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화
“?!”
서흔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대기업에서 제안한 작은 꽃가게와의 협업이, 그것도 직접 상무가 하는 제안이 조금 낯설었지만 기업마다 분위기가 다를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녀가 기대한 건 W어패럴만의 자유로운 기업 분위기에 대한 설명이었지 밑도 끝도 없는 고백이 아니었다.
“그래서 말인데, 나랑 만나 볼 생각 없습니까?”
민협이 미소를 지었다. 가슴을 뛰게 할 만큼 달콤한 미소였지만 서흔은 당황스럽기만 했다.
“저는…….”
어떻게 거절해야 할지 입 안의 말들이 맴돌고 나오질 않았다.
“당장 대답하지 않아도 됩니다.”
민협의 말에 서흔은 입을 다물었다.
“어차피 우리 만날 일 많을 텐데. 천천히 생각해 봐요.”
자신만만한 민협의 미소가 어쩐지 불안한 가운데 그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 * *
미팅을 끝내고 <플로라유>로 돌아온 서흔은 옅은 한숨을 내쉬었다.
“왜 오자마자 한숨이야?”
매장을 보고 있던 다경이 걱정스럽게 서흔을 바라보았다.
“W어패럴이 일 같이하자고 미팅하자고 한 거 아니야?”
“맞아.”
“그럼 싱글벙글 웃으면서 와야지. 왜, 일이 별로야?”
“일은 하게 되면 재미있을 것 같아.”
작업대 안으로 들어간 서흔은 간단히 패션쇼 컬래버 내용을 다경에게 설명했다.
“그럼? 계약 조건이 별로였어?”
“아니, 조건도 나쁘지 않아.”
“그럼 뭐가 문제야?”
업무 제안은 무척 좋았다. 문제는 그 제안을 한 사람한테 있었다.
서흔은 이게 정말 일어났던 일인지, 제가 들었던 말이 사실인지 아닌지조차 의심스러워하며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차민협 상무가 나한테 관심이 있대. 만나 보자고 했어.”
서흔의 말을 들은 다경이 놀라 소리쳤다.
“어머, 그 남자 미친 거 아니니? 오늘 처음 만난 사람 아니야?”
“맞아. 오늘 처음 봤어.”
“그런데.”
“첫눈에 반했대.”
다경은 그녀가 고백받은 것처럼 혼란스러워했다.
“첫눈에 반했다고? 하, 웃긴다. 믿을 소릴 해야지.”
다경이 단호하게 말했다. 첫눈에 반했다는 꿈같은 이야기를 믿기엔 그녀들은 세상 풍파를 매섭고 독하게 뚫고 살아왔다.
“그 사람 남자로서 너무 매력 없는 거 아니니? 그래서 아무한테나 첫눈에 반했다고 습관처럼 이야기하는?”
서흔은 휴대폰으로 차민협을 검색해 보여 줬다. 다경은 믿을 수 없다는 듯이 두 손으로 입을 가렸다.
정말이지 화면 속의 남자는 배우 뺨칠 정도로 눈을 정화시켜 주는 인물이었다.
그러니까 더욱 의문이 커졌다. 이런 남자가 뭐가 아쉬워서 초면에 고백을 한단 말인가.
“그럼 그냥 돌아이 아닐까? 눈 봤어, 눈? 이상해 보이지 않았어? 똘기가 보인다든가.”
“아니, 전혀 이상해 보이지 않았어. 눈빛도 날카롭다 못해 베이겠던데.”
“그럼 뭐야. 왜 뜬금포로 고백을 해? 일 제안하러 와서. 그게 말이 되니? 그것도 초면에.”
“그러니까.”
서흔이 한숨을 푹 쉬었다. 다경이도 한숨을 얹었다. 협업 제안에 마냥 기뻐하기에는 걱정스러웠다.
“이 일 같이해도 되겠어?”
“안 하면?”
서흔의 입장에서는 무조건 해야 하는 일이었다. 이 협업은 지금 당장 눈앞의 불을 조금이라도 끌 수 있는 천우의 기회였다.
게다가 이 프로젝트를 성공시키면 서흔의 커리어에도 큰 도움이 될 터였다. 그녀로서는 절대로 놓치고 싶지 않은 일이었다.
“꼭 해야지.”
다경도 서흔이 꼭 잡아야 하는 일이란 걸 모르지는 않았다. 하지만…….
두 사람 사이에 침묵이 가라앉았다. 점점 심각해지는 다경의 표정에 서흔이 분위기를 전환시키기 위해 입을 열었다.
이제야 깨달았다는 듯이.
“아무래도 농담 같아.”
“그치? 그래. 농담이겠지. 초면이라 분위기 딱딱할까 봐 농담한 것 같다. 아하하하.”
그제야 다경이 표정을 풀며 뚝딱거렸다.
“장난이거나 진심일 리 없는 그런 말에 우리가 너무 고민하는 것도 우습다. 아하하하. 그치?”
다경도 서흔의 말을 받으며 심각해지는 분위기를 풀어냈다.
이 작은 가게를 오픈하면서부터, 아니 혼자 자립하기 시작하면서부터 문제는 늘 있어 왔다.
서흔과 다경은 그럴 때마다 심각하게 문제에 몰입하기보다는 가벼운 마음으로 긍정적인 면을 보면서 문제를 해결하려 노력해 왔다.
“농담이었던 거야. 만약에 또 물어보면 가볍게 마음 상하지 않게 대답하면 될 것 같아. 그것 때문에 일까지 엎어 버리거나 일할 때 불편하게 하진 않을 거야.”
다경이 희망을 다지며 말했다.
“응.”
서흔은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지만 잘 모르겠다 생각했다.
남자는 이제껏 무슨 일이든 자신의 뜻대로 되지 않았던 적이 없었던 사람 같아 보였다.
설명하기는 좀 어렵지만 어떻게든 그의 뜻대로 하게 만들 것 같은 집요함이 보였다.
그 눈에 보이는 집요함이 마음 한구석을 꺼림칙하게 만들었다.
마지막 헤어질 때 자신만만했던 그 표정과 처음 서흔이 매장에서 돌아가시라 말했을 때 움찔했던 그 표정이 자꾸 마음에 걸렸다.
하지만 절대 포기할 수 없었다. 이 일은 서흔에게 한 줄기 빛 같았다.
빚 때문에 숨통이 막히는 기분이었는데 이번 계약으로 조금씩 갚을 수 있다는 희망이 생겼다.
“다경아, 나 이 계약 절대 포기 못 해. 꼭 따낼 거야. 일할 때 불편한 건 언제든, 어떤 현장이든 일어날 수 있는 일이고. 나 충분히 견딜 수 있어. 일만 할 수 있다면.”
“그런 마음가짐 좋아.”
서흔과 다경은 손을 맞잡았다. 다시 희망이 샘솟는 것 같았다. 그때 다경이 손을 빼내며 서흔에게 말했다.
“그런데 말이야, 유 사장. 당장 곧 졸업 시즌 시작되고 뒤이어 밸런타인데이인 건 알고 있지?”
“알지, 당연히.”
<플로라유>는 1년 중 2월과 5월, 가정의 달이 가장 바쁜 때였다.
“거기다가 지금 W호텔 행사 건도 있고, W어패럴도 새로 계약을 진행하게 되면. 우리 유 사장님 파트타임 직원 저 하나로 되시겠어요?”
“그러네요. 단기 알바를 구해야겠네요.”
다행이었다. 생업과 관련된 눈앞의 일들이 산더미처럼 쌓여 있는 것이 이렇게 기쁠 줄 몰랐다.
바쁘게 시즌을 보내다 보면 빚을 갚게 될 돌파구도 보이게 되지 않을까.
“네네, 사장님. 단기 알바는 제가 알아서 구해 오도록 할게요.”
“네, 부탁해요. 직원님.”
서흔은 다경과의 대화를 끝내고 작업용 앞치마를 둘렀다. 일상에 집중해야 할 때였다.
* * *
며칠 뒤, 서흔은 민협에게 연락했다. 고민은 깊었지만 길진 않았다. 답은 나와 있었고 그녀가 할 말은 정해져 있었다.
다시 마주 앉은 두 사람 사이에 보이지 않는 긴장감이 흘렀다. 민협이 먼저 입을 열었다.
“업무 협약 제안은 생각해 봤습니까.”
“네, W어패럴과 같이 일해 보고 싶어요.”
바로 비즈니스 이야기를 꺼내자 서흔의 표정이 눈에 띄게 밝아졌다.
“다만, 몇 가지 조정을 하고 싶은 내용이 있는데 혹시 가능할까요?”
이어진 서흔의 말에 민협은 어이가 없어 웃었다.
이 구멍가게에 대기업이 손을 내밀었으면 바닥에 무릎을 꿇고 감사하다고 발등에 입이라도 맞춰야 하는 게 아닌가.
제 주제도 모르고 날뛰는 것이 차건욱과 닮아 보이기도 했다.
“그건 박 대리가 도와줄 겁니다.”
민협이 밖에 대기하고 있던 남자에게 손짓하자 그가 들어왔다. 지난번 카페에서 보았던 남자였다.
“박 대리님, 유서흔 씨가 조정하고 싶은 것이 있다고 하네요. 미팅 한번 잡으시죠.”
“예, 알겠습니다. 연락드리겠습니다.”
“네, 감사합니다.”
박 대리가 명함을 서흔에게 주자 서흔도 박 대리에게 그녀의 명함을 주었다. 박 대리는 그녀에게 명함을 받고 다시 매장을 나갔다.
“그럼, 계약은 그렇게 진행하는 걸로 하고 유서흔 씨, 저녁 같이 먹을까요?”
“아, 죄송합니다. 제가 오늘 저녁엔 선약이 있어요.”
“오늘 저녁이라곤 안 했는데요.”
서흔의 대답에 민협이 빙글 웃으며 답했다.
“언제 저녁 같이 먹을 수 있습니까.”
아직 그의 거짓 고백에 대해 대답을 듣지 못했지만, 그는 반드시 이 여자를 손에 넣어야 했다.
“……차민협 상무님.”
“네.”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그 말씀하셨던 것에 대해 답할게요.”
직접적인 단어를 피했지만 민협은 그녀가 그의 거짓 고백에 대해 답하려는 것을 깨달았다.
“부담 느낄 거 없습니다. 천천히 대답해도 됩니다.”
그는 답을 알고 있는 것 같음에도 계속 빙글빙글 말을 돌려가며 느물거렸다.
직접적인 확인 사살을 하지 않으면 민협은 원하는 대로 그녀를 끌고 갈 것 같았다.
“상무님, 단도직입적으로 말씀드릴게요.”
더 이상 가만두고 볼 수 없다는 생각에 서흔이 입을 열었다.
“저는 사실 좋아하는 남자가 있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