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화
한없이 부드러운 말캉한 살덩이가 그의 입 속으로 빨려 들어갔다.
서흔은 그를 밀어내지도 뺨을 올려붙이지도 않았다. 대신 그의 목에 팔을 감았다.
알코올 향이 뒤섞인 그의 체향이 폐부까지 깊숙이 파고들었다. 이대로 완전히 그에게 잠식될 것 같았다.
그런데 그 느낌이…… 싫지 않았다.
그에게 휩쓸리면 안 된다고 스스로를 계속 다독여 왔지만 이건 거부할 수가 없었다.
서흔은 이제야 받아들여야 한다는 걸 깨달았다. 처음 만났을 때부터 강렬하게 느꼈던 그를 향한 끌림을 기꺼이 인정해야 했다.
“안 밀어내네.”
제 타액으로 촉촉해진 입술을 뗀 건욱이 닿을 듯 말 듯한 거리에서 속삭였다.
간질간질한 숨결이 입술 위를 맴돌았지만 정작 간지러운 건 입술이 아니라 피부 아래 깊숙이 숨겨진 심장이었다.
“밀어냈으면 좋겠어요?”
“안 밀어냈잖아.”
쓸데없는 가정 따위는 필요하지 않다는 듯 단호한 어투다.
“지금이라도 밀어낼 수 있어요.”
“이 얼굴로?”
커다란 손가락이 그녀의 얼굴을 읽어 내려가는 것처럼 쓰윽 훑었다. 마지막으로 닿은 곳은 잔뜩 부풀어 오른 입술이었다.
건욱은 그 입술을 엄지로 살살 만졌다.
“내 얼굴이 어때서요.”
“키스하고 싶어 미치겠다는 얼굴.”
“그건 차건욱 씨 얼굴이고요.”
“눈 감아.”
웃음을 머금은 건욱의 목소리에 서흔의 눈동자가 저절로 감겨 들었다.
고개를 숙인 건욱이 아랫입술을 깨물었다. 벌어진 입술 사이로 혀가 안쪽으로 밀고 들어왔다.
그녀의 숨을 모조리 앗아갈 듯 강렬한 키스에, 야한 마찰음이 짙은 숨소리와 함께 뒤섞여 잇새로 흘러나왔다.
이런 숨소리를 내뱉는 자신이, 남자와 거리에서 키스를 하고 있는 자신이 낯설었다.
이런 낯섦이 불편해야 하는데 서흔의 머릿속엔 다행이라는 생각만 맴돌았다.
이 떨림을, 이 끌림을 이 남자도 느끼고 있어서. 오로지 그녀 혼자만의 느낌이 아니라서.
* * *
새벽의 짙은 안개 속에서 솔 냄새가 났다. 안뜰 정원 입구에 심어진 커다란 황장목 아래를 지나며 건욱은 담배가 간절해졌다.
치기 어릴 때는 언젠가 이 나무를 태워 버리리라 생각한 적도 있었다.
나무가 무슨 죄인가 싶다가도 솔 냄새를 맡을 때면 기억하고 싶지 않은 기억까지 떠올라 참기 힘들었다.
아버지와 함께했던 시간과 돌아가신 아버지, 혼자가 된 어린 시절 같은 것들.
건욱은 솔 냄새를 지우고 담배 냄새를 떠올리며 뚜벅뚜벅 걸었다. 현관을 지나 다이닝 룸으로 들어갔다.
1년에 서너 번 있는 가족 행사를 제외하고는 건욱은 본가를 잘 찾지 않았다.
어제저녁, 아침을 함께 하자는 차 회장의 연락이 없었다면 들르지 않을 본가였다.
업무 관련 이야기는 차 회장의 집무실이 있는 W그룹 본사에서 하는 것이 보통이지만, 아주 중요한 일이 있을 때는 꼭 새벽에 아침을 핑계로 가족들을 불러 모았다.
오늘은 또 무슨 일인지.
무거운 걸음을 옮기는데 본가의 안살림을 담당하고 있는 이 집사가 건욱에게 인사를 건넸다.
“오랜만에 오셨습니다, 도련님.”
“잘 지내셨습니까, 이 집사님.”
“네. 저야 잘 지내죠. 이쪽으로 앉으세요.”
간결한 인사에도 이 집사는 다정한 눈빛으로 건욱을 자리로 안내했다.
이른 새벽에도 환하게 불이 켜진 다이닝 룸에는 완벽하게 아침상이 차려져 있었고 그 긴 식탁의 상석에 차 회장이 앉아 있었다.
“왔냐.”
“네.”
살갑지 않은 조손의 인사에 이 집사가 말을 얹었다.
“대표님이 성게미역국 좋아하셔서 그걸로 준비했는데 괜찮으세요?”
건욱은 어린 시절 잠을 못 자 입 안이 껄끄러운 아침이면 늘 미역국 한 그릇에 밥을 말아 먹고는 했었다.
그걸 기억하는 이 집사가 신경 써서 아침 메뉴를 준비한 모양이었다.
“별걸 다 신경 쓰셨네요.”
“회장님께서 특별히 신경 쓰라고 당부하셔서요.”
이 집사의 말에 차 회장이 툭 한 마디를 보탰다.
“지 애비 닮아 비린 것을 여직 좋아한다.”
숟가락을 들고 국을 한술 뜨던 건욱이 아버지 이야기에 우뚝 손을 멈추었다.
이래서 본가에 오기 싫은 건데.
차 회장은 가끔 아버지 이야기를 꺼내 건욱을 자극하곤 했다.
[니 애비는 수수깡이었데이. 속이 텅 비어가 바람 불면 흔들리고, 힘주면 부러지고.]
아버지의 장례식을 끝내고 집으로 돌아온 날, 황장목 아래서 차일도는 울음을 참지 못하는 아이를 잡고 말했다.
[니는 말이다. 그리 살면 안 된다. 속을 꾹꾹 채워가, 뿌리 뻗고, 하늘 높이 솟아, 세상을 발아래 두는 이 황장목처럼 살아야 한데이. 알았나.]
지금과 똑같은 담담한 표정으로.
“묵으라. 식는다.”
여상하게 말하는 차일도 회장에 건욱은 다시 손을 움직였다. 그도 이제는 울음을 참지 못하는 아이가 아니었다. 감정쯤은 깊숙이 숨긴 채 표정을 갈무리할 수 있었다.
두 사람이 식사를 시작하고 얼마 되지 않아 차 회장의 둘째 아들인 W전자 부사장 차주형과 부인 조혜림, 그의 아들인 W어패럴 상무 차민협이 들어왔다.
“좀 늦었습니다.”
“안녕하셨어요, 아버님.”
시간 약속 어기는 걸 무엇보다 싫어하는 차 회장이 쳐다보자 주형이 너스레를 떨었다.
“뭔 새벽에 차가 그렇게 밀리는지. 이래서 서울을 교통지옥, 교통지옥 하나 봅니다.”
“…….”
여전히 냉랭한 차 회장에 혜림이 민협을 팔꿈치로 툭 치자 그가 인사를 건넸다.
“잘 주무셨어요? 할아버지.”
민협은 건욱과는 다르게 부드럽고 다정하게 차 회장에게 인사를 건넸다.
“늦어서 죄송해요. 아버지가 어제 과음을 하셔서 늦잠을 주무셨어요. 이해해 주세요.”
“차민협!”
민협의 말에 주형이 눈을 부라렸지만 그는 싱글싱글 웃었다. 그는 워낙 주형을 닮아 유들유들하고 뻔뻔한 면이 있었다.
“앉아라. 먼저 시작했다. 밥 묵으라.”
“네.”
주형이 차 회장의 오른편에 자리 잡고 혜림이 그 옆에 앉았다. 그들의 맞은편에는 건욱이, 그 옆에 민협이 자리 잡았다.
“좋은 아침이야, 형.”
“그래. 건욱이 오랜만이다.”
주형이 성게알을 가득 입에 넣으며 말했다.
“네 아버지 제삿날에는 코빼기도 안 보이더니, 오늘은 어째 얼굴을 내밀었네. 잘 지내지?”
건욱의 입술이 비뚤게 올라갔다.
안부를 묻는 건지, 시비를 거는 건지.
꼭두새벽부터 모여서 우습지도 않게 가족 행세를 하는 짓은 여기까지가 한계인 것 같다.
“저 먼저 일어나겠습니다.”
“저 새끼는 어른이 말씀하시는데 대답도 안 하고.”
주형이 지껄이는 욕설을 들으며 건욱이 자리에서 일어나는데 차 회장이 뜻 모를 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수술 한번 해야겠다.”
그의 목소리에 시선들이 차 회장을 향했다.
차 회장은 5살 되던 해, 부산에서 고물상을 하던 아버지의 손을 잡고 상경했다. 아버지가 서울에 차렸던 전파사는 어느새 한국의 전자를 대표하는 그룹으로 성장해 있었다.
하지만 빠른 시간에 몸집을 불린 만큼 여기저기 곪은 곳이 넘쳐났다.
그는 자신이 일선에서 물러나기 전에 그룹을 안정화시키고 승계를 마치고 싶었다.
“내 이제 회장직에서 물러날라 카는데 이 땅에서 왜 이리 썩은 냄새가 나노.”
“아버지! 진심이십니까!”
차 회장의 폭탄선언에 주형이 깜짝 놀랐다.
“정말 지금 물러나시겠다고요?!”
입이 찢어질 것처럼 미소를 숨기지 못한 주형이 잔뜩 흥분하여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려는 걸 주형의 부인, 혜림이 재빠르게 팔을 잡아 앉혔다.
‘여보! 말조심!’
혜림의 속삭임에 정신을 번쩍 차린 주형이 억지로 미소를 구겨 넣으며 입에 발린 말을 시작했다.
“아니, 회장님. 이렇게 정정하신데……. 아직 일선에서 물러나시는 것은…….”
하지만 차마 기쁨을 숨기지 못하고 말을 흐렸다. 드디어 주형이 그토록 원하던 W그룹을 손에 넣을 순간이 왔다.
형도 죽고 없겠다, W그룹은 이제 유일한 차 회장의 아들인, 그의 손을 거쳐 민협의 것이 될 것이다.
주형은 차 회장의 입을 행복하게 바라보았다. 어서 원하는 말을 쏟아 냈으면 했다.
“썩은 나무도 많고, 잡초도 많아가 새 나무 심기에는 영 마뜩지 않다. 나무도 베어 내고, 잡초도 뽑고, 약도 치고 땅도 골라야겠다.”
“암― 하셔야죠. 그런데 어떻게 하실 생각이신 건지?”
“최 실장 들어와라 캐라.”
그의 부름에 차 회장 비서실의 수장인 최 실장이 들어왔다. 그는 회장 일가에 고개를 숙여 인사를 한 후 입을 열었다.
“회장님께서는 혁신 전략 기획 본부를 만드실 예정입니다. 그곳에서 현재 비서실에서 맡고 있는 그룹 총괄 역할과 컨트롤 역할을 담당하여 그룹을 안정화시킬 예정입니다.”
혁신 전략 기획 본부는 회장 역할을 대신하는 부서란 이야기였다. 곧 차 회장이 그곳의 수장에게 힘을 몰아주겠다는 뜻이었다.
주형의 심장이 콩닥콩닥 뛰었다. 그는 이미 제 이름을 들은 것처럼 감사의 말을 아버지에게 어떻게 전달해야 할지 고민하면서 차 회장을 바라보았다.
“발표해라.”
차 회장이 고개를 끄덕이자 최 실장이 말을 이었다.
“혁신 전략 기획 본부 본부장은 차건욱 대표님이 맡게 되실 겁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