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화
“그만 일어나야겠어요.”
서흔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 모양새가 꼭 호랑이에게 잡힐까 봐 겁먹고 도망치는 토끼 같아 건욱은 짧게 웃음을 흘렸다.
칵테일 바에서 나온 두 사람은 건욱의 차 뒷좌석에 나란히 앉았다.
‘어색해.’
어쩌다가 이 차에 타고 있는 걸까. 조금만 걸어 나가면 있는 지하철을 타고 집으로 돌아갈 생각이었는데.
잠시 동안 기억이 사라진 것 같은 착각이 일었다.
대리운전 기사를 부른 건욱은 당연하듯 그녀를 자신의 차로 이끌었다. 얼결에 서흔은 건욱과 함께 차에 올랐고 안전벨트를 매자 차가 출발했다.
하지만 어색한 건 그녀뿐인지 건욱은 편안해 보였다.
계약직이라는 동질감을 느꼈던 것이 무색할 만큼 건욱의 차는 고급 세단이었다.
서흔은 괜히 신경이 곤두섰다. 좁은 공간이라 그런지 알코올 향이 섞인 그의 숨이 코끝을 맴돌았다.
그녀는 눈을 느리게 감았다 떴다.
“유서흔.”
건욱이 손을 뻗어 그녀의 손등을 톡 건드렸다. 손등에 닿은 건 기다린 손가락뿐이었는데도 솜털이 바르르 떨렸다.
긴장하지 말라는 걸까.
서흔이 그에게 시선을 올리자 손가락 사이사이 그의 기다린 손가락이 얽혀 들었다.
느리게 훑는 그 묘한 감각이 온몸을 스르륵 타고 돌다가 목까지 올라왔다.
무언가 뜨거운 것을 삼킨 것처럼 홧홧했다. 그 찌릿한 감각에 서흔은 눈을 질끈 감았다.
“도착했습니다.”
어느새 집 근처에 도착했다.
“기사님, 잠시만 기다려 주시죠.”
“네, 알겠습니다.”
대리운전 기사의 대답에 건욱이 그의 안전벨트를 풀자 서흔 역시 안전벨트를 풀고 차에서 내렸다.
“데려다주셔서 감사해요.”
서흔은 꾸벅 고개를 숙였다. 저 골목을 돌아가면 바로 그녀가 사는 원룸이 나온다.
“조심히 가세요.”
그녀의 인사에도 그는 말이 없다. 조용한 시선에 시간마저도 멈추는 것 같았다.
건욱이 서흔의 볼을 손가락으로 쓸었다. 그녀의 속눈썹이 파르르 떨렸다. 고개를 기울이나 싶더니 이내 그의 얼굴이 가까워졌다.
서흔은 자신도 모르게 눈을 감았다. 겹쳐진 입술이 뜨거웠다. 쌉싸름한 알코올과 함께 짜릿한 열기가 입 안 곳곳을 달궜다.
건욱이 그녀의 목덜미를 쓰다듬었다. 부드럽게 맞닿았던 처음과 달리 거칠게 입 안을 헤집었다.
서흔은 그녀의 영혼까지 쭉 빨아들일 것 같은 강렬한 흡입에 까치발을 들어야 했다.
무자비하게 쏟아지는 숨결만큼 그도 그녀와 헤어지기 싫다는 뜻일까.
서흔은 전신으로 퍼지는 강렬한 열기를 느끼며 그를 꼭 끌어안았다.
* * *
가게 문이 열리고 고급 슈트를 입은 키가 큰 남자가 들어왔다.
“어서 오세요.”
서흔이 작업 중이던 꽃바구니를 밀어 두고 손님을 맞았다.
“찾으시는 게 있으세요?”
보통 손님들은 가게 안을 휘 둘러보며 원하는 꽃이나 화분이 있는지 확인했다.
하지만 남자는 곧장 서흔에게 다가왔다.
“유서흔 씨?”
“무슨 일이시죠?”
낯선 남자였다. 꽃을 사러 온 것 같지도 않았다. 게다가 그녀의 이름을 알고 있었다.
서흔은 경계의 눈초리로 남자를 바라보았다. 지란이 진수에게 돈을 빌린 이후, 낯선 사람이 그녀를 찾으면 심장이 벌렁거렸다.
지란이 또 다른 사고를 친 게 아닌가 싶은 불안감이 일었다.
“이야기를 나눴으면 하는데……. 잠시 시간 좀 내주실 수 있겠습니까?”
“누구신지, 무슨 용건으로 절 찾아오신 건지 먼저 말씀해 주시면 좋을 것 같은데요.”
남자는 그에게 경계심을 바짝 세우는 서흔을 보며 명함을 하나 꺼냈다.
“소개가 늦었군요.”
그가 건넨 명함에는 ‘W어패럴 상무 차민협’이라 적혀 있었다.
“차민협이라고 합니다. 이곳에서 대화를 하긴 좀 어려울 것 같은데.”
민협이 가게 안을 휘 둘러보았다. 앉아서 제대로 된 대화를 나눌 만한 공간은 없어 보였다.
“옆에 카페 있던데 거기서 기다리죠.”
“죄송하지만 곤란합니다. 지금 저 혼자 매장을 보고 있어서 자리를 비울 수가 없어요.”
“흠, 그래요?”
서흔이 그의 명함을 내려놓으며 말하자 그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그럼 기다리죠.”
무작정 기다리겠다는 남자가 불편했다. 대체 무슨 일인지, 지금으로선 남자에게 대답을 듣기 어려워 보였다.
“그럼 조금만 기다려 주세요.”
민협이 고개를 끄덕이고는 <플로라유>를 나갔다. 서흔은 다경을 불러 가게를 부탁하곤 카페로 향했다.
“많이 기다리셨어요?”
서흔은 다경을 기다리며 인터넷으로 찾아보았던 민협의 얼굴을 떠올렸다. 사진 속 사람과 눈앞의 사람은 동일 인물이었지만 실물이 훨씬 더 나아 보였다.
“괜찮습니다. 앉으세요.”
민협이 손짓하자 서흔이 맞은편에 앉았다.
그는 커다란 카페 안에서 압도적으로 시선을 잡아끄는 남자였다. 그는 잘생겼고 자신감과 여유가 넘쳐 보였다.
“차 주문할까요? 뭘로 드시겠습니까.”
“저는 카페라테 따뜻한 거요.”
서흔의 말을 들은 민협이 손짓하자 한 남자가 다가왔다. 민협의 비서인 듯했다.
“카페라테 따뜻한 거 한 잔, 아이스 아메리카노 한 잔.”
“네, 알겠습니다.”
민협이 말하자 남자가 고개를 끄덕였다.
역시나 그녀의 예상은 빗나가지 않았다. 남자는 카운터로 가서 주문을 하고 얼마 걸리지 않아 커피를 두 사람의 테이블 위로 가져다주었다.
“감사합니다.”
서흔이 커피를 받으며 꾸벅 고개를 숙였다.
“뜨겁습니다. 조심히 드십시오. 그럼.”
남자는 절제된 동작으로 민협에게 인사를 하고는 물러났다.
커피 주문까지 다른 사람이 해 주는 삶이란 어떤 것이지.
인터넷 검색만으로도 대단한 사람이라 생각했는데 직접 눈으로 보니 더 놀라웠다.
이런 사람이 날 찾아온 이유는 뭘까.
서흔은 민협을 바라보았다.
“절 보자고 하신 이유가 뭔가요?”
그녀는 본론을 바로 물었다. 예정에 없던 이유로 매장을 다경에게 맡기고 나온 것이 마음에 걸렸다.
꽃가게를 오픈하면서 그녀가 끝까지 지키리라 다짐했던 가장 첫 번째는 성실함이었다.
“단도직입적이시네요.”
“매장을 오래 비워 둘 수가 없어서요. 작지만 고객을 상대하는 일이니까요.”
“유서흔 씨 말이 맞습니다. 고객을 존중하지 않는 기업은 오래가지 못하죠. 제대로 매장을 열고 닫는 것만으로도 신뢰를 쌓기에 충분하고요.”
“이해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당연히 이해해야죠, 불시에 찾아온 건 나니까.”
민협이 호탕한 미소를 지었다. 그러면서 서흔을 살폈다.
가까이서 본 여자는 화려한 인상은 아니었지만 어딘가 꽃을 연상케 했다.
아름답고 청초하면서 여려 보이는 꽃잎을 가지고 있지만 잘 꺾이지는 않을 질긴 줄기를 가지고 있을 것 같았다.
차건욱이 이런 스타일을 좋아한단 말이지.
화려한 몸매와 외모를 가진 여자가 아니면 거들떠도 보지 않는 민협의 취향과는 맞지 않았다. 하지만 서흔은 충분히 흥미를 불러일으킬 만큼 미인이긴 했다.
우선은 천천히 접근해야겠지.
“같이 한번 일을 해 보고 싶어서 찾아왔습니다.”
“일이요?”
“W호텔과 함께 일하고 계시죠?”
“네.”
“포트폴리오를 봤는데 괜찮더군요.”
민협이 싱긋 웃으며 말했다.
“이번에 W어패럴에서 새롭게 브랜드 론칭을 준비 중입니다. 콘셉트는 꽃이고, 그에 맞춰 SS시즌 패션쇼 무대를 기획 중입니다. 그래서 유서흔 씨와 무대 장식 컬래버해 보면 어떨까 합니다.”
민협이 다시 남자에게 손짓하자 그가 서류를 가지고 다가왔다.
“계약서 샘플과 패션쇼 기획안입니다.”
서흔은 떨리는 마음으로 서류를 받아 보았다. 간략하게 서류를 훑어보면서도 떨리는 마음이 가라앉지 않았다.
만약 협업이 진행된다면 패션쇼 무대를 장식하는 건 처음 해 보는 일이었다.
새로운 일에 도전하는 것은 두려움보다는 설렘이 더 앞섰다. 해낼 수 있을지 모른다는 생각보다는 잘해 내고 싶다는 열망을 가득 품게 만드는 일이었다.
“천천히 살펴보고 연락해요.”
서류에 집중한 듯한 서흔에게 민협이 시계를 확인하며 말했다.
“네. 어디로 연락드리면 될까요?”
“아까 준 명함 있죠?”
“네.”
서흔이 받은 명함을 확인했다. 하지만 그곳엔 민협의 이름과 연락처만 기재되어 있었다. 그녀는 놀라 민협을 쳐다보았다.
“상무님께 직접 연락 달라는 말씀이신가요?”
“네. 나한테 연락해요. 계약서도 나와 직접 쓰고.”
서흔이 협업을 거절할 거라곤 생각하지 않는 민협의 당연한 어조와 뜻밖의 답변에 그녀는 혼란스러웠다.
보통 협업 제안은 메일이나 전화로 받았다. 직접 찾아오는 경우는 드물었고 하물며 담당자가 아닌 임원이 찾아온 경우는 단 한 번도 없었다.
“혹시 상무님께 연락드려야 할 특별한 이유가 있는지 여쭈어봐도 될까요?”
“내가 유서흔 씨가 마음에 들거든.”
민협이 미소를 지으며 덧붙였다.
“첫눈에 반했다는 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