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화
“차민협이 약혼을 했습니까?”
민협의 약혼 소식은 처음 들었다.
주형과 혜림 부부의 특성상 민협이 공식적인 결혼을 추진했더라면 그 전에 그의 귀에도 들어왔을 터였다.
건욱뿐일까.
이미 대대적인 홍보를 펼쳐 정재계는 물론, 언론사까지 이런저런 기사를 쏟아 내야 했다.
“네, 약혼녀에게 프러포즈를 하셨다더군요.”
“흠…… 그래요?”
건욱이 알지 못할 정도로 베일에 싸여 있는 민협의 약혼녀라.
게다가 W호텔 레스토랑에서 프러포즈를 했다는 건 민협이 작정하고 누군가에게 보여 주기 위해 계획한 쇼라는 소리였다.
민협이 콕 찍은 ‘누군가’가 자신이라는 것에 그의 전 재산을 걸 수도 있었다.
건욱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어디 가십니까?”
“누군가에게 보여 주기 위한 쇼인데 관객이 참석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답지 않게 오늘은 흥미가 동했다. 무거운 머리도 잠시 식힐 겸 바람을 쐬면 나아질 것 같았다.
“이미 레스토랑에서 일어나셨답니다.”
“그럼 서둘러야겠군요. 커튼콜의 박수는 놓치지 말아야지.”
말과 다르게 건욱은 느긋하게 걸음을 움직였다. 엘리베이터에서 내려 로비를 가로지르자 한쪽을 주시하며 소곤거리는 사람들이 눈에 들어왔다.
이쪽이군.
그가 아니라도 이미 관객은 충분한 듯했지만 대미를 장식해 주는 것도 나쁘진 않았다.
건욱은 사람들의 시선을 따라 움직였다. 그 시선 끝에 민협이 있었다. 그리고 그곳에 민협의 손을 잡고 있는 여자가 있었다.
이거였나.
갑작스레 서늘해졌던 그 눈빛과 연락이 되지 않던 날들, 그리고 오늘의 메시지.
건욱의 피가 뜨겁게 돌기 시작했다.
“유서흔.”
부름과 함께 그녀의 손을 붙잡았다. 차가운 그의 손에 따뜻한 그녀의 온기가 전해졌지만 마음은 더욱 서늘해졌다.
“이건 대체 뭘까.”
떨리는 그녀의 손가락에 다이아몬드 반지가 반짝이고 있었다.
“손 치워. 내 약혼녀야.”
민협이 비틀린 미소를 지었다.
“지금은.”
건욱이 낮게 읊조렸다.
“조심해, 민협아. 내가 언제 다시 찾으러 갈지 모르겠으니까.”
* * *
다음 날.
민협의 사고 소식을 듣고 병원으로 향하던 건욱은 차 회장의 연락을 받고 차를 돌렸다.
W그룹 본사 앞은 취재진으로 인해 인산인해였다.
민협의 교통사고는 단순한 사고가 아니었다. 언론은 처음부터 누군가의 사주를 받은 의도적인 사고라는 쪽으로 기사 방향을 잡았고 사람들의 이목은 범인이 누구인가에 쏠렸다.
취재진의 질문은 모두 건욱에게 향해 있었고 그 의도가 무엇인지는 명백했다.
얼마 전 혁신 전략 기획 본부장으로 승진하며 자리를 다진 건욱이 대체 왜, 라는 질문은 포함되어 있지 않았다.
그들은 이미 먹잇감을 정해 놓고 덫을 놓고 기다리는 사냥꾼들처럼 건욱을 몰았다.
하지만 건욱은 묵묵히 취재진들을 지나쳐 회장실로 들어갔다.
차 회장은 소리를 죽인 채 TV를 보고 있었다. 선명한 화면 속 패널들은 민협의 교통사고에 대한 갖가지 추측을 쏟아 냈다.
사건이 있기 바로 직전 W호텔 로비에서 건욱과 민협의 다툼을 봤다는 제보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부르셨습니까.”
건욱이 허리를 숙여 인사를 했다.
“민협이 사고, 다들 네가 그랬다는데.”
건욱이 고개를 다 들기도 전에 차 회장의 목소리가 그의 머리 위로 꽂혔다. 건욱이 고개를 들자 형형한 눈빛이 그에게 쏟아졌다.
“네가 그런 것이냐?”
“…….”
민협은 몇 시간에 걸친 큰 수술을 받았지만, 의식을 되찾지 못하고 있었다.
하지만 건욱이 아는 차 회장은 그가 사고를 일으켰다 믿을 만큼 판단력이 흐린 사람이 아니었다.
그럼에도 민협의 사고 범인으로 건욱의 이름이 거론되고 있다는 건 차 회장이 그 사실을 묵과하고 있다는 뜻이었다.
이번 혁신 전략 기획 본부장 발령이 건욱의 발을 묶고 주형에게 경각심을 주기 위한 조치였다면, 지금은 이 사건을 빌미로 건욱을 옭아맬 생각인 것 같았다.
“아닙니다.”
“……그래?”
“예.”
찬찬히 건욱을 살피는 눈빛은 그 뜻을 알 수가 없었다.
정말 민협의 사고를 일으킨 사람으로 건욱을 의심하는 건지, 아닌지.
건욱의 생각 또한 읽기 쉽지 않았다. 억울해하는 기색도, 염려하는 기색도 없었다.
감정 자체가 완전히 거세된 사람처럼 건욱의 얼굴은 무표정하기만 했다.
“증거를 가져오래이.”
“…….”
주형은 언론이 먼저 건들기도 전에 건욱이 범인이라며 길길이 날뛰었다.
민협에게 경영권을 빼앗길까 두려운 나머지 건욱이 저지른 일이라고 주장했다. 곧 경찰 조사도 시작될 터였다.
하지만 차 회장은 집안일에 다른 사람들이 끼어드는 꼴을 볼 생각이 없었다.
이 이상 건욱의 이름이 거론되는 꼴을 두고 볼 생각이 없었다.
민협이 혼수상태인 지금, 이제 W그룹의 차기 후계자는 건욱이 유일했다.
경찰 조사는 미뤄질 것이고 건욱을 제 손에 맞게 주물러 차기 후계자로 내세워야 했다.
“네가 그 사고를 일으키지 않았다는 증거, 가져오래이.”
건욱의 대답과 상관없이, 이미 차 회장은 그를 향해 덫을 놓았다.
객관적 증거를 내놓기 전에는 절대 그에게서 벗어나지 못하리라.
“그때 다시 이야기하자.”
“알겠습니다.”
건욱은 꾸벅 고개를 숙이곤 회장실을 나갔다. 차 회장의 시선이 그 뒷모습을 좇았다.
* * *
서흔은 가만히 누워 천장을 쳐다보았다. 여느 곳과 다름없는 비슷한 모양인데도 이곳이 어디인지 뚜렷하게 느껴졌다. 병원은 특유의 그 냄새와 공기, 그리고 색이 있다.
그녀는 사고 후 바로 병원으로 이송되었다. 수술을 거치고 지금은 회복 중이었다. 그럼에도 아직도 자동차 사고를 겪었다는 것이 믿어지지 않았다.
하지만 통증은 진짜였다. 숨만 쉬어도 아픈 갈비뼈가, 움직일 수 없게 깁스한 팔이, 링거 바늘이 꽂혀 아릿한 손등이 자신이 사고를 당한 게 사실이라는 걸 알려주었다.
“그럼, 잠시 쉬고 계세요.”
게다가 병실을 나가는 저 간병인.
그녀를 민협의 약혼녀로 알고 있는 것이 분명했다. 이 고급스러운 VIP 병실 또한 민협 측에서 얻어 준 것이 분명해 보였다.
‘차민협은 괜찮을까.’
민협이 속도를 낼 때부터 긴장하며 안전벨트를 꽉 매고 있던 서흔은 크게 다치지 않았다.
하지만 민협은 달랐다. 그녀와 다르게 정신을 잃은 그의 마지막 모습은 처참했다.
민협의 상태는 어떤지, 괜찮은지 심각한지 간병인에게 물었지만 매번 돌아오는 대답은 같았다.
[상무님은 걱정하지 마세요. 지금은 본인 회복에 더 신경 쓰셔야 해요.]
민협의 약혼녀로서 그녀에게 간병인까지 붙여 돌봐 주고 있지만, 철저히 그녀를 소외시키고 있었다.
그 이유가 무엇인지 알 수가 없어 속이 답답했다. 혹시 누군가 민협과의 약혼 계약에 대해 알고 있는 게 아닌가 걱정도 되었다.
하지만 그녀가 할 수 있는 일은 없었다. 몸을 감싸는 무력감에 서흔이 옅은 한숨을 쉬었을 때, 똑똑 둔탁한 노크 소리가 들렸다.
서흔이 대답을 하기도 전에 문이 드르륵 열리고 한 남자가 들어왔다.
그 남자였다.
차건욱.
서흔은 놀라 자신도 모르게 숨을 멈췄다.
무심한 듯 완벽하게 넘긴 머리 아래 가늘어진 눈매가 베드 옆에 걸린 그녀의 이름에 멈췄다.
“유서흔 씨?”
느릿하게 서흔의 이름을 부른 건욱이 무감한 눈빛으로 그녀를 훑어보았다.
끝을 알 수 없이 어두운 눈동자가 그녀의 얼굴과 빳빳하게 날 선 환자복, 단단한 석고로 감싼 팔까지 스쳐 지나갔다.
“…….”
마음이 금세 꽉 조여졌다. 그저 제 이름을 부르기만 했는데도 온몸이 솜털이 바짝 서고 긴장이 되었다. 호흡이 가빠지고 심장이 떨렸다.
건욱은 그런 남자였다. 그저 시선 하나로, 말 한마디로 사람을 단번에 사로잡는.
그런데 이 남자가 왜 여기에 있을까.
이 남자가 왜 여기에.
“차민협의 약혼녀, 유서흔.”
이윽고 벌어진 입술 사이로 흘러나온 말에 서흔은 흠칫 몸을 떨었다.
그 말들이 꼭 단두대 위에 희멀건 목을 드러낸 그녀에게 떨어지는 마지막 말 같았다.
서흔의 몸이 굳으며 드러난 손이 베드 위 시트를 움켜잡았다.
무의식적인 그녀의 몸짓에 그의 시선이 그녀의 손등에, 네 번째 손가락에 끼어져 있는 반지에 닿았다 얼굴로 올라왔다.
마치 제 몸을 긁어내리는 것 같은 시선에 옴짝달싹 못하는 기분이었다.
단숨에 이 공간에 산소가 완전히 사라진 같아 서흔은 숨을 헐떡였다.
더 이상은 이 긴장감을 견뎌 낼 수 없다고 생각했을 때, 건욱의 입술이 열렸다.
“뭐야, 너.”
짓이기듯 벌어진 입술 사이로 차가운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그의 눈빛이 내리꽂듯이 그녀에게 향했다.
저 눈빛이 무감하다니. 아니었다. 건욱의 눈동자에는 자신을 향한 경멸이 가득 담겨 있었다.
서흔의 심장이 쿵 하고 떨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