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화
서흔은 저도 모르게 건욱을 떠올렸다.
가장 먼저 커다란 키와 떡 벌어진 어깨가 생각났다. 까치발을 들어야만 그의 턱에 입술이 닿을 듯한 그녀에게 그는 항상 먼저 고개를 숙였다.
서흔의 눈 밑이 발그레해졌다. 그를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심장이 두근거렸다. 마치 그를 처음 보았을 때처럼.
그는 처음부터 그녀의 심장을 뛰게 만들었다. 계속 부정했지만 서흔은 처음 건욱을 만났을 때의 그 오묘했던 마음을 잊지 못했다.
서흔을 바라보던 민협이 몇 번 눈을 깜빡이더니 픽 웃었다.
“아 그래요? 너무 뼈아픈 사실을 직설적으로 말씀하시네.”
그는 정말 상처라도 받은 것처럼 심장에 손을 대며 엄살을 피워 댔지만 정작 눈빛은 무감했다.
“서흔 씨한테 좋아하는 사람이 있어도 밥 한 끼 정도는 같이 할 수 있지 않습니까?”
“죄송합니다.”
서흔이 꾸벅 고개를 숙였다. 밥 한 끼로 끝나지 않을 것 같았다. 그러니 시작조차 하지 않는 것이 좋은 방법이었다.
“서흔 씨가 이렇게 단호하니 어쩔 수 없죠. 밥은 다음에 먹는 걸로 해야겠군요.”
대답은 했지만 민협은 그녀의 뜻을 받아들이는 것 같지 않았다. 서흔은 옅은 한숨을 삼켰다.
바로 떠날 줄 알았던 민협은 침묵을 지키며 서흔을 바라보았다.
무슨 생각을 하는지 전혀 알 수 없는 눈동자를 피할 길 없이 마주하는 시간이 길어지자 괜히 등골이 오싹했다.
등골이 오싹했던 기분은 서흔만의 것이었던 듯, 민협은 예의 그 미소가 걸린 채였다.
“오늘은 이만 가 보도록 하죠.”
“조심히 들어가세요.”
서흔의 인사를 뒤로한 채 민협이 떠났다.
* * *
“어서 오……세요.”
문이 딸랑이는 소리에 반사적으로 인사말을 건네던 서흔이 멈칫했다. 민협이었다.
“오늘 또 뵙네요, 차민협 상무님.”
분명히 거절을 했음에도 불구하고 미팅을 한 다음 날부터 그야말로 민협은 <플로라유>로 출근 도장을 찍기 시작했다.
처음엔 마카롱을 사 왔고, 그다음은 도넛을, 언젠가는 푸딩을, 오늘은.
“초콜릿입니다.”
민협이 고급스럽게 포장된 박스 하나를 테이블 위에 올렸다.
“디저트는 이제 그만 사 와도 될 것 같아요.”
“<플로라유>가 꽃집이라 많이 아쉽습니다. 아니었다면 꽃을 사 왔을 텐데요.”
꽃향기 가득한 매장 안에서 민협이 눈을 찡긋거렸다.
“바쁘실 텐데 이렇게 자주 오셔도 돼요?”
“감동했다는 뜻입니까.”
부담스럽다는 뜻이었는데.
“아니면 고맙다는 말의 에두른 표현인가.”
빙글거리며 말하는 민협은 그가 원하는 답을 제시했지만 서흔은 말없이 가만히 서 있었다.
쉽지 않은 여자였다.
날 거절한 여자는 네가 처음이라는 생각에 오히려 애달아 어쩔 줄 몰라 하는 놈도 있겠지만 민협은 속에서 쓴물이 올라오는 기분이었다.
이런 하찮은 여자에게 시간을 할애하는 것 자체로 짜증이 치밀어 올랐다.
그럼에도 꾹 참았다. 마지막에 웃게 될 자신과 아버지를 꿈꾸며 이 정도 고행쯤은 참아 넘길 자신이 있었다.
“……차민협 상무님.”
“네.”
“앞으로는 이렇게 오지 않으셔도 돼요.”
“부담 느낄 거 없습니다. 내가 하고 싶어서 하는 겁니다. 아니면 혹시 디저트를 안 좋아하나? 좋아하는 건 꽃뿐이에요?”
민협을 거절했음에도 불구하고 그는 계속 빙글빙글 말을 돌려가며 느물거렸다.
민협의 시선이 불편해진 서흔이 무슨 말이라도 하려고 할 때 그가 입을 열었다.
“디저트는, 서흔 씨의 말대로 그만 사 오겠습니다.”
<플로라유>를 나선 민협은 대기하고 있던 차에 올랐다. 그는 짜증스럽게 넥타이를 아래로 끌어내렸다.
며칠, 아니 계속 부딪치면 금세 넘어올 거라 생각했다.
저런 소형 업체가 쉽사리 따낼 수 없는 대형 프로젝트를 먼저 제안했고, 무엇보다도 그가 워낙에 여자들에게 인기가 많았다.
차건욱에 비해 어디 하나 뒤처지는 데가 없는, 아니 오히려 이성적 호감을 사는 데 탁월한 능력이 있는 그였으니 유서흔, 저런 여자쯤은 손쉽게 함락할 수 있을 거라 생각했다.
“회사로 모실까요.”
조수석에 앉아 있던 박 대리가 묻자 민협이 싸늘한 눈초리를 그를 쳐다보았다.
“박 대리, 나와 일한 지 얼마나 됐습니까. 아직도 내가 일일이 말해야 압니까.”
“죄송합니다. 출발하겠습니다.”
잔뜩 어깨를 옹송그린 운전기사를 보며 고개를 끄덕이자 차가 출발했다.
민협은 제 마음만큼이나 갑갑한 도로를 보며 화를 삭이려 애썼지만 쉽지 않았다.
유서흔이고 뭐고 당장 때려치우고 싶었다. 하지만 그 여자를 놓지 못하고 있는 그의 처지가 더욱 화를 불러일으켰다.
‘차건욱, 그 새끼만 없었어도……!’
죽어 사라진 큰아버지처럼 그 새끼도 눈앞에서 사라지면 좋으련만. 차건욱은 망령처럼 그의 삶에 어두운 그림자를 드리우고 있었다.
“저…… 상무님.”
“무슨 일입니까.”
잔뜩 신경이 날카로워진 민협에 박 대리가 눈치를 보며 입을 열었다.
“유서흔 씨에 관해 알아낸 새로운 사실이 하나 있습니다.”
실은 누락이 맞는 말이었지만 사실 그대로 말했다가는 불똥이 모두 그에게 튈 터였다. 그만큼 민협의 심기는 불편해 보였다.
박 대리는 조심스럽게 서류를 건넸다. 민협이 서류를 휘리릭 넘기며 빠르게 내용을 읽어 내려갔다.
“왜 처음에는 이 내용이 없었던 겁니까.”
“그게 유서흔 씨가 직접적으로 관련된 일이 아니다 보니 조금 시간이 걸렸다고 합니다.”
민협은 차용증 복사본에 떡하니 쓰인 ‘1억’이라는 금액에 검지를 톡톡 두드렸다.
“지금 유지란 씨는 어디 있는 겁니까. 스스로 갚을 가능성은 없는 겁니까.”
“네, 지금 완전히 연락을 두절한 채 강원도에서 잠적 중입니다.”
“흠, 그래요. 비공식적으로 유용할 수 있는 현금이 얼마인지 확인해 보세요.”
“네, 알겠습니다.”
민협은 다 본 서류를 덮어 옆자리에 휙 던졌다.
하, 이렇게 쉬운 길을 두고 가게를 들락거리며 개고생을 했다니.
두고두고 그 값을 톡톡히 받아 내야겠다고 생각하며 민협이 피식 웃었다.
* * *
건욱을 만나지 못한 지 며칠이 지났다. 주기적으로 W호텔로 들어갔지만 그와 우연히 마주치는 일은 없었다.
그의 연락처를 알고 있으니, 먼저 연락해 볼까 싶다가도 이렇게 연락이 없는 건 그녀에 대한 감정이 사라진 게 아닌가라는 생각이 들었다.
아무리 바빠도 남자는 관심 있는 여자에게 잠을 줄여서라도 먼저 연락하는 게 아닌가.
연애 경험이 적은 서흔은 다경에게 답답한 심정을 털어놓았다. 그녀는 단박에 결론을 내놓았다.
그 남자는 그녀에게 관심이 떨어진 거라고 했다. 그녀는 커다란 어장에 갇혔던 물고기1의 역할에 지나지 않았다고.
그의 입술은 정말 뜨거웠는데…….
헤어지기 아쉬운 연인처럼 그녀의 입술을 머금었다 놓아주면서도 또다시 끌어안아 강렬히 빨아 당기던 숨결이 아직도 생생했다.
“빚은 갚아야 하니까.”
다경의 말이 사실일지 몰라 망설여지긴 했지만 어쨌든 서흔은 그에게 빚이 있었다.
밥 대신 현금으로 갚기 위해선 그와의 합의가 필요했다.
서흔은 그에게 전화를 걸었다. 뚜르르르, 신호음이 반복되는 수화기에 괜히 전화를 걸었나 후회가 짙은 한숨 아래 깔렸다.
-유서흔 씨.
전화를 받을 수 없다는 안내가 나오기 직전이었다. 아무래도 통화가 어려운 것 같아 휴대폰을 내려놓으려던 찰나, 건욱의 목소리가 들렸다.
-아무래도 유서흔 씨는 성실한 채무자가 될 가능성은 없어 보이는군요.
묵직한 목소리에 심장이 두근두근 기분 좋게 뛰었다.
“잘 지내셨어요?”
-잠깐만.
갑자기 그가 수화기를 막고 다른 누군가에게 언뜻 무언가를 전달하는 소리가 났다.
-이제 됐습니다.
다시 들려온 그의 목소리 주변엔 어떠한 소음도 들리지 않았다.
“많이 바쁘신가 봐요?”
혹시 제게 관심이 줄어든 건 아니죠, 라는 물음 대신 자연스럽게 근황을 묻는 대화가 이어졌다.
-언제나 바쁩니다. 이번엔 출장도 좀 다녀왔고.
“네.”
출장이라는 단어에 지금껏 그녀를 괴롭혔던 어장이니, 물고기니, 잘 알지 못했던 다경의 조언들이 일시에 싹 사라졌다.
“혹시 오늘 저녁에 시간 있으세요? 만나서 이야기를 좀 하면 좋을 것 같아서요.”
슈트 값을 이야기하기 위함인데도 그를 만난다는 생각만으로도 벌써 긴장감이 일었다.
-지금은 좀 어렵습니다. 마무리할 일이 좀 있어서요.
“그렇군요…….”
-목요일은 잠깐 될 것 같은데.
“네. 그럼 그때 뵐까요?”
-그때 보죠.
갑자기 누군가 그를 찾는지 막힌 소리 중간중간 그의 목소리가 언뜻 들렸다.
-이제 끊어야겠습니다. 그때 봅시다.
“네.”
서흔은 전화를 끊었다. 짧은 통화에 휴대폰은 뜨거워지지 않았는데도 그녀의 얼굴엔 열감이 느껴졌다.
그때 갑자기 쾅 하고 매장 문이 활짝 열렸다. 서흔은 큰소리로 그녀를 부르는 목소리에 깜짝 놀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