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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약혼녀가 아니야 (13)화 (13/74)

13화

순간 모든 사람들이 얼어붙었다.

놀라 입이 떡 벌어진 주형과 흔들리는 눈동자를 숨길 길이 없는 혜림, 싸늘해진 눈빛의 민협과 돌아가려다 걸음을 멈춘 건욱까지 모두.

“아버지……. 정말 건욱이를…….”

할 말을 잃은 주형이 마른침을 삼키며 차 회장을 바라보았다. 사실이라는 걸 받아들이기 힘든지 그가 뜨거운 분노를 삼키며 입술을 떼었다.

“정말 건욱입니까?”

이글이글 타오를 것 같은 주형의 눈동자를 서늘하게 바라본 차 회장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건욱이라.”

“…….”

“차건욱, 니는 확실히 준비해라.”

“네, 알겠습니다.”

건욱은 차갑게 내려앉은 공기와 달리 화르르 달궈진 채 그에게 꽂혀 드는 시선들을 받아 냈다.

깜찍한 걸 준비하셨네, 회장님이.

건욱은 차가운 물을 한 잔 마셨다. 혁신 전략 기획 본부장이라는 위치를 바란 적은 단연코 없지만, 여전히 뜨겁게 타오르는 세 쌍의 눈빛들을 보아하니 그 길도 나쁘지 않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민협은 여유 넘치는 건욱의 모습을 죽일 듯이 노려보았다.

아버지가 아니라 차건욱이라니.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현재 주형이 W전자의 부사장직을 맡고 있긴 하나 그룹의 핵심 권력을 차 회장이 건욱의 손아귀에 쥐여 주는 건 매우 위험한 일이었다.

“회장님, 이건……. 이럴 순 없습니다.”

주형이 경악을 감추지 못한 채 소리를 높였다. 이런 식으로 아버지가 저를 밀어낼 수는 없었다. 제외시킬 수는 없었다.

“결정은 끝났다.”

하지만 차 회장은 반론은 필요하지 않다는 듯이 건욱을 보며 여상하게 말했다.

“내일부로 혁신 전략 기획 본부로 발령 조치했으니 그리 출근해라. 알았나.”

“네. 알겠습니다.”

“내 지켜 볼기고.”

“명심하겠습니다.”

건욱은 고개를 숙였다.

* * *

집으로 돌아온 주형이 거칠게 넥타이를 풀어 헤치며 소파에 앉았다. 그 모습을 보며 뒤따라 들어온 혜림이 안양댁을 불렀다.

“얼음 팍팍 넣어서 찬물 좀 한 잔 가져와요. 아, 아니다. 두 잔 가져와요.”

그녀도 열이 나는지 연신 손바닥으로 부채질을 하며 자리에 앉았다.

“아버님, 노망나신 거 아니에요? 이제 와서 대체 왜 그러신데요?”

혜림이 푸념하자 주형이 매서운 눈길로 혜림을 째려보았다.

“말조심해.”

“아니, 너무 어이가 없어서 그래요. 당신이 이렇게 떡하니 버티고 있는데, 그 자리에 건욱이를 앉힌다는 게 말이 안 되잖아요.”

누구보다 말이 안 된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주형이었다. 답답한 마음에 풀어놓는 이야기라지만 말을 가리지 않는 혜림에 그는 속이 부글부글 끓었다.

안양댁이 물을 가져오자 주형이 벌컥벌컥 찬물을 들이켰다. 목이 타는 건 혜림도 마찬가지였다.

“건욱이 입사한 지 이제 겨우 5년 됐어요. 경영하기 싫다는 애 억지로 끌고 와 대표 만드시더니!”

민협이 대학 졸업하자마자 그룹에 입사한 것과 달리 건욱은 고등학교 시절에 떠난 유학길에서 돌아오지 않았다.

그렇게 영영 그룹에서 멀어지는 줄 알았던 그가 차 회장과의 모종의 거래로 갑자기 귀국했다.

입사 7년 차가 되어서야 W어패럴 상무로 발령 난 민협을 비웃듯이 그는 겨우 5년 일을 하고 W호텔의 대표직을 맡고 있었다.

“아니 우리 민협이가 공으로 7년 일했어요? 그리고 당신은요?! 당신은 벌써 그룹에 충성한 지가 27년인데, 뭘로 보나 당연히 당신이잖아요!”

혜림이 흥분해 팔을 부들부들 떨었다.

“아무리 W전자나 어패럴이 잠깐 주춤한다고 해도 바로 이렇게 우리를 팽할 수는 없는 거죠!”

“너무 흥분하지 마세요, 엄마.”

민협은 혜림의 손을 부드럽게 잡곤 어머니의 화를 달랬다.

사실, 혜림의 말은 틀린 게 하나도 없었다.

그동안 실적이 바닥이었던 호텔과 달리 W전자는 우리나라를 대표하는 기업이었다. W어패럴도 글로벌 SPA 브랜드의 성공적인 론칭으로 인해 승승장구였다.

두 상장사는 지속적인 성장세를 이어가던 때에, 전 세계적인 경제 공황으로 인해 잠시 주춤한 상태였다.

이건 그들만의 사정이 아니었다. 모든 산업 전반에 걸친 악재로서 호텔 역시 마찬가지였다.

문제는 경제가 조금씩 회복세에 들어서며 호텔은 살아나고 있지만, W전자와 어패럴은 여전히 고전을 겪고 있다는 데 있었다.

이 정도의 고난도 이겨내지 못할 주형과 민협이 아닌데도 차 회장은 마치 이때만 기다렸다는 듯이 건욱의 손을 잡았다.

“형이 잘할 거예요. 할아버지도 그렇게 판단하셨으니까 그 자리에 앉히신 거고요.”

“차민협! 너는 그걸 말이라고 해!”

유들거리며 웃는 민협에 팔팔 뛰는 혜림과 달리 주형은 눈을 가늘게 뜨며 물었다. 민협은 가벼워 보여도 실없는 얘긴 하지 않았다.

“무슨 생각이라도 있는 거냐?”

주형의 물음에 민협은 며칠 전에 진한 키스를 나누던 건욱과 여자를 떠올렸다.

처음 호텔 정류장에서 둘의 키스하는 장면을 보았을 때만 해도 이렇게 커다란 이벤트를 선물할지 몰랐는데 역시 기대를 저버리지 않은 건욱이었다.

“있죠, 좋은 생각.”

민협이 싱긋 웃었다.

차 회장은 여자 문제에 민감했다. 그는 큰아들을 잃은 것도 건욱을 낳고 떠나 버린 건욱의 모친, 즉 그 여자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만약 건욱이 결혼을 앞둔 채로, 그의 어머니처럼 스캔들이라도 터트리게 된다면 차 회장이 어떤 표정을 지을지 궁금했다.

형이 날 도와준단 말이야.

민협의 미소가 진해졌다.

입사 후 내내 잠잠하게 지내던 건욱이 정수민의 입국과 더불어 재미난 일을 만드니 어찌 가슴이 뛰지 않을 수 있겠는가.

무엇을 기대하든 그 이상을 해 줘야지.

건욱과 차 회장, 두 사람 모두를 깜짝 놀라게 해 주려는 생각만으로도 서서히 번지는 흥분감에 몸이 떨려왔다.

“제가 꼭 아버지, 회장 만들어 드릴게요. W그룹 갖게 해 드릴게요.”

민협은 사냥감을 눈앞에 둔 포식자의 얼굴로 느른하게 웃었다.

주형은 자신만만한 민협을 바라보았다. 반질반질한 얼굴과 길고 날렵한 몸, 좋은 감과 팽팽 돌아가는 머리까지.

자신을 꼭 닮은 믿음직한 아들이었다.

“믿어도 되는 거냐?”

“네, 걱정 마세요.”

민협의 확답에 혜림도 구겼던 미간을 피며 물었다.

“아들, 진짜 네 아버지 회장님 만들어 줄 거야?”

“그럼요. 그러니까 엄마도 그만 신경 쓰세요. 벌써 미간에 주름 생겼어.”

“어머, 진짜?”

혜림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필러 맞은 지 얼마 안 됐는데 어떡해.”

그녀는 울상을 지으며 침실 화장대 앞으로 달려갔다.

“저 들어가 볼게요.”

민협은 주형에게 인사를 하고는 현관을 나섰다. 상쾌한 아침 공기가 폐부로 스며들었다. 그는 휴대폰을 꺼내 전화를 걸었다.

-네, 상무님.

“알아봤습니까?”

-네. 보고할까요?

“말해 봐요. 자세하게.”

민협은 수화기에 귀를 기울였다.

* * *

“고객님, 더 이상의 대출은 어려우세요.”

은행 직원의 말에 서흔은 고개를 들었다.

“아, 네……. 알겠습니다.”

벌써 3번째 거절이었다. 대출이 가능한지 여러 은행을 돌아다녔지만, 매번 돌아오는 대답은 같았다.

힘없이 은행을 나선 서흔은 터덜터덜 <플로라유>로 돌아왔다.

“어떻게 됐어?”

다경이 묻자 서흔은 고개를 흔들었다.

“더 이상 대출은 안 된대.”

“가게 인테리어 할 때 대출 받은 것 때문에 그렇구나.”

확장 이전하면서 받은 대출이 그녀가 받을 수 있는 최대 한계였다.

작업대 안쪽으로 들어가며 가방을 내려 둔 서흔이 한숨을 푹 내쉬었다.

며칠 동안 엄마, 지란의 채무와 슈트 값을 해결하기 위해 이것저것 알아보고 있었다.

변호사를 찾아가서 상담도 받고, 은행도 찾아다녔지만 뾰족한 방법을 찾아내지 못했다.

진수의 터무니없는 요구대로 끌려다닐 것은 아니지만 한숨이 늘었다. 빚을 갚아야 하는 건 변함이 없으니까.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다.”

“너, 할 만큼 했어. 그러니까 더 이상 아무것도 하지 마.”

“응?”

“난 사실 네가 모른 척했으면 좋겠어. 네가 빌린 게 아니고 어머니께서 빌린 돈이잖아.”

다경이 쓴소리를 했다. 지란 때문에 아등바등하는 서흔을 볼 때면 안타까울 때가 한두 번이 아니었다.

“매번 어머니 짐을 지고 갈 수는 없어.”

“나도 알아, 다경아.”

하지만 그게 말처럼 쉽지 않았다. 지란은 서흔의 엄마였으니까.

자신을 버린 아버지와 다르게 끝까지 서흔을 놓지 않고 곁을 지켜 준 엄마였다.

서흔을 낳기 전까지 고생을 모르고 살았던 지란은 22살의 미혼모로 집에서 쫓겨났다.

그녀는 서흔에게 밥 한 숟가락을 먹이기 위해 지금껏 해 본 적 없던 식당일, 청소일 등을 마다하지 않고 했다.

그녀의 손은 늘 물집이 잡혀 있었고 고된 노동으로 팔을 잘 들어 올리지 못했다. 그렇게 지란은 서흔을 보살피기 위해 최선을 다했다.

그랬던 지란이 변한 건 서흔이 중학교를 졸업하던 무렵 지란의 10대 시절을 기억하던 한 남자를 만난 후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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