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화
“오랜만이네요, 정수민 씨.”
건욱을 기다리고 있던 사람은 그도 익히 잘 알고 있는, 차 회장이 그토록 그와 결혼을 시키고 싶어 하는 피아니스트 정수민이었다.
건욱은 제 앞에 놓인 커피 잔을 들었다. 입 안에 쌉싸름한 향이 가득 고였다.
저녁이 아닌 어정쩡한 오후에 그를 불러낸 건 차 회장 나름의 배려였을 것이다. 지금은 최소한 차 한 잔 마실 시간만 빼면 되니까.
“한국에는 언제 들어오셨습니까.”
잔을 내려 두며 건욱이 정수민을 보았다.
긴 머리를 뒤로 길게 늘어뜨리고 머리핀 하나를 꽂아 마무리한 여자의 모습은 무척이나 단아해 보였다.
“얼마 안 되었어요. 어떻게 아시고 들어오자마자 차 회장님이 먼저 연락 주셨어요. 너무 감사하다고 전해 주세요.”
역시 이 만남은 차 회장의 철저한 계획 속에서 이뤄진 일이었다.
도 실장이야 차 회장과 자신의 중간에 낀 상태라 해도 최소한 그에게 귀띔 하나 없었다는 게 어이가 없었다.
어찌 되었든 도 실장의 직속 상사는 차 회장이 아닌 자신이라는 사실을 상기시켜야 했다.
“이렇게 빨리 귀국하실 줄은 몰랐습니다.”
빨라야 내년 즈음일 거라 예상하고 있었다. 정운그룹이나 차 회장, 둘 중 어느 곳에도 별다른 언질이 없었기에 그랬다.
“이번에 연주회 일정이 예상보다 타이트하게 잡혀서 예정했던 것보다 일찍 귀국했어요.”
찻잔을 들고 있는 여자의 손가락이 길고 가늘었다. 피아노를 치는 데 무척이나 잘 어울릴 것 같은 손이었다.
잘 관리된 손가락은 우아해 보였지만 그에겐 별다른 감흥이 없었다.
오히려 그 손을 보니 꽃을 다루느라 상처투성인 손이 떠올랐다. 엘리베이터에서 몸으로 때우라던 그의 말에 당황하던 여자의 얼굴도.
귀여웠지.
건욱은 피식 터질 것 같은 웃음을 삼키며 수민에게 말했다.
“이번 연주회가 마지막 공연이라 들었습니다. 은퇴가 아쉽겠습니다.”
“후배들에게 더 많은 무대를 양보하는 건 좋지만 아쉽지 않다면 그건 거짓이겠죠. 이제껏 제 인생은 오로지 피아노였으니까요.”
수민의 귀국 연주회는 그녀의 은퇴식이었다. 올해 돌연 은퇴를 선언한 수민은 한국에서 마지막 연주회를 준비하고 있다.
“그래서 앞으로의 삶이 두렵기도 하지만 반대로 기대되기도 해요. 우리 부모님처럼 화목한 가정을 꾸리는 걸 오랫동안 고대해 왔거든요.”
수민의 귀국은 건욱과의 결혼과 맞물려 있었다. 공식적인 맞선은 아니었지만 두 사람의 결혼은 이미 오랫동안 기정사실이었다.
수민이 귀국한 이후 상견례를 하고 공식 발표와 함께 결혼식을 올릴 예정이었다.
잘 짜인 각본 아래 오늘은 두 사람의 비공식적인 첫 만남이었다.
피아노 대신 결혼이라.
건욱은 시니컬한 표정을 감추었다. 세계를 돌아다니며 공연을 해도 모자랄 판에 결혼 하나에 재능을 죽일 생각을 하다니.
그로선 이해하기 힘든 선택이었다.
“건욱 씨는 어떤 가정을 꾸리고 싶으세요?”
“별달리 생각해 본 적 없습니다.”
차 회장은 건욱의 의사와 상관없는 결혼 계획을 그럴싸하게 짜 두었지만 글쎄.
“아, 네.”
생각보다 무미건조한 반응에 수민은 살짝 당황했지만 이내 마음을 정리했다.
건욱이 다정다감한 스타일의 남자가 아니라는 것 정도는 알고 있었다.
다른 여자에게 차갑고 냉정한 남자일수록 내 남자가 되었을 때 뜨겁고 다정한 남자가 되는 법이다. 마음 졸일 필요는 없었다.
수민은 오히려 여유를 가지고 관대한 여자가 되어야 했다. 그것이 건욱과도 같은 무뚝뚝한 남자를 사로잡는 방법이었다.
“이제 일어날까요? 건욱 씨 바쁘신데 제가 너무 오래 붙잡고 있었던 것 같아요.”
수민은 화사한 미소를 지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다음에는 건욱과 커피 대신 식사를 같이 해야겠다는 생각을 하면서.
* * *
“상무님, 차건욱 대표가 오늘 정운그룹 독녀 정수민 씨를 만났답니다.”
민협은 박 대리의 보고에 인상을 찌푸렸다. 수민이 귀국한 지 채 일주일이 지나지 않았다.
그런데 수민과 바로 건욱이 만났다는 건 차 회장이 두 사람의 만남을 밀어붙였다는 소리였다.
수민은 정운그룹의 무남독녀로, 오랫동안 차 회장이 점찍어 둔 손자며느리였다.
정운그룹은 몇 대에 걸친 탄탄한 투자 그룹으로서 자금력이 국내 최대인 그룹 중 하나였다.
그런 정운그룹을 처가로 만드는 건 차 회장이 나서서 힘을 실어 주는 셈이었다.
민협이 화가 나는 건, 차 회장이 지금껏 챙기는 손자가 차건욱 하나라는 데 있었다.
아무리 차일도의 첫째 아들이었던 차주태가 요절한 이후, 건욱을 아들처럼 키웠다 한들 민협 역시 그의 손자였다.
게다가 민협의 부친인 차주형이 멀쩡히 살아 있었다. 그런데도 차 회장은 아들보다 손자를 챙겼다.
같은 손자로서 민협이 차별을 당할 이유는 전혀 없었다.
“차건욱이 그 여자하고는 만났습니까?”
민협은 지난번 건욱을 호텔 버스 정류장에서 봤었던 걸 떠올렸다.
‘차건욱이 키스를 하다니.’
그와 공개적인 장소에서 키스를 나눈 여자에 대해선 이미 조사를 마친 후였다.
“유서흔 씨 말씀하시는 거죠? 그 이후로는 따로 만나지 않았습니다.”
“그래요…….”
민협은 턱을 손으로 쓸었다.
뭐지. 그 여자에게 관심 있는 거 아니었나.
잠잠한 건욱에 궁금증이 일었다.
“우선 차건욱은 계속 팔로우 업 하세요. 정수민이든, 그 여자든 만나면 바로 보고하시고요.”
“네. 알겠습니다.”
“나가 보세요.”
“저, 상무님. 이정화 씨는 어떻게 할까요.”
박 대리가 마른침을 삼키며 입을 열었다.
“아직도 연락 옵니까.”
치밀어 오르는 짜증으로 민협의 미간에 선명한 주름이 잡혔다.
정화는 그가 요새 만나고 있는 신인 여배우였다. 얼굴도 반반하고 몸매도 좋아서 잘 데리고 놀고 있었다.
하지만 다른 여자들과 한 치의 다를 바 없이 조금씩 소유욕을 드러내며 징징거리는 것이 무척 거슬렸다.
박 대리에게 끊어내라 했지만 역부족인 것 같았다. 그가 나서서 정리하는 것이 나을 것 같았다.
“자리 한 번 만드세요.”
“네, 알겠습니다.”
한결 밝아진 표정의 박 대리가 사무실을 나갔다.
* * *
칙칙.
분무기에서 뿜어져 나오는 수분이 상큼하게 느껴지는 날이다. 서흔은 화분의 잎사귀 한 장, 한 장을 깨끗이 닦아 낸 뒤 분무기를 뿌렸다.
조용히 식물들을 보고 있으면 복작복작한 마음이 조금은 가라앉는 것 같았다.
다경이 분무기를 뿌려 대는 서흔을 물끄러미 바라보자 그녀가 시선을 다경에게 돌렸다.
“오늘은 왜 나왔어?”
“집에 있으면 답답해서.”
요새 다경은 서흔이 출장으로 자리를 비우지 않을 때도 종종 <플로라유>로 나왔다.
“잘 왔어. 가끔 나도 집에 있으면 답답하더라고. 그럴 땐 수다가 최고야.”
그녀의 말에 서흔이 맞장구를 치자 다경이 고개를 끄덕였다.
답답하다는 건 사실 다경의 핑계였다. 언제 또 진수가 들이닥쳐 서흔을 괴롭힐지 모른다는 생각에 가게로 나왔다는 사실을 서흔도 모르지 않았다.
그럼에도 두 사람은 굳이 말로 표현하지 않았다. 가끔은 모른 척을 해 주는 것도 우정의 한 방법이었다.
“서흔아, 연락 올 데 있어?”
“응? 아니. 왜?”
“계속 휴대폰을 보길래.”
다경은 커피를 홀짝였다. 아까부터 서흔은 스스로 인식하지도 못하는지 계속 휴대폰을 힐끔거리고 있었다.
그녀가 보기에 분명 서흔은 연락 기다리는 곳이 있는 것 같았다. 임진수는 분명 아닐 텐데.
“돈 구할 방법을 찾은 거야?”
“아니…….”
“그럼 남잔가?”
“그런 거 아니야.”
화들짝 반박하는 서흔에 다경의 눈매가 가늘어졌다. 서흔은 부담스럽게 반짝이는 다경의 눈동자를 바라보며 옅은 한숨을 내쉬었다.
“남자는 맞는데 그런 남자 아니라고.”
“내가 생각하는 남자는 뭔데?”
“그거야 네가 잘 알겠지.”
말하고 싶지 않다는 듯 거대한 벽을 치는 서흔에 다경이 자리에서 일어나 분무기를 확 뺏어 들었다.
“아, 그러지 말고 말해 봐. 내가 생각하는 남자든 아니든 휴대폰을 힐끔거리는 이유.”
절대 물러서지 않겠다는 듯이 전투적으로 다경이 채근하자 서흔이 자리에 앉았다.
그러곤 A하우스에서 남자의 슈트에 구멍을 낸 사건과 진수를 만났던 날 그녀를 도와주었던 이야기까지 간략히 설명했다. 그가 그녀에게 키스를 했다는 사실은 제외하고.
“그럼 그 남자가 지금 너한테 자자고 한 거야? 와! 그 새끼 완전 쓰레기네.”
이야기를 들은 다정이 급발진했다.
“아니. 그렇게 얘기하진 않았어. 몸으로 때우라고는 했는데…….”
말을 얼버무리는 서흔에 다정이 도끼눈을 떴다.
“유서흔, 그 남자한테 반했네, 반했어.”
“아니야.”
“아니긴 몸을 내줘도 좋겠단 얼굴인데.”
다경이 의미심장하게 서흔을 노려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