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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약혼녀가 아니야 (22)화 (22/74)

22화

“뭐?”

놀라는 부모님을 보며 민협은 희열이 차오르는 것을 느꼈다.

“차건욱이 여자를 만나? 그게 진짜야?”

앞에 놓인 두통약을 먹을 생각도 못 한 채 혜림이 새된 목소리로 물었다.

여자에게 일절 흔들림이 없었던 건욱이었던지라 주형은 믿을 수 없다는 눈치였다.

제 부친의 과오 때문인지, 차 회장의 단속 때문인지 건욱은 지금껏 어떤 여자도 거들떠보지 않았다.

“네. 정수민을 만난 이후에도 만나더라고요. 보통 사이는 아닌 것 같았고요.”

차 회장이 정운그룹과의 혼사를 진행하는 걸 알면서도 건욱이 만나는 여자였다. 그 여자에 대한 관심을 그저 흥미라고 볼 수는 없다는 방증이었다.

“어머, 건욱이 그렇게 안 봤는데 결혼은 결혼대로 하고 세컨을 집에 들일 셈인 거라니?”

혜림이 건욱에 대해 말하며 치를 떨었다.

아무리 세컨드를 두는 게 요즘은 비일비재하다지만 지금껏 혼자 선비 행세를 하고 다닌 차건욱의 이중성이 더러워 보였다.

“건욱이 형 생각은 중요하지 않아요. 내가 형의 여자와 약혼한다는 사실이 중요한 거죠.”

“건욱이 정말 그 여자에게 마음이 있다면, 네 약혼 소식을 듣고 가만히 있지 않을 텐데.”

주형이 끼어들었다.

건욱은 결코 자신의 것을 뺏기지 않는 사람이었다. 주형이 W호텔을 매각하려 하자마자 차 회장의 밑으로 개처럼 기어들어 가 W호텔 대표 자리를 거머쥐었다. W호텔이 아버지인 차주태의 손때가 묻은 곳이었기 때문이었다.

“어떻게 할 생각인 게냐?”

“형한테 드리려고요, 내 약혼녀를.”

“!!”

“다만 쉽게 내어 드릴 순 없고, 제 약혼녀를 건드린 파렴치한 정도의 오명은 뒤집어씌워야죠. 할아버지가 무척 좋아하시겠죠?”

민협이 싱긋 웃자 주형이 크게 웃음을 터트렸다.

“크하하! 노친네 얼굴이 볼만하겠는데.”

차 회장은 정략결혼이 예정되어 있던 차주태를 유혹해 임신하여 결혼을 파탄 낸 건욱의 어머니를 무척 싫어했다.

그때부터 차 회장은 여자와 관련된 잡음을 혐오할 정도로 끔찍하게 생각했고 그건 지금까지도 이어져 왔다.

만약 건욱이 민협의 약혼녀를 빼앗았다는 추문이 돌기라도 하면 후계 구도가 주형에게 기우는 건 시간문제였다.

“역시 내 아들이야.”

주형은 답답했던 속이 뻥 뚫리는 것만 같았다.

“그래, 그 여자는 언제 데리고 올 거냐? 오래 끌 것 없다. 오늘 저녁이라도 되는 대로 빨리 데려와.”

“어머 이이는, 벌써요? 그래도 형식은 대충 갖춰야 할 거 아니에요. 준비할 게 얼마나 많은데. 민협아, 오늘 저녁은 안 돼, 알지?”

혜림이 볼멘소리를 해 대자 민협이 혜림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면서도 입을 열었다.

“곧 데리고 오겠습니다.”

“그래, 기다리고 있으마.”

다시 아침 식사가 시작되었다. 좀 전과 다르게 모두의 얼굴에 웃음꽃이 피기 시작했다.

* * *

정원 안에 캄캄한 어둠이 내려앉았다. 아직 아홉 살의 아이가 담대하게 혼자 지날 만큼 밝지 않았지만 건욱에게는 달랐다.

건욱은 아버지와 숨바꼭질을 자주 했기에 이 정도의 어둠은 전혀 무섭지 않았다.

“아빠, 아빠 어딨어?”

오늘 밤에도 어린 건욱과 놀아주기 위해 아버지가 숨바꼭질하기를 자처했다. 이번엔 어린 건욱이 술래였다.

“아빠, 여기 있어?”

캄캄한 어둠 속에서 아버지를 찾는 일은 쉽지 않았지만, 건욱은 포기하지 않았다.

분수와 조경석과 나무 사이사이 곳곳을 살피던 건욱은 옅은 한숨을 쉬었다. 어디에도 아빠가 보이지 않았다.

그때 유일하게 빛을 밝히고 있는 A하우스가 눈에 들어왔다. 회화나무가 있는 곳이었다.

건욱은 빛을 따라 A하우스로 향했다. 거기서 아버지를 찾아보다가 우연히 구석에 떨어져 있는 로봇 피규어를 발견했다.

로봇 피규어에 완전히 정신이 팔린 건욱은 혼자서 그 로봇을 가지고 놀았다. 아버지는 잊은 지 오래였다.

“슈웅―”

로봇을 가지고 혼자 슈퍼 영웅 놀이에 심취했던 건욱은 갑자기 모기에 물렸는지 팔다리가 가려웠다. 혼자 긁적긁적 긁다가 아차!

“맞다! 아빠!”

숨바꼭질 중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아빠 기다릴 텐데.”

황급히 로봇 피규어를 원래 자리에 내려놓고 아버지가 좋아하던 빌라 동으로 뛰어갔다.

A하우스의 불빛이 밝히는 길을 따라 빌라 동으로 향했다. 어머니와 처음 만났던 이곳을 아버지는 무척 좋아했다.

하지만 건욱은 이 건물을 무서워했다. 자신의 몸집보다 너무나 거대한 이곳은 항상 조명이 어두컴컴했고 무언가 으슥한 느낌이 많이 들었다.

정원에 있을 때는 아무리 어두워도 무섭지 않았는데 빌라 동은 꼭 들어갈 때마다 그를 삼킬 것처럼 입을 시커멓게 벌리고 있는 괴물 같았다.

“아빠 여기 있어?”

입구 앞에 선 건욱은 두려움을 꾹꾹 누르면서도 차마 발을 앞으로 떼지 못하고 소리쳤다.

제 목소리가 로비를 통과해 왕왕 울렸다.

“아빠!”

다시 한번 아버지를 불렀다. 아버지에게 지는 건 죽어도 싫지만 차마 들어갈 용기도 나지 않아 그는 아버지가 스스로 걸어 나오길 간절히 바랐다.

그때 머리 위에서 무언가 덜컹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흠칫 놀란 건욱이 고개를 들었다.

열린 창문 사이로 삐져나온 하얀색 커튼이 휘날리고 그 사이로 아버지가 하늘을 날고 있었다.

“찾았다!”

어린 건욱이 소리친 순간 모든 것이 새까만 암흑으로 바뀌었다.

드라마에서 장면이 바뀌듯 어린 건욱은 이제 할아버지와 작은아버지 옆에 서 있었다.

머리부터 발끝까지 검은 옷으로 차려입은 사람들이 그의 앞을 수시로 다녀갔다.

아버지의 사진 앞에 절을 한 뒤 건욱과 맞인사를 하는 사람들 중 건욱이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아버지가 보이지 않았다. 불안했다. 하지만 방 한가운데 놓인 아버지 사진이 있어 조금은 걱정스러운 마음을 누그릴 수 있었다.

얼마나 이곳에 있는지 알 수 없었다. 수많은 사람들 사이 건욱이 넋을 놓고 있었을 때였다. 입구에서 안쪽을 살피는 익숙한 얼굴과 눈이 마주쳤다.

“엄마?”

건욱은 달려 나갔다. 하지만 곧 할아버지한테 붙들렸다. 엄마는 그대로 몸을 돌려 사라졌다.

다시 어둠이 찾아왔다. 어둠 속에는 건욱뿐이었다. 발밑이 내려앉기 시작했다. 어둠 속으로 몸이 빨려 들어갔다.

“거기 아무도 없어요! 도와주세요!”

발버둥을 쳤지만 돌아오는 대답은 없었다. 어둠이 건욱을 삼켜 버리려는 그 순간 맑은 눈을 한 아이가 그의 손을 잡고 끌어올렸다.

유서흔. 그 아이였다.

“헉!”

거친 호흡을 뱉으며 건욱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온몸이 땀으로 젖어 있었다.

그는 숨을 고르며 침대 아래로 내려섰다. 몸이 무거웠다. 끝없이 그를 잡아끌어 심연에 던져 놓는 더러운 기분을 빨리 씻어 내리고 싶었다. 그는 욕실로 들어갔다.

건욱은 차가운 물을 틀었다. 굵은 물줄기가 머리 위로 떨어졌다. 비로소 조금씩 숨이 트이는 느낌이 들었다.

오랜만에 꾸는 악몽이었다. W호텔에 대표로 취임한 이후 매일 빌라 동에서 업무를 보면서도 악몽을 꾼 적은 없었다.

그런데 오랜만에 꾼 그의 악몽에 서흔이 등장했다. 그 맑은 눈을 가지고.

10년 전 그를 그 어둠 속에서 건져 올려 준 것처럼. 손을 잡아 그를 끌어 올렸다.

“보고 싶군.”

요즘 들어 그의 머릿속을 갉아먹는 여자가 너무 보고 싶었다.

건욱은 눈 위로 뚝뚝 떨어지는 물을 거칠게 닦으며 고개를 들었다.

흔들리던 눈빛으로 그를 바라보던 여자의 눈동자가 떠오른다.

갑자기 만날 수 없다고 연락을 했던 여자의 메시지도. 끝끝내 받지 않던 전화도.

건욱은 느리게 눈을 감았다 떴다.

건욱은 샤워기 레버를 잠갔다. 차갑게 식은 몸에서 물이 뚝뚝 바닥으로 떨어졌다.

여자를 만나야겠다.

* * *

“두통약 드릴까요?”

도 실장의 말에 건욱이 고개를 들었다. 무슨 뜻으로 하는 말인지 모르겠다는 표정이었다.

아침부터 지금까지 건욱의 표정이 좋지 못했다. 아니, 표정만 좋지 않은 것이 아니었다.

그는 하루 종일 예민했고 날카로웠다. 지금도 서류 더미에 고개를 파묻혀 미간을 구긴 채였다.

“계속 관자놀이를 누르고 계셔서요. 두통 있으신 거 아닙니까?”

그제야 자신의 모습을 자각한 듯 건욱이 도 실장에게 말했다.

“그럼, 두통약 하나 부탁할게요.”

아침에 일어났을 때부터 기분이 한없이 가라앉는다고 생각했더니 그건 그의 착각이었다.

서흔은 그의 연락을 받지 않았다. 찾아간 <플로라유>에도 그녀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그런데 두세 시간 전, 그는 서흔으로부터 메시지를 받았다. 계좌 번호를 알려 달라는 연락이었다.

간략한 메시지였지만 그 자간 사이의 속뜻은 명확했다. 더 이상의 개인적인 연락은 필요치 않다는 것이었다.

“약과 함께 드실 죽도 같이 준비하겠습니다.”

저녁도 건너뛴 건욱의 눈치를 쓱 살피며 도 실장이 재빠르게 덧붙였다.

“됐습니다.”

“빈속에 약 드시면 좋지 않습니다.”

“아세트아미노펜은 빈속에 먹어도 되지 않습니까.”

“네……. 알겠습니다.”

뭐 하나 허투루 넘어가는 게 없었다. 도 실장은 옅은 한숨을 삼키곤 사무실에서 나갔다.

건욱은 됐다고 말했지만 계속 저렇게 식사를 건너뛰는 것을 차 회장이 알게 되면 불호령이 떨어질 터였다.

도 실장은 레스토랑으로 전화를 걸어 간단한 음식을 주문하다가 의외의 소식을 들었다.

“본부장님.”

다시 사무실로 들어온 도 실장이 입을 열었다.

“지금 레스토랑에 차민협 상무님이 와 계시답니다.”

“그게 보고할 만큼 중요한 일이던가요.”

“그게…….”

건욱이 고개를 들었다.

“약혼녀랑 함께 오셨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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