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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약혼녀가 아니야 (25)화 (25/74)

25화

의사로부터 민협의 상태를 전해 들은 건욱은 병실에 들를까 하다가 발걸음을 돌렸다.

그가 병문안을 가 봤자 작은아버지 내외는 반가워하지 않을 것이다. 그들의 눈에 띄지 않는 것이 차라리 그들을 위한 최선일 것이다.

건욱은 엘리베이터 버튼을 눌렀다. 머리가 무거웠다. 서흔과 나눴던 대화들이 머릿속을 유영했다.

교통사고가 서흔과 관련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아니었지만 일말의 가능성도 배제할 수는 없었다.

그는 그 작은 가능성 하나로 서흔을 몰아세웠다. 그러나 흔들리는 사람은 오히려 자신 같았다.

그녀의 한 마디, 한 마디가 모두 그를 자극했다. 거슬렸다.

띵- 도착음과 함께 엘리베이터 문이 열렸다. 그곳에는 건욱이 제일 마주치고 싶지 않은 사람이 타고 있었다.

작은아버지, 차주형.

주형은 건욱을 보자마자 얼굴을 구겼다.

‘이 새끼가!’

주형은 민협을 보러 온 참이었다. 그는 매일 병원을 오가고 있었고, 혜림은 사고가 난 날부터 민협의 옆을 지키며 병간호를 하고 있었다.

그런데 이곳에서 보기 싫은 불청객과 마주치다니. 왈칵 분노가 치솟았다.

당장이라도 저놈의 멱살을 잡고 내동댕이치고 싶은 마음이 일었다. 하지만 차 회장의 경고가 떠올랐다.

주형은 겨우 충동을 억눌렀다. 그는 자신을 향해 고개를 숙이는 건욱의 어깨를 밀치며 엘리베이터를 빠져나왔다.

어릴 적부터 건욱을 특별한 이유도 없이 못 마땅히 여겼던 주형의 이런 행동은 익숙한 것이었기에 건욱은 그저 무시했다.

건욱은 조용히 엘리베이터에 올라탔다. 그 모습에 이를 가는 건 주형이었다.

엘리베이터 문이 닫히기 직전 주형이 악귀처럼 구겨진 얼굴로 말했다.

“약속된 시간이 지나면…… 넌! 죗값을 치르게 될 거다. 내가 꼭 그렇게 만들어 주마.”

“…….”

엘리베이터 문이 닫히고 그 문에 비친 자신의 얼굴을 보며 주형이 뒤에선 한 비서에게 말했다.

“범인은 차건욱이야.”

“네?”

“범인은 무조건 차건욱이라고. 내 말 알아듣겠어?”

“네. 알겠습니다.”

주형의 눈빛이 빛났다. 건욱이 민협의 사고와 무관하다 하더라도 이번 사고는 무조건 다 차건욱의 짓이어야 했다.

차 회장과의 협상으로 주어진 건욱의 시간은 주형에게도 동일하게 주어졌다.

그는 그 시간 동안 증거를 조작할 것이고 건욱을 범인으로 만들 것이다.

그것이 혼수상태에 빠진 민협을 구하고, 자신을 구하는 일이었다.

‘민협아, 걱정하지 마라. 네가 일어날 때쯤엔 모든 것이 다 제자리로 돌아가게 될 거야!’

주형은 주먹을 콱 틀어쥐었다.

* * *

엘리베이터에서 내린 건욱은 지하 주차장으로 향했다. 대기 중이던 차에 오르자 도 실장이 물었다.

“가신 일은 어떻게 됐습니까?”

그는 대답 대신 방금 마주쳤던 주형의 눈빛을 떠올렸다. 악독하게 구겨진 얼굴을 생각하니 느낌이 좋지 않았다.

“사고 정황은 파악됐습니까?”

“브레이크에 임의로 손을 댄 흔적이 있었고 브레이크 파열로 인해 사고로 이어진 것 같습니다.”

“그럼 차량 행적을 조사해 봐야겠군요.”

“네. 우선 일주일 전부터 차 상무님의 차량 행적을 조사하고 있습니다.”

“차민협의 행적도 알아봐 주세요. 특히 유서흔과의 관계에 대해 자세히.”

“네. 알겠습니다. 그럼 유서흔 씨는 어떻게 할까요? 병원 측에서는 일주일 후에 퇴원 가능하다고 합니다.”

“흠…….”

“그냥 돌려보낼까요? 아니면 따로 있을 곳을 준비해 둘까요?”

“나도 함께 머물 공간을 마련해 보세요.”

지금 그가 지내는 호텔은 아무래도 보는 눈이 너무 많았다.

“같이요?”

“네.”

“아…….”

“문제 있습니까?”

“……아닙니다. 준비하겠습니다.”

도 실장은 고개를 끄덕였다. 건욱은 좌석에 깊숙이 몸을 묻었다.

* * *

다행히 서흔은 빠르게 회복했지만 민협에 대한 소식은 어디에서도 들리지 않았다.

간병인이나 의료진들도 줄곧 입을 다물었고 이후로 건욱은 오지 않았다.

막연히 민협이 아직도 혼수상태인 것 같아 내내 마음이 좋지 않았다. 그래도 오늘은 그녀의 퇴원일이라 조금 마음이 들떴다.

아직 깁스한 팔 한쪽은 계속 치료받아야 하긴 했지만, 병원을 나갈 수 있는 것만으로도 답답했던 마음이 뚫리는 것 같았다.

-내가 데리러 가면 좋은데. 아무리 W그룹 보안이 어쩌고저쩌고해도 퇴원 혼자 시키는 게 말이 되니?

수화기 너머 다경이 투덜거렸다.

비밀 서약 때문에 다경에게 약혼 이야기를 하지 못한 상태에서 갑자기 민협과 사고가 났다는 소식에 다경은 기함했다.

그럼에도 서흔에게 사정에 있겠거니 싶었는지 건강에 집중하라는 말만 전할 뿐이었다.

<플로라유>는 다경 덕분에 문제없이 매장을 오픈할 수 있었고 W호텔의 외주는 오랫동안 손발을 맞춰 온 외부 출장 팀이 처리해 주고 있었다.

“괜찮아. 다리는 멀쩡하니까 혼자 집에 갈 수 있어.”

이제 마지막 처방전만 받으면 완전한 퇴원이었다. 이미 간병인은 그녀의 소지품을 정리해 준 뒤 일을 마치고 떠난 뒤였다.

-콜택시 불렀어?

“아직. 이제 부르려고.”

-말로만 그러는 거 아니지? 괜히 개고생하지 말고 콜택시 불러. 오늘은 불러도 돼. 이 언니가 택시비 내 줄게. 알았지?

“알았어. 걱정하지 마. 도착하면 연락할게.”

말은 그렇게 했어도 지하철을 타고 갈 생각이었다. 그녀의 생각을 뻔히 눈치챈 다경의 잔소리가 이어질 것 같아 그녀는 서둘러 전화를 끊었다.

서흔은 처방전을 기다리며 정리된 소지품 하나하나를 보았다.

그날 밤 입었던 옷과 클러치 백, 민협에게서 받은 반지 케이스 등이었다. 서흔은 반지 케이스 안에 고이 있던 반지를 꺼내 손에 끼었다.

‘이제 약혼은 어떻게 해야 하는 거지?’

민협도 걱정되었고 약혼도 어떻게 마무리 지어야 하나 고민되었다. 지금으로선 답을 내릴 수 없어 천천히 생각하기로 했다.

우선은 집으로 가 좀 쉬면서 집 정리를 한 뒤 <플로라유>에 갈 생각이었다.

매장 정리가 좀 되면 외부 출장 팀이 대신 맡아 하고 있는 외주 일들도 다시 맡고 싶었다.

똑똑-

노크 소리가 들려왔다. 처방전을 전해 주러 간호사가 온 건가 싶어 시선을 돌리는데 뜻밖에 건욱이 들어섰다.

“준비 끝났습니까?”

“무슨 준비요?”

“오늘 퇴원한다고 들었는데.”

“맞아요. 저 퇴원해요. 그러니까 오늘은 그만 돌아가 주세요.”

갑자기 그녀의 퇴원에 맞춰 나타난 그의 모습에 말투가 곱게 나가지 않았다.

지난번 그는 서흔을 사고의 범인으로 취급했다. 이번에는 또 어떤 트집을 잡을지 모를 일이었다.

“나랑 같이 갑시다.”

“같이 가다니, 무슨 소리예요?”

그냥 돌아가 주길 바랐지만 건욱은 그럴 생각이 없어 보였다.

“내가 그냥 놓아줄 거라 생각했습니까? 유력한 용의자를? 사건이 해결될 때까진 내 보호하에 있어야지.”

“보호?”

건욱의 말에 서흔은 화가 차올랐다.

“보호? 말만 그럴듯하게 하지 말아요. 지금 날 감시하겠다는 뜻이잖아요. 싫어요. 난 당신이랑 갈 이유 없어요.”

그러자 건욱이 피식 웃었다. 하지만 웃는 얼굴과 다르게 그의 목소리는 냉기가 느껴질 만큼 차가웠다.

“당신이 지금까지 경찰 조사받지 않은 이유가 뭐라고 생각합니까? 민협의 약혼녀라 주장하는 당신이 기자들의 연락을 받지 않은 이유는?”

서흔은 멈칫했다. 거기까진 생각지 못했다. 민협은 큰 사고를 당했고 사고 조사는 어쩌면 당연한 건데 서흔은 한 번도 조사를 받지 않았다.

민협의 사고가 연신 신문과 뉴스에 보도되고 있었지만, 약혼녀가 동석하고 있었다는 말 외에 그녀에 관한 이야기는 일절 나오지 않았다.

“이제껏 언론이 당신의 존재를 몰라서 보도하지 않는 게 아니야. 그럼에도 당신의 신상에 대한 기사 하나 나지 않는 이유가 뭔지 아직도 모르겠나.”

“…….”

“이게 보호가 아니면 뭐지?”

W그룹 차원에서, 다른 누구도 아닌 차건욱이 막고 있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그리고 사고의 제1의 용의자는 가장 가까운 사람인 법인데. 가령, 약혼녀처럼.”

“유력 용의자는 오히려 당신 아닌가요?”

뉴스에서는 끊임없이 차건욱을 범인처럼 단정 짓고 있었다. 두 사람의 정치적 관계에 대한 상세한 이야기도 끝없이 다뤄졌다.

“당신 신상에 대한 기사가 나오지 않는 이유와 같은 이유지.”

“……설마 일부러 그렇게 내버려 두고 있다는 뜻이에요? 왜요?”

서흔은 미간을 찌푸렸다. 건욱이 자신을 사고의 범인이라고 오해한다고 해서 건욱이 사고를 일으켰다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그런 사람이라고 믿고 싶지 않았다.

그런데 굳이 그를 범인으로 오해하게 내버려 둘 만한 이유가 뭔지 그녀로서는 이해하기 어려웠다.

서흔은 복잡해지는 머릿속을 흔들었다.

“어차피 상관없어요. 어쨌든 나는 혼자 집에 갈 거예요. 당신과 같이 갈 이유는 없어요.”

그녀의 단호한 결심을 비웃듯 건욱이 입을 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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