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화
“난 지금 약혼녀가 필요해요. 나에게 반해서 어떻게든 결혼하고자 야단법석을 떨 여자 말고, 딱 6개월 동안만 열렬히 사랑하는 척하다가 손쉽게 헤어질 수 있는 여자가.”
6개월이면 차건욱 그 새끼를 밟아 죽이고도 남을 시간이었다.
단 한 번도 제 것을 빼앗겨 보지 못했던 차건욱의 일그러진 얼굴도 구경하고, W그룹의 차기 실세 자리를 차지하게 된다면야.
요 며칠 유서흔 때문에 피곤했던 것들도 싹 잊을 수 있었다.
“내 약혼녀로 당신보다 더 적합한 여자는 없어.”
“…….”
“그러니 계약하죠. 당신은 1억을 갚고, 나는 약혼을 해결하고. 어때요, 이제 구미가 당깁니까?”
“말도 안 되는 이야기예요.”
겨우 6개월 동안 약혼녀 행세로 1억이라는 빚을 탕감할 수 있다는 건 당장이라도 허락하고 싶을 만큼 유혹적인 일임은 틀림없었다.
하지만.
인생이란 언제나 받은 만큼 돌려주어야 했다. 1억이라는 큰 액수만큼 민협의 약혼녀 역할은 쉽지 않을 것이다.
아니, 그녀의 상상의 범위를 넘어가는 위험한 일일 수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제안은 감사하지만 저는 처음 말씀드렸다시피 돈을 갚겠습니다.”
서흔의 말에 차민협의 얼굴이 완전히 싸늘해졌다.
이마 위로 선명히 솟은 핏줄이 그의 감정이 무척 좋지 않다는 걸 뜻했지만 서흔은 물러서지 않았다.
“계좌 번호 알려 주세요.”
서흔이 계약서를 그에게 돌려주며 말했다.
* * *
서흔은 내일 있을 A하우스의 행사 준비를 위해 W호텔에서 작업 중이었다.
그녀는 화이트 윈터 콘셉트에 맞춰 화이트 톤 꽃들을 열심히 준비하고 있었다.
그렇게 몸을 쉴 새 없이 움직이면 보통 머릿속이 말끔해지기 마련인데 오늘은 여전히 복잡하기만 했다.
서흔이 끝까지 민협에게 돈을 갚겠다고 했지만, 그는 계약서를 그녀의 품에 안기고 나가 버렸다.
왜 이렇게 복잡하게 돌아가는지.
서흔은 반드시 그에게 1억을 갚아야겠다 생각했지만 민협의 얼굴을 봐선 쉬울 것 같지 않았다.
아니, 1억이라는 돈을 마련하는 것부터 숨이 탁탁 막히는데 그걸 갚겠다고 애걸복걸해야 하다니.
대체 이게 무슨 상황인지 모르겠다.
게다가 며칠이 지나도록 W어패럴 측에선 어떠한 소식도 없었다. 아직 계약서에 도장도 찍지 못했는데 W어패럴과 업무 협업은 제대로 할 수 있을지 알 수 없는 일이었다.
아이러니하게도 그의 1억을 갚기 위해선 그 계약금이 꼭 필요했다.
불안감이 발밑을 잠식했다. 단단한 땅이 가라앉으며 발끝을 끌어당기는 것만 같았다.
그럼에도 서흔은 힘을 냈다. 주변의 상황은 어째 날로 갑갑해져 가지만 오늘 저녁은 건욱을 만나기로 한 날이었다.
W호텔에 들어올 때부터 그를 만난다는 생각에 조금씩 불안했던 마음이 차츰 잠잠해졌다.
시간이 가까워질수록 민협은 머릿속에 사라지고 건욱이 마음 한구석을 뜨겁게 차지했다.
건욱을 떠올리기만 해도 그녀가 짊어지고 있던 짐이 하나둘 가벼워지는 것 같은 착각이 드니 미쳐도 단단히 미쳤다는 생각이 들었다.
[전쟁 통에서도 피는 게 사랑이야.]
다경의 말이 쩌렁쩌렁 울리는 것 같았다.
“수고하셨습니다.”
일을 다 끝낸 서흔과 스태프들이 작업대를 정리했다.
“팀장님! 오늘 저녁에, 요 앞에 새로 생긴 파스타 집 갈 건데 같이 가실래요? 거기 맛이 꽤 괜찮대요.”
“저는 선약이 있어서요. 맛있게들 먹어요.”
“아, 데이트 있으시구나.”
“데이트 아니에요.”
“남자 친구 만나는 거 아니세요?”
“네? 아, 아니요. 남자 친구 아니에요.”
서흔이 손사래를 치면서도 얼굴을 붉히자 스태프들은 확신에 차서 말을 이었다.
“아, 아직 썸남이시구나. 좋겠다, 썸 탈 때 그 간질간질한 게 전 제일 좋더라고요. 그래서 연애가 짧나? 하하.”
스태프가 깔깔거리며 웃었다.
남자 친구라는 말보다 썸남이라는 말에 서흔의 심장이 더욱 불규칙하게 움직였다.
건욱과 사귄다고는 볼 수 없지만 썸이라는 단어에 두 사람 사이가 명확하게 정의되는 것 같았다.
“팀장님, 김 대리님은 언제 오세요? 일 끝나니까 엄청 배고파요.”
“잠깐 회의 중이라고 하셔서 곧 오실 거예요. 조금만 기다리면 될 거예요.”
컨펌을 받아야 일을 완전히 마무리할 수 있기에 김 대리를 기다리며 스태프들이 이런저런 잡담을 나눌 때였다.
“오! 저기 대표 지나가요.”
스태프 한 명이 옆 사람을 치며 작게 소리쳤다.
“어머, 그때 자기가 이야기했던 이 호텔 대표? 와, 장난 아니네.”
“그렇죠? 진짜 잘생겼죠? W호텔 대표, 존잘남으로 완전 유명하다고 했잖아요.”
“그럴 만하네, 인정. 완전 인정!”
서흔은 호들갑 떠는 스태프들에 덩달아 시선을 그쪽으로 돌렸다.
업무 동에서 나온 대표와 그 비서진들이 A하우스를 지나쳐 호텔 쪽으로 걸어가고 있었다.
순간 서흔은 그 중심에 서 있던 건욱과 눈이 마주쳤다. 움찔, 몸이 굳었다. 그 찰나의 순간 가슴에 스산한 바람이 불어왔다.
“W호텔 대표 이름이 차……건욱이에요?”
“네, 팀장님 모르셨어요?”
“……몰랐어요.”
W호텔 대표의 이름이 차건욱인지 몰랐다.
건욱의 이름을 들으면서도 어디서 들어 본 이름이라는 생각만 했지, 그게 대표의 이름이라곤 생각지 못했다.
호텔 대표와 그녀는 거리가 멀어도 너무나 먼, 가까워질 필요가 없는 사람이니까 그녀가 알 필요조차 없었다.
그녀의 놀란 마음을 아는 것처럼 묘해지는 건욱의 시선에 서흔은 수만 가지의 생각이 들었다.
그가 대표였다니 그녀는 왜 몰랐을까.
그녀는 협약 계약서에 떡하니 적혀 있을 그의 이름 석 자를 기억하지 못했을까.
그는 왜 대표라고 밝히지 않았을까. 그는 일부러 대표라는 사실을 숨긴 걸까.
언젠가 말할 생각은 있었을까.
외주 계약직 주제에 올려다볼 수도 없는 남자였는데 이 남자는 왜.
하찮기 짝이 없는 그녀와 밥을 먹고, 집에 데려다주고, 키스를 했을까.
우리 사이에…… 정말 감정이 오갔던가.
“요새 호텔에 잘 안 나온다고 하던데, 오늘은 출근했나 보네요. 대표는 언제 그만두는 건지 모르겠네.”
“그만둬? 왜 대표 잘린 거야?”
“잘리긴요, 차건욱 대표 실적이 얼마나 좋은데. 그게 아니라 완전 파격 승진했어요. 지금 호텔 대표랑 W전자 혁신 전략 기획 본부장 겸임 중이래요.”
“W전자? 그럼 이제 W그룹의 실질적인 경영권 물려받는 거야? 와, 역시 회장 손자라고 바로 줄 타고 올라가네.”
스태프들의 말소리가 조그만 파동이 되어 빙글빙글 돌았다.
건욱의 상황과 서흔의 상황이 합쳐지자 단 하나의 결론이 나왔다.
설마…… 날 가지고 놀았던 걸까.
날 때부터 W그룹의 왕자로 태어난 차건욱이었다. 그런 그가 그녀를 진심으로 대했을 리가 없다.
그와의 만남을 기대하며 설렘을 가득 안았던 열기가 단번에 차갑게 식었다.
서흔은 건욱과 마주친 시선을 피했다.
권력도 없고, 배경도 없고, 가진 거라곤 그저 순수한 얼굴과 순진함밖에 없는 유서흔은 적절한 먹잇감으로 보였을지 몰랐다.
처음엔 마치 그녀에게 관심 없다는 듯이 빚을 갚으라 독촉하더니 어느새 그녀의 입술을 앗아갔다.
마치, 제 아버지가 어머니를 농락했듯이.
서흔은 늘 다짐했다. 결코 엄마와 같은 삶은 살진 않겠다고. 그녀의 삶을 복기하진 않겠다고.
지란이 얼마나 오래 고통의 시간을 보냈는지 아는 유일한 사람이 자신이었기 때문이었다. 결국에는 엄마는 자신뿐만 아니라 서흔까지 고통을 짊어지게 만들었다.
그리고 이 모든 고통의 시작은 아버지였다. 아버지라는 작자는 한 번의 날갯짓으로 지란의 삶에 폭풍을 만들었다. 하지만 그는 책임을 지기는커녕 지란과 서흔을 버렸다.
그렇기에 서흔은 남자를 경계했다. 연애도 그녀에겐 어려웠다. 아버지의 그림자는 그녀를 압박했다.
돈이 많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여자를 제멋대로 휘두르고 함부로 취했다 버리는 족속들은 되도록 멀리했다.
‘그런데도 마음 한구석을 내주다니.’
다른 남자들과 달리 어쩐지 그에게는 쉽게 마음이 열렸다. 건욱이 자신을 숨기고 그녀에게 다가왔을 줄은 꿈에도 상상하지 못한 채.
‘바보는 나였어.’
서흔은 찌릿 아파 오는 심장을 모른 척하며 차라리 다행스러운 일이라 되뇌었다.
아직 마음 한구석밖에 내어주지 않아서.
그에게 완전히 빠져 버리기 전에 그의 실체를 알게 되었으니 이보다 다행스러운 일은 없다고 되뇌었다.
서흔은 스스로를 위안했다.
괜찮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