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화
“유서흔!”
임진수가 얼굴이 새빨개져서 한 손에 종이를 쥐고는 쿵쿵거리며 그녀에게 다가왔다.
“너 이거 뭐야!”
진수가 손에 쥐었던 종이를 그녀의 앞에서 마구 펄럭였다.
“그게 뭔데?”
서흔은 눈살을 찌푸리며 물었다. 그녀에게 제대로 보여 주지도 않으면서 그는 고래고래 소리만 질렀다.
“솔직히 말해! 너 대신 돈 갚은 새끼 누구야? 엉?”
“뭐? 돈을 갚아? 그게 무슨 소리야?”
“너 그 새끼한테 몸 팔았냐?”
치욕스러운 단어에 서흔의 얼굴이 굳었다.
“말조심해. 고소 사항 추가하기 싫으면.”
“내가 너 잡으려고 돈 빌려 줬지, 딴 새끼한테 가라고 돈 빌려 준 줄 알아!”
하지만 진수는 서흔의 말은 들리지 않는지 제 분을 이기지 못하고 테이블을 쾅! 주먹으로 내리쳤다.
“돈은 나한테 빌리고 갚기는 왜 아빠한테 갚는데! 하, 이게 어떤 돈인데! 나 못 참아! 너나 그 새끼나 절대 가만 안 둬!”
진수가 목에 핏대를 잔뜩 세웠다. 종이를 손에 꽉 쥐고 그녀에게 소리를 빽빽 질렀다.
두서없이 말하는 진수의 말을 종합해 보면, 어떤 남자가 서흔이 갚아야 할 엄마의 빚을 대신 갚았다는 것 같았다.
그것 때문에 진수는 분을 이기지 못하고 길길이 날뛰는 것 같았다.
‘혹시 차건욱 씨가?’
하지만 그럴 리가…….
왜 이럴 때 그 남자밖에 떠오르지 않는지. 대체 그가 어떻게 그녀의 사정을 알고 돈을 갚는다고.
말이 되지 않았다. 하지만 그녀의 머릿속에 떠오르는 사람은 건욱밖에 없었다.
“아악! 이건 무효야! 무효!”
제 성질을 이기지 못한 진수가 종이를 양손으로 잡고 갈기갈기 찢더니 발로 쿵쿵거리며 밟아 댔다.
“임진수, 난 네가 무슨 말 하는지 잘 모르겠으니까. 그만하고 나가. 지금 당장 꺼지지 않으면 경찰 부를 거야.”
참는 데도 한도가 있었다. 매번 가게 와서 난동을 부리는 진수 때문에 골치가 아팠다.
“도움이 필요합니까.”
그때 익숙한 목소리가 들렸다.
“상무님?”
갑자기 연락도 없이 나타난 민협에 서흔은 이게 무슨 일인가 싶었다.
진수를 상대하는 것만으로도 머리가 아플 지경이었는데 차민협까지. 한숨이 나왔다.
“도움이 필요해 보이는데.”
민협이 진수를 무척이나 불편한 눈빛으로 머리부터 발끝까지 훑어보았다.
어쩜 이렇게 양아치처럼 구는지.
입고 있는 옷도 그랬다. 아무리 저가의 명품이라지만 스타일링 하는 꼬락서니를 보니 무척 격 떨어지는 놈이었다.
“아니, 괜찮아요. 도움 필요 없어요.”
서흔이 마른침을 삼키며 민협에게 말하고는 진수를 향해 돌아섰다.
“임진수, 마지막 경고야. 당장 나가.”
“카악, 퉤! 이 새낀 또 뭐야?”
서흔의 말을 무시하며 진수가 매장 바닥에 침을 뱉었다. 그는 민협 앞에 얼굴을 들이대더니 희번덕거리는 눈으로 민협을 살폈다.
지난번 그 남자만으로 모자랐나.
또 새로운 새끼가 나타나니 진수는 열이 뻗쳐올랐다.
“그건 네가 알 거 없고. 그만 시끄럽게 하고 꺼지지.”
민협이 귀찮다는 듯이 진수의 얼굴 앞에 손을 휘저었다.
“이 썅! 요새 새끼들은 왜 이렇게 시건방져! 야, 이 새끼야. 말 길게 안 하냐.”
진수가 위협적으로 그에게 달려들었다. 그러자 갑자기 매장 안으로 검은 정장 무리들이 들이닥쳤다.
진수는 민협의 털끝 하나 건드리지 못한 채 단번에 제압당했다.
“이 새끼들은 또 뭐야? 이거 안 놔!”
진수가 침을 튀기며 발버둥 쳤지만 우락부락한 덩치들의 힘에는 역부족이었다. 그는 질질 매장 밖으로 끌려 나갔다.
쾅, 하는 소리와 함께 매장 문이 닫히고 갑자기 조용해졌다.
“이제 조용해졌네요. 임진수가 원래 이렇게 괴롭힙니까. 예상했던 것보다 너무 저급하네.”
민협이 이제는 시야에서 완전히 사라진 진수를 입에 올렸다.
“임진수를 어떻게 아세요?”
서흔이 미간을 찌푸렸다.
민협은 마치, 진수에 대해 알고 있는 사람처럼 이야기했다. 단 한 번도 서로 마주친 적 없고, 서흔이 언급한 적도 없는 진수에 대해서.
“뭐, 어쩌다 보니 알게 됐네요.”
민협은 씩 웃었다. 싱글벙글한 미소가 걸린 그가 딱딱히 굳은 서흔을 보았다.
“표정이 왜 그래요? 이제 임진수와 함께 빚도 사라진 마당에.”
“……빚이요?”
빚을 들먹이는 민협의 모습에 서흔의 등줄기가 서늘해졌다. 팔에도 소름이 오소소 돋았다. 진수를 안다고 했을 때부터 불안하게 뛰던 심장이 요동쳤다.
“자, 내가 특별히 준비한 선물입니다.”
민협이 웃음을 참지 못하며 품 안에서 종이 한 장을 꺼내 내밀었다.
“이게…… 뭐죠?”
“나한테 묻지 말고 직접 확인해 봐요.”
그가 내민 것을 보지 않고 가만히 서 있는 서흔에, 민협은 종이를 쫙 펴서 그녀의 눈앞에 내밀었다.
그것은 유지란의 빚을 유서흔이 대신 변제했다는 확인서였다. 내용을 확인한 서흔은 눈을 꽉 감았다.
갑자기 하루아침에 지란이 갚아야 할 1억이 사라졌다.
“이걸 왜…… 상무님께서 가지고 계신 거죠?”
“내가 서흔 씨의 빚을 갚았으니까요.”
서흔은 몸이 덜덜 떨렸다.
무언가 잘못됐다. 협업 제안과 고백, 1억을 대신 변제하기까지. 그녀는 민협을 잘못 봐도 한참을 잘못 봤다.
그는 그저 불편한 사람이 아니었다. 그녀는 상상도 할 수 없는 무서운 사람이었다.
“이제 나와 만나 볼 마음이 들겠군요.”
서흔은 민협이 놓은 덫에 단단히 걸렸다는 생각이 들었다.
“상무님이 어떻게 제 빚을 알게 되신 거죠? 아니, 왜 그 빚을 대신 갚으신 거죠?”
“우연히 유서흔 씨 빚에 대해 알게 됐고 도와주고 싶었습니다.”
“우연히요?”
전혀 우연으로 느껴지지 않는 말투였다. 그가 의도적으로 그녀의 뒷조사를 했다는 건 누구라도 모를 수 없을 것 같았다.
“그렇다 해도 상무님이 도와주실 일은 아니었습니다.”
“고맙다는 말을 참 이상하게도 하네요.”
고맙지 않았다. 아무리 그 빚을 갚는 게 막막하다 해도 이런 식으로 변제할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괜한 자존심 세울 필요 없습니다. 내가 당신에게 선물을 주었고 당신은 대신 나와 만나면 간단한 일입니다.”
왜 이렇게 말이 길지?
변제 확인서 줬으니 금방 끝이 날 일이었다. 제가 아는 여자들이었다면 이미 고맙다고 달려와 품에 안겨 옷부터 벗었을 텐데.
차건욱 이 새끼는 뭐 이런 여자를 만나 이렇게 그를 피곤하게 만드는지.
민협은 속으로 혀를 끌끌 찼다.
“상무님이 도움을 요청한 적 없는 제 빚을 대신 갚아 주셨다는 이유로, 제가 상무님을 만나야 하나요?”
이건 돈에 그녀를 파는 것과 다를 바가 없었다. 서흔은 비참한 마음을 꾹 누르며 입을 열었다.
“상무님이 저 대신 변제하신 그 돈, 다시 갚을게요.”
“그러니까 나랑 만날 마음은 전혀 없으시다?”
“네. 그럴 생각 없습니다.”
그렇게 나오시겠다, 이거지.
민협은 비릿하게 입술을 끌어 올렸다.
“합격.”
그게 짝, 짝, 짝 크게 박수를 쳤다.
“합격이라니, 무슨 뜻이죠?”
이건 또 뭔가 싶어 서흔이 바짝 긴장했다. 지금껏 민협의 행동은 그녀의 예상 범위 안에 들어온 적이 없었다.
“나랑 만날 마음은 없고, 돈은 갚고 싶고. 그 마음 변함없습니까?”
“물론이에요.”
“그럼 계약 하나 더 합시다.”
민협은 제2의 대안까지 준비해 온 스스로를 칭찬하며 새 계약서를 하나 내밀었다.
사실 최상의 시나리오는 이 여자가 자신에게 홀딱 빠진 상태에서 건욱과 양다리를 걸치는 것이었지만.
그건 아무래도 힘들어 보였으니, 돈과 법으로 옭아매는 것도 나쁘지 않은 방법이었다. 거치적거리지도 않을 테고.
“약혼 계약? 이게 뭐죠?”
“말 그대로 6개월 동안의 계약 약혼을 하는 겁니다.”
서흔은 그가 내민 계약서를 훑어보았다. 1억을 변제하는 대신 민협의 약혼녀로 6개월간 지내는 것이었다.
“아무 조건 없이 6개월 후 얌전히 헤어져 주면 계약은 깔끔히 종료됩니다. 1억 전액 상환으로 마무리되는 거죠.”
“…….”
서흔은 찬찬히 민협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그가 무슨 꿍꿍이가 있는 건지 궁금했다.
여자가 넘치면 넘쳤지 모자라진 않을 남자로 보였다. 그런 그가 그녀에게 약혼을 제안한다는 것 자체가 의심스러웠다.
무엇보다도 지금껏 일련의 민협의 행동을 보았을 때 더욱 그랬다.
급작스러운 협업 제안과 함께 첫눈에 반했다는 남자의 말, 그리고 빚 변제와 계약 약혼. 이 모든 게 어찌 순수해 보일 수 있을까.
“굳이 저와 이런 약혼을 하시려는 이유가 뭔가요?”
민협이 그녀의 물음에 제대로 된 답을 해 줄 것 같진 않았지만 그래도 묻지 않을 수 없었다.
대체, 왜 그녀에게 그러는 것인지.
“유서흔 씨 같은 여자는 처음이야. 다들 내 눈길 한 번 받아 보려 난리였는데, 당신은 나에게 단 한 톨의 관심도 없단 말이야.”
민협은 담담하게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