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화
손다경 때문이야.
건욱과 무조건 잘해 보라고 끝까지 파이팅을 외치던 다경 때문에 그의 눈빛이 자꾸만 오해를 불러일으키는 것 같았다.
서흔이 이곳에서 그와 만나 식사를 한 건 노동이든, 뭐든 천천히 빚을 갚겠다는 이야기를 하기 위해서였다.
그런데 그 말이 입에서만 맴돌고 나오질 않았다. 일시금으로 갚을 수 있다면야 어렵지 않을 말일 테지만 그녀는 천천히 나눠 갚을 수 있게 양해를 구해야 했다.
서흔이 쉽사리 말을 꺼내지 못해 빈 소주잔을 마실 것처럼 들자 그가 병을 들어 소주를 쪼르륵 따라 주었다.
“W호텔에서 일한 지는 오래됐습니까.”
“아니요, 단기로 몇 번 하다가 우연히 가을부터 계약하게 되었어요.”
“예전에는 일한 적 없고요?”
“예전이요?”
“한 10년 전……?”
“하하. 10년 전이면 저 열일곱이에요. W호텔 일 시작한 건 아직 1년이 안 됐어요.”
건욱이 묘한 표정으로 웃었다.
“그렇군요. 일은 어떻습니까.”
지난 가을 계약서를 결재했던 것이 떠올랐다. 업체명인 <플로라유>는 기억하지만 대표의 이름까지는 기억하지 못했다.
계약 자체는 대표가 아닌 업체와 했기에 그랬고, 실제 계약을 이행한 것은 담당 부서였기 때문이었다.
“재미있어요. 같은 예식이나 연회여도 호텔이라 그런지 반응이 남다르거든요. 가용할 수 있는 예산도 개인보다는 훨씬 꽤 크고요.”
“만족스러운가 보군요.”
“네.”
여자가 길게 흘러 내려온 머리칼을 뒤로 넘기며 미소 지었다. 밴드를 붙인 손가락이 눈에 띄었다.
A하우스를 지나칠 때마다 외주 계약 업체에서 일을 한다는 건 알고 있었다.
효율성을 최고의 가치로 두고 진행한 외주 계약이었다. 지금껏 예식 등의 행사를 진행하는 동안 플라워와 관련된 피드백은 언제나 좋았다.
“그쪽, 음 그러니까 차건욱 씨는.”
건욱이 서흔을 바라보았다.
“보안 쪽 업무이신 거죠? 매번 그렇게 늦게까지 근무하는 분들은 다 그 파트더라고요.”
“…….”
보안을 포함한 전방위적 업무를 포괄하여 하는 셈이니 그렇다고 하기도 그렇고, 아니라고 말하기도 그랬다.
“그쪽도 1년 단기 계약이에요?”
“그런 셈입니다.”
대표의 특성상, 올해 자리에 있다고 해서 내년을 장담할 수는 없었다.
차 회장은 철저하게 실력을 우선으로 생각하는 사람이라 호텔의 실적에 따라 가장 먼저 대표 자리부터 손보곤 했다.
“이런 공통점이 있는 줄 몰랐네요. 같은 외주 계약직끼리 한잔해요.”
같은 외주 계약직이라는 말에 서흔이 웃으며 술을 따랐다. 그녀는 시원하게 술을 마셨다.
한두 잔 술을 마시며 고기를 먹던 그녀가 조심스레 그를 보았다. 머릿속에 어떤 생각이 몽글몽글 피어나는 것 같았다.
“나한테 할 말 있습니까.”
“……티 많이 났나요? 친구들이 어디 가서 사기는 절대 못 치는 얼굴이라고 했거든요.”
“사기는 얼굴보다는 머리로 하는 겁니다.”
“하, 참. 말을 해도.”
각 한 병이라 외칠 때와는 달리 서흔은 술이 센 것 같지 않았다.
발그레한 얼굴에 반짝이는 눈망울이 무척 촉촉해진 것이 알코올의 기운이 올라오는 것이 보였다.
“차건욱 씨, 혹시 돈 많아요?”
“왜 그게 궁금한 거지?”
생각지 못한 쪽으로 튀는 질문에 건욱이 눈썹을 찡그렸다.
“아, 그 슈트 말이에요. 천, 십팔! 만 원짜리. 그거 어떻게 산 거예요?”
“카드로?”
“혹시 할부로 긁은 거예요? 어떻게 갚으려고요?”
서흔은 잔뜩 미간을 찌푸리며 건욱을 질책하듯이 말했다. 그녀가 가장 혐오하는 것이 갚을 능력도 없으면서 신용카드 할부 결제로 구매를 하는 것이었다.
“우리 계약직이잖아요. 언제 잘릴지도 모르는 파리 목숨인데 그렇게 쉽게 돈을 쓰면 말년에 거지꼴을 면하지 못해요.”
“지금 날 걱정해 주는 겁니까?”
말년에 거지꼴이라는 말에 건욱이 웃음을 터트렸다. 서흔이 그를 오해해도 단단히 오해하고 있는 게 분명했다.
“아, 그게 아니고.”
건욱의 웃음에 정신이 번쩍 든 서흔이 아차 싶었다.
어쩌다 말이 이렇게 옆길로 샜지?
건욱은 계약직임에도 여유가 넘쳐 보였다. 그래서 혹시 넓은 마음으로 그에게 빚진 천만 원을 나눠서 갚아도 될는지, 물으려 했던 것이었다.
그런데 갑자기 카드라는 말에, 할부라는 말이 자동으로 튀어나오고, ‘말년에 거지꼴’이란 말까지 내뱉어 버렸다.
아무리 그가 경제적으로 여유가 있다고 한들 카드 할부로 고급 슈트를 사는 건 그녀의 경제관념에선 허용할 수 없는 일이었다.
자신도 모르게 철저한 제 시선으로 그에게 심한 오지랖을 부렸던 자신을 혼쭐내고 싶었다.
“제가 선을 좀 넘은 것 같네요. 기분이 나쁘셨다면 사과드릴게요.”
“신선하네. 내 재정 상황을 걱정해 주는 ‘우리’ 계약직은 처음이라서.”
건욱이 ‘우리’라는 말을 강조했다. 그는 웃으며 소주 한 잔을 가볍게 마셨다.
‘뭐야, 그렇게 말하면 다경이 말처럼 정말 나한테 관심 있는 것 같잖아.’
처음 만났을 때만 해도 구멍 난 슈트에 대해 기분이 상한 것이라 생각했는데 자꾸만 그런 기억은 희미해진다.
자신에게 여러 질문을 건네는 것이나, ‘우리’라는 단어를 선택하는 것이나, 이렇게 자신을 바라보는 눈빛이나.
건욱이 그녀에게 관심을 내비치는 것 같아서 느릿하던 심장이 조금씩 속도를 빨리했다.
심장이 두근거릴수록 자꾸만 이 남자의 것들이 각인되듯이 박혔다.
‘나는 슈트 값 때문에 이 자리에 나온 거야.’
처음 그녀의 다짐과는 달리, 자꾸만 그녀의 모든 신경이 그에게 활짝 열리는 기분이었다.
“얼굴이 빨개졌네요.”
“여기가 좀 덥네요.”
서흔은 소주가 가득 든 잔을 들어 올렸다.
“한 잔 할까요?”
“위험한데.”
“뭐가요?”
“글쎄. 뭐가 위험할 것 같아요?”
건욱이 서흔에게 고개를 기울였다. 그의 눈매가 가늘어지자 그녀는 숨이 막히는 것 같았다.
“……모르겠어요.”
그의 시선이 위험했다. 그녀에게 가까이 다가온 그의 체향이 위험했고, 이미 알코올에 의해 마비된 이성이 위험했다.
건욱이 그녀의 손에서 잔을 빼앗아 들어 입 안으로 단번에 털어 넣었다.
“그만 일어나죠. 계산은 유서흔 씨가 하고.”
건욱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옆에 잘 개어 두었던 코트와 재킷을 팔에 걸친 채 테이블 사이의 좁은 복도를 날렵하게 걸어갔다.
갑자기 땡- 하는 소리와 함께 그녀를 감싸던 신비로운 마법이 끝난 것 같았다.
건욱과 서흔은 삼겹살집에서 나왔다. 싸늘한 바람이 두 사람 사이를 가르고 지나갔다.
이제 잘 먹었다는 인사를 서로에게 하고 어색하게 고개를 숙인 뒤 각자의 길로 향해 가야 할 시간이었다.
“차건욱 씨, 왜 밥 먹자고 했어요?”
서흔이 문득 물었다.
정작 물어야 할 말은 천천히 돈을 갚아도 될까요, 였는데 다른 말이 흘러나왔다.
건욱은 그녀처럼 칼끝 위에 서 있는 사람같이 보이지 않았다. 여유가 넘쳐 보였고 수저질 하나에도 귀하게 자란 티가 났다.
그에게 끌리는 것을 인정하기 싫을 만큼, 그는 그녀와 어울리지 않는 사람 같았다.
그래서 일부러 그녀는 이 허름한 삼겹살집으로 식사 장소를 골랐다.
그녀는 좋아하지만 건욱과 어울리지 않는 것 같아서. 그가 싫어하면, 꺼리면, 그를 향한 마음을 접을 수 있을 것 같아서.
그런데 그는 아무렇지 않게 나타났다. 동그란 테이블을 사이에 두고 마주 앉아 삼겹살을 맛있게 먹고 함께 소주잔을 기울였다.
대체, 왜일까.
슈트 값만 갚으면 끊어질 인연에 이런 시간을 애써 만드는 이유가.
그녀는 그의 본심을 알고 싶었다.
“궁금해서.”
“뭐가 궁금한데요?”
“유서흔, 당신이 거슬려서.”
번거로움을 무릅쓰고 이 여자의 아래에 깔렸던 것도.
쓸데없는 일에 휘말릴 필요가 없음에도 그녀를 괴롭히던 남자의 손목을 잡았던 것도.
“아, 나를 그렇게 싫어하는 줄 몰랐어요…….”
당황한 서흔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싫어하지 않는데.”
“방금 거슬린다고 했잖아요.”
“거슬려요, 무척.”
그의 이름 석 자 기억하지 못하는 서흔의 머릿속에 그 시간을 거슬러 올라가 자신을 각인시키고 싶을 만큼.
“차건욱 씨, 나는 당신이 무슨 이야기를 하는지 잘 모르겠어요.”
혼란스러운 눈동자가 건욱을 향했다.
느린 시선이 여린 가로등에 반사되어 빛나는 눈동자에서 서흔의 감쳐문 입술로 내려갔다. 금세 부풀어 오른 입술이 파르르 떨렸다.
갈증이 일었다.
소주 때문인 건지, 함부로 짓밟혀 잇자국이 선명한 입술 때문인 건지 목이 타들어 가는 것 같았다.
건욱이 손을 뻗어 서흔의 뒷목을 잡아 끌어당겼다. 스르륵 그의 품에 안착하듯 감기는 여자의 등을 감싸며 입술을 내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