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화
서흔이 진동하는 휴대폰 화면을 바라보고만 있자 다경이 통화 버튼을 눌러 건네주었다. 서흔은 전화를 받았다.
“여보세요.”
-차건욱입니다.
낮은 저음이 귓가를 울렸다. 지난번 저녁 식사 이후 첫 연락이었다. 어쩐지 그에게 먼저 연락하기가 망설여졌다.
“네.”
그때 무슨 생각으로 열렬히 그의 키스에 응했던 건지 그를 다시 만날 생각을 하는 것만으로도 얼굴이 화끈거렸다.
서흔은 열기가 오른 얼굴을 매만졌다.
현재 상황의 비참함과 그날의 부끄러움, 그를 다시 만나고 싶다는 열망과 낯선 욕망이 뒤섞였다.
-빚은 언제 갚을 생각입니까. 성실한 채무자인 줄 알았더니.
시간으로 보상하라던 건욱의 목소리가 겹쳐졌다. 서흔은 열기가 오르는 얼굴로 차분하게 대답했다.
“연락드리려고 했어요. 언제 시간 되세요?”
그의 연락이 다행일 수도 있었다.
-이번 장소는 제가 정하죠.
“지난번의 복수라도 하시려고요?”
그가 좋아하지 않을 것 같은 장소를 고집했던 자신의 선택이 떠올랐다.
-기대해 봐요.
짧은 통화가 끝났다.
그런데도 다경은 건욱에 대해 묻지 않았다.
서흔과 다경은 ‘closed’ 푯말을 내걸고 엉망이 되어 버린 매장을 정리한 뒤 일찍 문을 닫았다.
“다경아, 조심히 들어가. 오늘 고마웠어.”
“고맙긴. 술이라도 한잔할까?”
다경의 마음 씀씀이가 느껴졌다.
“미안……. 오늘 약속이 있어.”
“잘됐다. 그 남자랑 한잔하고 풀어내.”
“고마워, 다경아.”
서흔은 집으로 돌아가 오늘 하루의 더러움을 털어내듯 샤워했다.
서흔은 정성스럽게 메이크업을 하고 머리를 손질했다. 진수가 함부로 취급했던 그녀를 지우고 평범한 척, 보통의 하루였던 척 가면을 썼다.
준비를 마친 서흔은 집을 나섰다.
늦은 시간에 건욱이 선택한 약속 장소는 캐주얼한 칵테일 바였다.
서흔이 옅은 긴장을 내려놓고 칵테일 바로 들어섰다. 먼저 도착한 건욱이 눈에 들어왔다.
그가 그녀를 보고 손을 들었다. 그를 향해 한 발짝, 한 발짝 다가갈수록 심장이 쿵쿵 뛰어댔다.
“먼저 와 계셨네요.”
“시간에 철저한 사람이라.”
서흔이 그의 옆에 앉았다. 칵테일 바보다는 고급 레스토랑 분위기를 풍기는 정갈한 바를 휘 둘러보던 서흔이 그를 향해 물었다.
“이런 분위기 나랑 어울리지 않나 봐요.”
그녀의 물음에 그가 웃음을 터트렸다. 시원한 웃음소리에 굳어 있던 마음이 풀어지기 시작했다.
“정말 복수라도 할 거라고 생각했나요?”
“아닌가요?”
“날 대체 어떻게 생각하는 겁니까.”
건욱의 목소리가 낮게 울리며 그가 눈짓하자 바텐더가 다가왔다.
“주문하시겠습니까.”
“추천 부탁드릴게요.”
“알코올 도수 낮은 걸로.”
서흔의 부탁에 건욱이 덧붙이자 바텐더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로즈 밸런타인 어떻습니까. 가볍게 마시기 좋으실 겁니다.”
“네. 그걸로 주세요.”
“난 원래 마시던 걸로.”
“알겠습니다.”
바텐더가 멀어지자 서흔이 건욱에게 고개를 기울였다.
“나 알쓸로 보였어요?”
“알쓸?”
“알코올 쓰레기요.”
건욱이 다시 웃음을 터트렸다. 표정이 무거운 남자라고 생각했는데 그녀 앞에서는 자주 웃었다. 그리고 그 웃음소리가 무척 듣기 좋았다.
“그게 아니라.”
웃음이 멎은 눈동자가 짙어지며 그녀를 향했다. 순간 서흔의 심장이 다시 빨라졌다.
“술은…… 위험하다고 했을 텐데.”
그날 밤, 위험하다고 했던 그의 말은 그녀를 향한 것이 아니었다. 그녀를 끌어당겨 입술을 맞췄던 그가 위험하다는 뜻이었다.
아슬아슬했던 그 감정을 그녀는 지금 다시 느끼고 있었다. 이제 그 감각은 두 사람 사이에 옅은 긴장을 만들었다.
“준비해 드리겠습니다.”
적절한 긴장을 내려놓으라는 듯 건욱과 서흔 앞에 칵테일과 위스키, 두 잔이 놓였다.
“들어요.”
“네.”
서흔은 그제야 옅은 숨을 내쉬며 잔을 들었다. 로즈 밸런타인의 선명한 색은 입이 아닌 눈으로 마시는 것 같았다.
서흔은 칵테일을 한 모금 더 마셨다. 새콤달콤한 맛이 꼭 음료수처럼 목에 부드럽게 넘어갔다.
“그렇게 마시다가는 금방 취합니다.”
홀짝이던 서흔의 칵테일은 이미 반 이상이 그녀의 입 속으로 사라진 후였다.
“이 한 잔보다 차건욱 씨가 마신 위스키 한 모금이 더 도수가 세 보이는데요.”
“그건 그렇지만.”
“그럼 한 잔 더 마셔도 되겠죠?”
한 잔을 기분 좋게 비운 서흔이 이번에는 칵테일을 직접 골랐다. 칵테일에 대해서 잘 알지 못했고 이름만으로는 맛이 잘 상상이 가질 않았다.
하지만 상관없었다. 지금은 무엇을 마시더라도 좋을 것 같았다.
“오늘 전화 줘서 고마웠어요.”
서흔이 그를 바라보았다. 살짝 나른해진 눈동자 아래가 옅은 붉은 빛을 띠었다.
서흔은 힘든 일이 생기면 어떻게든 그것을 극복하기 위해 다른 곳에 정신을 쏟았다.
매장 일이 힘들면 밖으로 나가 사람을 만났고, 사람이 힘들면 집으로 돌아가 혼자만의 시간을 가졌다.
건욱의 전화는 오늘 하루 일과 중 가장 다행스러운 일이었다.
그를 만나기 위해 준비를 하고 이렇게 마주하니 그녀의 머릿속을 가득 채웠던 임진수와 엄마, 대출 거절, 그리고 1억이라는 빚이 과거의 어느 날처럼 멀어졌다.
그와의 만남은 특별했다.
그의 슈트 값을 갚기 위해 시간으로 보상하고 있음에도 그를 만나면 마음이 편해졌다.
다정스레 말을 건네지도, 친절하지도 않은 남자였지만, 순간순간을 설레고 두근거리게 만드는 이 남자와의 시간이 좋았다.
“이거 유서흔 씨가 사는 겁니다.”
“알겠어요. 전 빚을 빨리 청산하고 싶으니까요. 대신 술은 오늘까지만 살게요. 빚은 돈으로 갚고요.”
“몸으로 때우라 말했는데.”
정말 자자는 말인가.
서흔은 건욱을 바라보았다. 하지만 몸으로 때우라는 남자의 눈에 욕망은 보이지 않았다.
그녀는 민망한 오해로 열이 오른 얼굴에 손부채질을 하며 말했다.
“채무는 제대로 갚아야죠. 그렇게 간단하게 정리할 수 있는 금액이 아니니까. 갚을게요. 그래야 나도 두 다리 뻗고 잘 수 있을 것 같아요.”
“갚는 데 얼마나 오래 걸리려고.”
그녀의 말이 마음에 들지 않는지 건욱의 눈매가 가늘어졌다.
“그래서 부탁 하나만 하려고요.”
“부탁?”
“네.”
건욱은 서흔의 눈동자를 바라보았다. 취한 것이라고 보기엔 너무나 맑았지만.
“취한 눈으로 하는 부탁을. 내가 왜.”
“나 안 취했어요.”
물끄러미 바라보는 시선에 취할 것 같은 건 건욱이었다. 마신 것 같지도 않은 술보다 그녀의 눈빛이 그를 취하게 만들었다.
“어떻게 갚을지는 나중에 맨정신일 때 다시 이야기하도록 하죠.”
“진짜 말 안 통한다는 말, 많이 듣죠?”
돈으로 갚는 게 맞는 거 아니냐며 답답해하는 서흔에 건욱이 어깨를 으쓱했다.
“쉽게 얻는 건 쉽게 잃는 법입니다.”
“지금껏 제가 차건욱 씨한테 쉽게 얻은 게 있었나요? 금시초문인데. 자신이 관대하다고 착각하지 말아요.”
차건욱은 정말 말, 시간, 돈 갚는 방법, 그 무엇 하나도 쉽게 주지 않는 남자였다.
서흔이 미간을 찌푸리며 칵테일 잔을 들자 그가 그녀의 손을 잡았다.
마시려는 자와 그걸 막는 자, 두 사람 사이의 묘한 긴장이 흘렀다.
서흔이 그녀 쪽으로 잔을 끌어당겼지만 그 위를 덮은 그의 손 때문에 꿈쩍도 하지 않았다.
“사람은 누구나 스스로를 관대하다고 생각하는 법입니다.”
“정도라는 게 있잖아요.”
“관대하다고 믿을 만큼 남들보다 잘난 게 잘못은 아니지. 내 기준에서는 관대한 겁니다.”
“자신감도 넘치면 꼴불견이에요.”
“내가 거슬리나 보지?”
“…….”
“대답하지 않네.”
“그렇다고도 말 안 했어요.”
서흔의 대답에 건욱이 낮게 웃었다.
그가 손을 제 쪽으로 잡아당기자 잔을 든 그녀의 손이 끌려갔다. 건욱이 그녀의 손을 잡은 채로 칵테일을 마셨다.
“너무 달아. 내 취향은 아니군.”
미간을 사정없이 구긴 건욱이 잔을 내려놓자 그제야 서흔의 손이 자유로워졌다. 잡혔던 손이 후끈거렸다.
“먹고 싶으면 한 잔 더 시키면 되지, 왜 내 걸 뺏어 먹어요?”
“내가 먹고 싶었던 게 칵테일이었을 것 같아요?”
건욱의 시선이 서흔의 입술에 닿았다.
그럼 뭔데요…….
질문이나 농담이 나오질 않았다.
묘한 열기가 피어오르는 눈빛에 아랫배에 힘이 들어갔다.
위험하다.
위험의 주체가 그인지, 그녀인지 알기 어려웠지만 계속 경보가 울리고 있었다.
한동안 서흔의 입술을 바라보던 건욱이 그녀의 얼굴로 손을 뻗었다.
그가 그녀의 얼굴 위로 길게 늘어진 머리카락을 귀 뒤로 넘겨주었다. 그 손길에 심장이 떨렸다.
“속눈썹이 떨리네.”
깊은 눈동자가 그녀에게 고정되었다. 그 눈빛에 정말 취한 건가 싶을 정도로 뇌가 녹아내리는 기분이었다.
긴장을 이겨내지 못한 서흔이 입술을 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