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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약혼녀가 아니야 (14)화 (14/74)

14화

여전히 고운 얼굴을 그대로 간직한 지란에게 남자는 거침없이 다가왔다. 서흔은 그를 아저씨라고 불렀다.

아저씨는 지란에게 끝없는 애정을 쏟았고 엄마와 아저씨는 새 가정을 꾸렸다.

그는 지란뿐만 아니라 서흔에게도 최선을 다했다. 사랑을 주었고 풍족하게 생활할 수 있게 해 주었다.

지금 그녀의 직업이 된 꽃과 나무를 가꾸는 일은 정원사였던 아저씨에게 배운 것들이었다. 서흔은 아저씨의 일을 따라다니곤 했다.

하지만 행복은 길지 않았다. 3년 후 아저씨는 갑작스러운 교통사고로 세상을 떠났다.

그 후 지란은 변했다. 고등학교를 졸업한 서흔이 독립적으로 삶을 꾸려 나갈 동안 지란의 방황이 시작되었다.

지란은 아저씨 같은 남자를 만나 다시 정착하고 싶어 했지만 그런 남자는 나타나지 않았다.

시간이 지날수록 지란은 남자에게 집착하기 시작했고 그녀의 곁에 다가오는 남자들은 도리어 그녀를 이용했다.

그때부터 지란은 자잘한 돈 문제를 일으키기 시작했다. 서흔은 그런 엄마를 보듬었다. 엄마의 텅 빈 마음을 어느 정도는 이해했다.

지금까지는 서흔이 감당할 수 있는 수준의 돈 문제였고 두 모녀 사이에는 말하지 않아도 서로 이해하는 적정선 같은 게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이러다가 서흔이, 너까지 무너지면 정말 큰일 나. 어머니 도와주려다가 오히려 너랑 어머니 모두 위험해질 수 있다고.”

“그래. 네 말이 맞아.”

이건 지란이 해결해야 할 일이었다. 언제까지 지란이 일으킨 문제를 서흔이 처리할 수는 없었다.

모든 문제가 해결되었을 때, 지란이 일어설 수 있게 돕는 게 지금 서흔이 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이었다.

서흔은 휴대폰을 들었다. 지란이 전화를 받을지 알 수 없었지만 전화를 받지 않으면 메시지라도 남길 생각이었다.

그때 딸랑- 소리와 함께 <플로라유>의 문이 열렸다.

“어서 오세요.”

다경이 손님을 맞으려는데 진수가 껄렁껄렁한 걸음으로 가게 안으로 들어왔다.

[서흔아, 미안해. 여기까지 따라오는 건 아니었는데. 내가 잠깐 정신이 나갔었나 봐. 다시는 안 그럴게.]

무릎 꿇고 빌던 것이 아직 생생한데 진수는 뻔뻔한 얼굴을 치켜올리며 서흔을 찾았다.

“유서흔.”

서흔이 작업대를 돌아 매장으로 나왔다.

순진하게 그의 말을 믿은 건 아니지만 아직 채무 변제 기한이 남아 있는데도 찾아온 진수에 머리가 지끈거렸다.

“무슨 일이야? 다시는 찾아오지 않겠다고 무릎 꿇고 빌던 게 며칠 전인 것 같은데.”

“누, 누가? 무릎을 꿇었다고 그래.”

진수가 말을 더듬었다.

“그리고 말은 바로 해야지. 내가 언제 안 찾아온다고 했어, 안 따라다니겠다고 했지. 그리고 그 새끼 누구야?”

진수가 이를 갈며 건욱을 지칭했다.

“곱게 있다가 결혼해도 모자랄 판에 돼먹지도 않은 새끼랑 내 눈앞에서 주둥이를 맞붙여!”

“제발 헛소리 좀 그만해.”

계속 결혼 타령을 하는 진수를 이해할 수 없었다. 점점 애정을 빗댄 집착이 심해지고 있었다.

“얘가 아직도 정신 못 차렸네, 돈 어쩔 건데? 결혼하면 빚 다 없애 준다니까.”

진수가 눈을 부라리며 웃었다.

“내가 그 돈을 왜 갚아? 내가 빌린 것도 아닌데. 돈은 엄마한테 받아.”

단호한 서흔에 진수가 조금 놀란 듯하더니 다시 코웃음을 치며 말했다.

“갑자기 왜 이럴까? 돈을 네가 안 갚으면 누가 갚아? 연대 보증인란에 네 이름이 떡하니 써 있는데.”

“변호사한테 다 알아봤어. 내 자필로 쓴 거 아니면 법적 책임지지 않아도 된다고 하던데.”

“하, 그래서? 안 갚겠다고?”

“그래. 난 안 갚아.”

진수가 바짝 다가왔다.

“유서흔. 인생 순진하게 사네. 법으로 따졌으면 네 엄마, 처음부터 나한테 돈 못 빌렸어.”

그 모습은 여태껏 그녀가 알던 나사 빠진 진수 같지 않았다.

“법으로 따지면, 결혼으로도 그 빚 못 갚는다고. 내가 결혼해 주겠다 하면 감사합니다 하고 넙죽 절하며 내 발에 뽀뽀는 못 할망정, 뭐? 돈을 안 갚아? 결혼을 안 해? 이게 아직 정신 못 차렸지.”

히죽거리는 진수의 웃음이 소름 끼쳤다. 얼토당토않는 협박이 무서워지기 시작했다.

“나가.”

덜덜 떨리는 손가락으로 문을 가리키곤 몸을 돌리자 진수가 소리치며 팔을 잡으려 했다.

“돈 내놓기 전에 절대 못 가지!”

“내 몸에 손대지 마. 소리 지르지도 말고.”

“서흔아!”

“괜찮아.”

서흔이 진수의 손을 피하고는 단호하게 말하며 다경을 안심시켰다. 계속 진수에게 끌려다닐 수는 없었다.

“여기 CCTV 설치되어 있어. 한 번만 더 내 몸에 손대면 바로 경찰에 신고할 거야. 그날 호텔에서 있었던 일도 싹 다.”

“이게 진짜!”

생각보다 강경하게 나오는 서흔에 진수는 화가 머리끝까지 솟아 미칠 것 같았다.

안 그래도 호텔 앞에서 알지 못하는 남자한테 당해 자존심이 구겨질 대로 구겨진 진수의 분노에 서흔이 기름칠을 하고 있었다.

임진수가 그렇게 쉬운 사람이 아니란 걸 보여 줄 필요가 있었다.

“그래. 어디 네 마음대로 해봐.”

진수는 보란 듯이 손에 잡히는 대로 잡아 집어 던졌다.

“하지만 곧 알게 될 거야. 갚든 안 갚든 그건 네 뜻대로 안 될 거라는 걸.”

화분이 벽에 부딪혀 깨지며 사방으로 튀었다. 식물들이 투박한 그의 발에 짓밟혔다.

“어디 버틸 때까지 버텨 봐. 넌 어차피 갚게 될 거야, 돈으로든 몸으로든. 내가 무슨 짓을 하더라도 꼭 받아 낼 테니까.”

진수가 커다란 화분을 발로 차 넘어뜨렸다. 다경이 소리를 지르며 경찰에 신고를 하자 그는 문으로 향했다. 그러다 잊은 게 있는 듯 진수가 돌아보며 말했다.

“아! 깜빡했는데. 너네 엄마한테 꼭 전해라. 부디 몸조심하라고.”

진수가 쾅! 문을 밀치며 나갔다. 충격에 문이 덜컹거리며 흔들렸다.

그 모든 소란 속에서도 흔들리지 않고 가만히 서 있었던 서흔이 진수가 나가고 나자 그 자리에 그대로 주저앉았다.

“서흔아.”

다경이 다가왔다. 진수와 몇 마디 하지 않았는데도 크게 시달린 것처럼 머리가 아팠다.

아닌 척하고 싶어도 진수를 보는 것만으로도 1억이라는 큰돈의 압박이 그녀를 무겁게 짓눌렀다.

“다친 곳은 없어?”

“없어. 괜찮아.”

다경이 부산스럽게 서흔의 몸 곳곳을 살펴보았지만, 그녀의 말대로 다행히 다친 곳은 없어 보였다.

“이게 다 무슨 일이야, 진짜.”

다경은 난장판이 된 주위를 둘러보았다. 조각난 화분과 화병들이 위험하게 주위에 널려 있었다.

본래 분노 조절을 잘 못 하던 임진수였지만 이렇게 폭력적으로 나올 줄은 몰랐다.

돈을 갚지 않는다고 이런 사달을 낼 배짱은 없다고 생각했는데.

“아, 미친놈 진짜.”

다경은 휴대폰을 꺼내 부서진 화분이며 망가진 곳들을 찍으며 분개했다.

“어디 할 짓이 없어서 협박이야, 협박이. 내가 이거 다 손해 배상 청구해서 꼭 다 받아 낼 거야. 아무 데서나 성질부린 값이 얼마나 무서운지 본때를 보여 줄 거야.”

얼마 후 경찰이 도착했다. 서흔과 다경은 사정을 설명했다.

경찰이 돌아가고 나서 빗자루를 들고 나와 가게를 정리하면서도 다경은 분이 풀리지 않는지 계속해서 씩씩댔다.

그러다가 여전히 멍하니 있는 서흔을 걱정하며 정수기에서 물 한 잔을 따라 서흔에게 갖다주었다.

“서흔아, 들어가서 좀 쉴래? 매장은 내가 볼 테니까.”

“아니야, 정리 같이하자.”

서흔이 다경의 말에 정신을 차렸다. 엉망이 된 매장을 씁쓸한 눈빛으로 바라보며 자리에서 훌훌 털고 일어났다.

화분에서 쏟아져 나온 흙들이 여기저기 흩어져 있었다.

잘 보살펴 키웠는데 아무 죄 없는 식물들이 무자비한 손길에 목이 꺾이고 꽃잎이 짓이겨졌다.

그 모습이 꼭 미래의 제 모습 같았다.

[넌 어차피 갚게 될 거야, 돈이든 몸으로든. 내가 무슨 짓을 하더라도 꼭 받아 낼 테니까.]

이어진 진수의 말이 머릿속을 맴돌았다.

[아! 깜빡했는데. 너네 엄마한테 꼭 전해라. 부디 몸조심하라고.]

단순한 협박이라고 하기에 오늘 진수의 눈빛은 이지를 잃은 짐승의 눈 같았다. 정말 무슨 일을 벌일 것 같아 두려워졌다.

“서흔아.”

진수가 만든 늪 속을 헤매는 서흔을 다경의 목소리가 끌어올렸다. 다경이 짓이겨진 꽃을 든 채 멍하니 앉아 있는 서흔에게 다가왔다.

“응?”

“전화 왔어.”

다경의 말에 휴대폰을 들었다.

차건욱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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