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화
차가운 남자의 눈빛에 서흔은 긴장하며 떨렸던 마음이 한순간에 잠잠해지는 것을 느꼈다.
“당신이야말로 누구예요?”
“그게 무슨 소리입니까.”
싸늘한 목소리가 꽂혀 들었다.
“이름 말고 알려 준 게 아무것도 없잖아요. 나야말로 궁금하다고요. 당신이 누군지.”
서흔이 이를 갈 듯 말했다.
W호텔의 대표라는 중요한 사실을 알지 못한 채 나눴던 그와의 대화들은 무의미했다. 그가 했던 모든 말들은 그녀를 기만한 것에 불과했다.
그녀가 마지막으로 메시지를 보낸 이후 연락도 없던 건욱이었다. 그랬던 그가 지금 갑자기 자신을 찾아왔다.
사고가 났던 밤 호텔 로비에서의 만남이 떠올랐다. 건욱과 민협의 대화도.
서흔은 건욱이 W호텔 대표라는 사실을 알게 된 후 인터넷에 그를 검색했다.
그는 무척 유명한 사람이었다. W그룹 회장의 직계손이었고 민협과는 사촌지간이었다. 하지만 두 사람 사이는 좋아 보이지 않았다.
차건욱과 차민협이라니.
어쩌다 이렇게 두 사람과 얽히게 됐는지 모르겠지만 서흔은 민협의 계약을 받아들이기로 결심했다.
자신을 기만한 건욱에 대한 복수 같은 마음도 조금 있었고 무엇보다 계속 생각나는 건욱에 대한 마음을 접고 싶어서였다.
“나를 모른다?”
건욱은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서흔은 건욱을 몰랐다. 그가 누군지, 그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그가 어떤 마음으로 그녀를 만났는지.
그리고 그건 건욱도 마찬가지였다.
건욱은 서흔을 몰랐다. 그녀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그녀가 어떤 마음으로 그를 만났는지. 왜 그가 아닌 차민협을 선택했는지.
“하지만 이제 내가 누군지 알지 않습니까? 당신은 차민협의 약혼녀가 되었잖아요. 단 며칠 만에.”
서흔은 대답하지 않았다. 건욱을 모른다고도 말하지 않았고, 약혼에 대한 설명도 덧붙이지 않았다.
“여긴 왜 온 거죠?”
서흔의 질문에 건욱이 헛웃음을 지었다.
어쩌면 그녀에겐 그가 민협과 사촌이라는 사실이나 두 사람 사이가 정치적 경쟁 관계라는 사실은 중요하지 않았을지도 몰랐다.
[유서흔 씨에게 또 다른 채무 관계가 있었습니다. 1억 정도이고 채무 기간이 지나 독촉을 받고 있었다고 합니다.]
그저 목표는 돈인 걸까.
“정말 약혼한 거 맞습니까?”
“그걸 확인하러 온 건가요? 민협 씨한테 직접 들었잖아요.”
건욱도 그것이 아이러니였다.
당사자들에게 직접 들었고, 눈으로 확인했는데도 왜 오히려 점점 두 사람의 약혼이 거짓이라는 확신이 들기 시작하는지.
“그렇다면 나에 대해 묻기 전에 약혼자의 안위에 대해 먼저 물어야 하는 거 아닙니까?”
차 회장의 지시로 민협의 사건에 관한 모든 일들은 혁신 전략 기획 본부에서 컨트롤하고 있었다.
주형은 절대 아들의 사고를 건욱에게 맡길 수 없다고 눈이 뒤집혔지만 차 회장과의 면담을 가진 후 분노를 가라앉혔다.
차 회장이 무슨 조건을 내걸었는지 알 수 없었지만 건욱에게 잠깐의 시간이 주어졌다.
그동안 건욱은 자신이 범인이 아니라는 증거를 찾아내야 했다.
건욱은 서흔과 민협의 사고 및 모든 정보를 컨트롤하고 서흔에게 간병인을 붙였다. 민협의 소식은 전하지 못하게 했다. 그녀의 반응을 보려는 생각이었다.
“이미 여러 번 물었어요. 하지만 아무도 대답해 주지 않았어요.”
“차민협은 혼수상태입니다.”
건욱의 말에 순간 놀란 서흔이 입술을 깨물었다. 많이 다쳤을 거라 예상했지만 혼수상태일 거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운전을 한 사람은 민협이고 그의 부주의로 인한 사고일 테지만 불같이 화를 내던 그를 진정시키지 못했다는 죄책감이 들었다.
그녀가 조금만 더 말렸더라면 이런 사고가 나지 않았을 것 같아 마음이 아렸다.
“생각보다 놀라지 않네요.”
자신을 빤히 쳐다보는 건욱의 시선에 그날 밤의 후회 속에 파묻혀 있던 서흔이 고개를 들었다.
“보통은 눈물부터 흘릴 것 같은데 울지도 않고.”
건욱이 보기에 약혼녀라 주장하는 그녀의 반응은 차분하기만 했다.
“무슨 의미예요?”
“사랑하는 약혼자를 잃을 위기에 처한 사람 같지 않아서 말입니다.”
서흔은 저도 모르게 메마른 볼 위를 손으로 훑었다.
“원래 눈물이 없을 뿐이에요. 당연히 걱정되고요. 그리고 지금 제 반응이 뭐가 중요한가요?”
서흔은 건욱의 의심이 충분히 이해가 되면서도 초점이 이상한 데 맞추어졌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무리 건욱과 민협의 관계가 좋지 않다고 해도 지금 여기서 가장 큰 이슈는 민협의 안위였다.
“중요한 건 민협 씨 상태인 거잖아요. 정말 혼수상태인 건가요?”
서흔의 목소리에 걱정이 묻어났다. 민협과 계약으로 묶인 관계라고 해도, 딱히 민협에게 우호적인 감정이 없다고 해도 갑작스러운 사고로 혼수상태에 빠진 사람을 걱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서흔은 그가 건강을 되찾길 원했다. 그래서 무사히 그녀와 6개월간의 계약 약혼을 끝내길 원했다.
“설마 영원히 깨어나지 못하거나 그런 건 아니죠?”
그녀를 살피던 건욱의 눈매가 더욱 날카로워졌다. 싸늘한 목소리가 쏟아졌다.
“정말 민협이 죽을 수도 있나. 그걸 묻고 싶은 겁니까?”
“……뭐라고요?!”
파렴치한으로 취급하는 건욱에 서흔이 파르르 떨었다.
“내 슈트 값 말고도 빚이 있더군요.”
이어진 그의 말에 서흔은 숨을 들이켰다.
“민협이 그걸 갚아 줬고.”
“갑자기 왜 그런 이야기를 하는 거죠?”
서흔은 어떻게 건욱이 자신의 채무까지 알고 있는지, 혹시나 두 사람의 비밀스러운 계약까지 아는 건 아닌지 불안했다.
계약에 관한 건 누구에게도 함구해야 한다는 것이 기본 전제였고 서흔은 특히나 건욱에게는 절대 알리고 싶지 않았다.
“앞뒤가 딱 맞아떨어지니 말입니다. 빚이 있는 여자가 빚을 갚아 준 남자와 급하게 약혼을 했다. 그런데 그날 사고가 났고. 그 사고로 남자가 죽는다면 당신의 빚은 사라지겠죠.”
건욱은 추궁하듯 서흔을 몰아붙이며 바짝 그녀에게 다가왔다.
그녀의 진심을 훔쳐보겠다는 듯이 그의 눈동자가 서흔를 주시했다. 눈동자의 흔들림, 입술의 움직임, 손가락의 떨림까지 모두.
“내가 지금 돈 때문에 사람을 죽이기라도 했다는 거예요?”
“죽였습니까?”
“당연히 아니에요!”
태연히 묻는 건욱에 서흔은 힘주어 소리쳤다. 그녀를 향한 말도 안 되는 의심에 분노와 억울함이 뒤섞였다.
“그걸 어떻게 믿지?”
“뭐라고요?”
“민협과 당신만 아는 돈거래에, 민협이 죽으면 당신은 그 돈을 갚지 않아도 되겠죠. 지금 가장 유력한 용의자가 당신인데 내가 당신 말을 믿어야 할 이유가 있습니까.”
서흔은 충격에 몸이 굳는 것 같았다. 이런 오해를 받을 거라고는 생각하지도 못했다.
그녀는 살면서 누군가에게 해를 끼치겠다는 생각은 단 한 번도 하지 않았다.
너무 억울하고, 그런 무서운 사람으로 자신의 이름이 거론되는 것만으로도 손이 부들부들 떨렸다.
“어떻게 나를…… 그렇게 오해할 수가 있어요?”
서흔은 울컥 차오르는 알 수 없는 감정이 휘몰아쳤다.
“나는 같은 차에 타고 있었던 사람이에요. 사고가 났고 내가 혼수상태에 빠졌을 수도 있어요. 아니, 나도 죽을 수 있었다고요. 바보가 아닌 이상, 그런 짓을 하겠어요?”
“그럼 약혼한 이유가 뭡니까? 이렇게 갑작스럽게.”
순간 서흔은 멈칫했다. 건욱의 눈동자가 모든 진실을 꿰뚫으려는 듯이 그녀에게 고정되어 있었다.
서흔은 차마 떨어지지 않는 입을 열었다.
“……첫눈에 반했어요.”
민협과 이야기해 두었던 대로 이유를 댔지만 가슴 한쪽이 콕콕 쑤셔왔다.
반했다고. 하…….
돈 때문에 약혼한 여자라고, 그 돈 때문에 사고까지 일으킨 파렴치한 여자라고 몰아세웠다.
그런데도 민협에게 반했다는 여자의 말을 듣자 알 수 없는 불길이 치솟았다.
“그럼 나랑 한 키스는 뭐였지?”
건욱이 입술을 비틀었다.
“한 번에 여러 남자 만나면서 즐기는 타입이었습니까? 소위 말하는 양다리?”
“당신이 그랬던 거 아니고요?”
순진한 나를 기만했던 건 차건욱, 당신이었잖아.
“날 속이면서 재밌었나요? 겨우 키스 두 번에 나한테 뭘 바랐던 거죠?”
서흔의 눈빛이 차갑게 가라앉았다.
“당신한테 빠졌을 거라고 기대라도 했나요? 미안해서 어쩌죠, 당신한테는 아무런 감정을 느끼지 못했는데.”
냉소적인 서흔의 말에 건욱은 가슴이 타듯이 치밀어 오르는 기분을 억누를 수가 없었다.
“처음부터 끝까지 모든 것이 거짓이라는 걸 스스로 밝히는 겁니까.”
단박에 건욱의 낮은 목소리가 건너왔다.
“걱정 말아요, 당신의 모든 거짓은 내가 직접 밝혀 줄 테니까. 갑작스런 약혼, 사고…… 그 모든 것을.”
건욱이 딱딱해진 서흔의 턱을 들어 올렸다. 서흔의 눈동자가 딸려 올라왔다.
“그러니까 각오해.”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