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화
“야, 그런 거 아니야. 그냥 집에 와서 곰곰이 생각해 보니까 그런 뜻은 아닌 것 같아서.”
“어째서?”
“그 말 할 때 남자의 표정이나 말투가 무척 무덤덤했어. 몸으로 때워요, 청소라도 하라고요, 그런 말처럼.”
“와. 그럼 진짜 천만 원어치 노동으로 채우란 뜻이야?”
“아마도……?”
“천만 원? 대체 몇 시간을 노동해야 갚을 수 있는 거니? 몇 시간이면 될까!”
다경이 눈을 부라리며 누군가를 흉내 냈다.
“그래도 다행이지 뭐. 나한테 있는 건 노동력뿐이니까.”
“차라리 섹스 몇 번이 나을지도.”
“손다경!!”
서흔이 동그란 눈빛으로 그녀를 또렷이 바라보자 장난기가 쏙 빠진 표정으로 다경이 진지하게 말했다.
“아니, 왠지 그 사람 너한테 호감 있는 것 같아서. 누가 천만 원의 보상을 이렇게 너그럽게 해 주냐? 먼저 밥도 먹자고도 했다며, 그거 데이트 신청 아니야?”
“그런 거 아니야.”
부정하는 서흔에게 다정이 말했다.
“그러지 말고 잘해 봐. 너도 호감 있는 거 맞잖아.”
“그럴 여유 없어.”
“네가 힘든 상황인 건 알아. 그렇다고 연애도 하면 안 돼? 그러지 말란 법이라도 있어? 전쟁 통에서도 피어나는 게 사랑이야. 그 남자가 싫으면 모를까, 억지로 밀어내지는 마. 소중한 인연 놓치고 후회하지 말고.”
“하……. 말로는 못 당하겠다.”
서흔이 못 말리겠다는 듯 고개를 흔들자 다경이 기고만장하게 미소 지었다. 그때 테이블 위에 놓인 서흔의 휴대폰이 진동했다.
“그 남자다!”
다경이 당연한 것처럼 외쳤다.
“보지도 않고 어떻게 알아?”
“감이란 게 있잖아, 감. 얼른 확인해 봐. 그 남자 맞아?”
서흔은 다경에게 그 남자와의 일을 털어놓은 것이 정말 잘한 일인 건지 모르겠다는 생각을 하며 휴대폰을 들었다. 알림 창에 메시지가 들어와 있었다.
정말 그 남자였다.
서흔이 내용을 확인하려고 휴대폰 화면을 열려고 하자 갑자기 다경이 서흔의 손을 확 잡았다.
“유서흔, 동작 그만! 그 남자한테 연락 온 거 맞지? 그럼 읽지 마!”
“왜? 연락이 왔으면 확인해야지.”
“넌 밀당도 몰라? 하, 모르겠지. 유서흔은.”
다경이 한숨을 내쉬었다.
“자, 내 말 잘 들어 봐. 남자가 마음에 들면 들수록 한 타임 쉬고 연락을 해야 하는 거야. 이 남자는 오후 내내 네 애간장을 녹였는데 지금 네가 바로 대답하면 넌 완전 쉬운 여자 되는 거야.”
“뭐래, 손다경. 그럴 일 없다니까.”
서흔은 다경의 말을 무시했지만 다경은 서흔의 손을 꽉 쥐고는 놓아주지 않았다.
서흔이 계속 손을 꿈틀거렸지만 다경의 악력에는 역부족이었다.
“이제 손 좀 놓지?”
“안 되지.”
다경이 고개를 저었다.
“암. 안 되고말고. 너, 내가 놓으면 바로 메시지 확인할 거잖아.”
“언제까지 이러고 있을 건데?”
“네가 쉬운 여자가 안 될 때까지. 매력이 철철 넘쳐서 이 남자가 너한테 푹 빠질 때까지.”
“아, 쫌! 혼자 영화 찍니?”
“좀 찍어보자! 유서흔 주연의 격정적인 로맨스로.”
“하, 진짜 손다경!”
서흔이 정말 다경의 주둥이를 한 대 치고 싶어 노려보는데 이번엔 전화가 울렸다.
“좋은 말로 할 때, 손 치워라.”
이를 갈며 말하는 서흔에 다경은 아쉬움을 뒤로한 채 손을 떼었다.
“하, 이 격정 로맨스가 망하면 그건 다, 주연으로서 연기를 제대로 소화하지 못한 네 탓이야. 나의 디렉팅은 완벽했다!”
다경의 고함을 무시하며 서흔이 말했다.
“알았으니까 입 좀 다물어. 자리 좀 비켜 주면 더 좋고.”
“야, 아무 사이도 아니라면서 왜 비켜 달래? 조용히 통화하고 싶으면 네가 나가.”
“내 가게인데?”
“야, 이 치사빤스, 유서흔!”
“편의점이라도 다녀와. 밖에 추우니까 감기 걸리지 않게 옷 잘 입고.”
서흔은 다경의 패딩까지 야무지게 챙겨 가슴에 안겨 준 뒤 다경을 내쫓았다.
다행히 전화가 끊기기 직전 그녀는 전화를 받을 수 있었다.
“여보세요.”
-부르지 않아도 대기하라고 했던 건, 전화를 바로 받으라는 뜻도 포함이었는데. 이걸 일일이 말해 줘야 알아듣는 타입이었습니까.
하! 뭐야, 지금.
전화 늦게 받았다는 이유만으로 머리 나쁘냐는 이야기까지 들어야 하나.
로맨스로 가닥을 잡은 다경의 착각과는 달리 두 사람의 영화는 로맨스가 아닌 극사실주의 같았다. 갑의 막말을 묵묵히 견뎌 내야 하는 을의 참상을 다룬.
“다짜고짜 타박부터 내뱉는 사람이 할 말은 아닌 것 같은데요. 이렇게 예의 없는 분이었던가요. 아니면 밥 말아 먹었나.”
-말아 먹진 않았으니 같이 먹죠. 그 밥, 먹자고 했던 것 같은데.
“좋아요. 밥 먹어요.”
서흔은 입술을 깨물었다. 고민할 거 없이 정확히 무슨 뜻이었는지 묻는 게 나을 것 같았다.
“8시 괜찮죠? 메뉴는 내가 정할게요.”
-원래 이렇게 제멋대로입니까?
“누구한테 배웠어요. 제가 학습에는 탁월한 재능이 있거든요.”
-스승이 뛰어난 건 아니고?
“이따 뵐게요.”
-그럽시다.
살짝 남자의 웃음소리가 들리는 것 같았는데 그게 끝인사였는지 바로 전화가 끊겼다.
서흔이 휴대폰을 귀에서 내리자마자 득달같이 다경이 매장 안으로 들어왔다.
“남자가 뭐래?”
“편의점 안 갔다 왔어?”
“지금 편의점이 중요해? 유서흔의 첫 연애가 시작되냐, 마냐의 기로에서.”
“하, 그런 거 아니래도. 우선 만나기로 했어. 무슨 뜻인지 정확하게 물어봐야 할 것 같아서. 나 8시까지 가야 하는데 매장 정리 좀 부탁할 수 있을까?”
“매장 정리는 내가 알아서 할 테니까. 넌 걱정 말고 다녀와. 그 남자와 무슨 일 있었는지 하나도 빼놓지 말고 이 언니에게 다 보고하는 거 잊지 말고. 알았지?”
계속해서 다경의 놀림에 시달리던 서흔은 겨우 약속 시간에 맞춰 <플로라유>를 나설 수 있었다.
남자는 8시 정각, 약속 장소에 나타났다. 그녀가 저녁 식사 장소로 고른 곳은 동네 삼겹살집이었다.
“이런 분위기 좋아합니까.”
작은 드럼통을 뒤집어 그 위에 동그란 스테인리스를 얹어 놓은 것 같은 테이블을 사이에 두고 서흔과 마주 앉은 남자가 물었다.
서흔은 세월의 흔적이 잔뜩 묻은 수저와 시큼한 냄새가 나는 소독 티슈, 기름때가 잔뜩 묻은 박스 안의 휴지를 지나쳐 ‘존맛탱’이라는 낙서로 도배된 벽을 훑었다.
“네, 좋아해요. 그쪽이 이런 분위기 안 좋아할 것 같아서 골랐는데 만족스럽네요.”
당당한 서흔의 말에 남자가 희미하게 눈을 접었다. 생각지 못한 미소에 서흔이 일부러 둥그런 눈에 힘을 주며 입을 열었다.
“우선, 삼겹살에 소주 한잔할까요?”
“내 의견이 반영이 되는 거였나?”
“아니요, 이모!”
서흔이 주문을 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고기가 세팅되었다.
직원이 덩어리로 된 고기를 직접 구워 알맞은 크기로 잘라 주고 난 뒤, 소주 두 병이 나왔다.
“각 한 병입니까?”
“당연하죠. 문명인으로서 술 가지고 싸우면 되겠어요?”
“싸운 적이 있나 보군.”
“아니요? 건배나 하죠.”
시치미를 떼며 두 잔에 술을 채운 서흔이 잔을 들자 건욱이 픽 웃으며 제 잔도 들었다.
“만나서 반가워요. 어, 그런데 뭐라고 불러야 할까요?”
아직도 남자의 이름을 묻지 못했다.
“차건욱.”
기억하지 못하는 건가. 잠깐 아쉽다 생각하며 남자는 짧게 대답했다.
차건욱?
어디서 들어 본 듯한 이름이었다. 하지만 고민해 봐도 딱히 떠오르는 건 없었다.
“만나서 반가워요, 차건욱 씨.”
“우리가 만나서 반가운 사이 맞나요.”
“우선 만났으니까 반가운 걸로 치죠.”
짠, 하는 소리와 함께 두 사람은 동시에 금세 한 잔을 비웠다. 노릇하게 구워진 고기 한 점을 같이 먹으니 맛이 꿀맛이었다.
“맛 괜찮아요?”
“나쁘진 않군요.”
고기를 넣고 입술을 오물거리던 건욱이 담담히 말했다. 괜찮다고 말하지 않는 남자치고 고기를 먹는 손이 쉬지 않았다.
서흔은 몰래 웃음을 삼켰다. 꼭 남자는 초등학생 시절 괜히 툴툴거리는 아이를 떠올리게 만들었다.
미운 말을 골라 하는데도 막상은 밉지 않아 결국은 그의 입에서 좋은 소리만 나오게 만들고 싶은 그런.
“플로리스트 맞습니까.”
“네. 아, 제 명함 하나 드릴게요.”
서흔은 지갑에서 명함을 꺼내 내밀었다. ‘꽃이 생각날 때, 플로라유’라는 글귀와 함께 유서흔의 이름 석 자와 연락처, 주소가 깔끔하게 새겨져 있었다.
“영업하는 겁니까?”
“눈치 빠르시네요. 혹시 꽃이 필요하시면 언제든지 연락 주세요.”
서흔이 웃으면서 말했다. 건욱이 빤히 그녀를 쳐다보았다.
너무 환하게 웃었나.
갑자기 고정된 시선이 그녀의 얼굴에서 움직이지 않자, 서흔은 괜히 열이 오르는 것 같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