했는데도 못 알아듣는 건가.

“아무튼 남녀가 단둘이 한 집에서 같이 지내는 건 안 돼요.”

게다가 남녀 둘이 한 집에서 지낸다는 소식이 알려지기라도 한다면 악의적인 소문이 돌기 딱 좋았다.

“단둘이라고 말한 적은 없는데. 당신은 나와 단둘이 지내고 싶은 겁니까.”

건욱의 말에 서흔의 얼굴이 발갛게 달아올랐다. 혼자만 이상한 생각을 했나 싶어 당황스러웠다.

“그런 말이 아니잖아요. 나를 왜 당신 집에 데리고 온 거냐고 묻는 거잖아요.”

“내 눈앞에 둬야 안심이 되니까.”

심각하게 미간을 찌푸리는 서흔을 보며 건욱이 담담히 대답했다.

“……?!”

갑작스러운 건욱의 말에 서흔의 심장이 쿵 떨어지는 것 같았다.

그의 눈동자에는 처음부터 끝까지 어떠한 감정도 담겨 있지 않았다.

하지만 서흔은 갑자기 두 사람이 처음 술잔을 기울였던 그 시간으로 돌아간 것 같았다.

손끝이 간질간질했던 순간들과 강렬했던 이끌림, 그 떨림이 갑자기 한꺼번에 밀려들었다.

마치 그녀를 걱정하는 듯한 눈동자에 빨려 들어갈 것 같던 그때, 건욱이 입을 열었다.

“당신이 교통사고의 중요한 용의자니 사건이 해결될 때까지는 내 옆에 있어야지.”

“난 사고를 내지 않았어요.”

서흔의 피가 차갑게 식으며 자조 섞인 웃음이 흘러나왔다.

이제껏 그녀를 기만하던 그가 갑자기 개과천선을 했을 리가 없는데 고작 말 한마디에 이렇게 흔들리는 자신이 너무나 바보 같고 한심했다.

그나마 다행인 건 덕분에 정신을 바짝 차렸다는 것이다. 앞으로 그가 무슨 이야기를 해도 더 이상 어처구니없는 오해를 하지 않을 것이다.

“진실은 차차 밝혀지게 되겠지. 들어갑시다.”

건욱이 앞장서 현관으로 향했다. 안뜰 정원 입구에는 커다란 황장목이 한 그루 서 있었다. 솔잎 냄새가 무척 진했다.

서흔은 입술을 깨물며 그를 뒤따라 집 안으로 들어갔다. 연배가 있어 보이는 정갈한 모습의 한 여인이 보였다.

할머니가 계신다면 딱 저런 모습이었으면 좋겠다 싶을 정도로 곱게 늙은 노인이 두 사람을 맞이했다.

“오셨습니까?”

“이 집사님도 안녕하셨어요?”

“네. 이쪽이 말씀하신?”

이 집사의 물음에 건욱이 고개를 끄덕이자 이 집사가 고개를 숙이며 인사했다.

“어서 오십시오. 편하게 이 집사라고 불러주시면 됩니다.”

“아……. 안녕하세요. 유서흔입니다.”

이 집사의 공손한 인사에 서흔도 고개를 숙여 인사했다.

“지내실 곳은 미리 준비해 두었습니다. 가방 주시고 이쪽으로 오세요.”

이 집사가 건욱이 입고 있던 코트를 받아 들기 위해 손을 뻗었다.

고용인으로서의 당연한 행동 같았지만 서흔은 보는 것만으로도 불편했다.

“짐 주시겠어요?”

다음 타깃은 서흔이었는지 이 집사가 물었다.

“아니요, 제가 들게요.”

그녀는 팔을 다친 상태였지만 한쪽 팔은 괜찮았다. 할머니 연배 되는 이 집사에게 짐을 맡길 순 없었다.

서흔이 이 집사의 손을 물리는데 건욱이 간단히 서흔의 손에서 짐을 빼앗아 이 집사에게 넘겨주었다.

이 집사가 흥미로운 듯 두 사람을 바라보았지만 건욱은 건조하게 말할 뿐이었다.

“안내해 주세요, 이 집사님.”

“네. 이쪽으로 오세요.”

이 집사는 두 사람을 데리고 본채와 연결된 별채로 향했다. 그곳은 안뜰 정원을 끼고 본채 오른쪽에 있었다.

“대표님 방은 사용하시던 2층 그대로 두었습니다. 손님은 1층의 이 방을 쓰시면 됩니다. 불편한 점이 있으면 인터폰을 눌러 주시면 됩니다.”

간단한 설명을 끝낸 이 집사가 건욱을 보았다.

“회장님께는 도착하셨다 알려 드렸습니다.”

“인사는 언제쯤 드릴까요?”

“저녁 식사 같이하자고 하셨습니다.”

건욱의 눈초리가 위로 솟는 걸 보면서 이 집사가 웃었다.

“점심은 어떻게 준비해 드릴까요?”

“이 사람 것만 1시간 뒤에 별채로 좀 부탁드릴게요.”

“네, 알겠습니다.”

안내를 마친 이 집사가 깍듯이 인사를 한 뒤 별채에서 나갔다.

거실엔 덩그러니 이 집사가 두고 간 서흔의 짐이 놓여있었다.

“나 한 팔 멀쩡해요.”

“갑자기 무슨 소리지?”

“이 집사님이 도와주지 않으셔도 이 정도는 들 수 있었다는 말이에요. 당신은 이 집사님의 도움을 받는 게 익숙할지 몰라도 난 아니에요.”

서흔의 말투가 자연히 냉소적으로 변했다. 이 집사님을 고용인으로 대하는 건 건욱에게 당연한 일일지 몰라도 그녀가 보기엔 거북스러웠다.

“가벼운 코트와 무겁지 않은 짐 가방이었습니다.”

“하지만 노인이시잖아요.”

“노인은 정당한 노동을 하면 안 된다는 법이라도 있습니까. 아니면 하는 일에 따라 귀천이 나뉜다고 생각하는 겁니까?”

“……내 말은!”

“집을 소개하고 생활하는 것에 대해 안내를 하는 것이 이 집사님의 업무입니다. 짐을 들어주는 것 또한 그분의 일이고. 그걸 침범하는 게 오히려 주제넘는 일이지.”

조용한 반박에 서흔의 얼굴이 화르륵 달아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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