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화
서흔은 곤란한 상황에서만 마주치는 남자가 반갑지 않았다.
그녀의 가슴을 뛰게 하고 입술을 뜨겁게 만드는 남자를 앞에 두고 차가운 현실을 자각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
그에 앞에서 한없이 작아지는 자신이.
“상관하지 마세요. 도와주지도 말고요.”
오후부터 참아 왔던 서러움이 톡톡 가슴을 두드려 댔다.
이런 순간이 아니라면, 이런 비참한 기분이 아니라면 다시 만난 남자에게 이름이라도 한 번 물어봤을지도 몰랐다.
하지만 슈트 값도 제대로 변제하지 못하는 그녀에게는 사치스러운 감정일 뿐이었다.
“고맙다는 뜻인가.”
“난 당신에게 더 이상 신세 지고 싶지 않아요.”
그건 그녀의 진심이었다. 어그러지는 서흔의 얼굴을 보며 건욱이 무감하게 말했다.
“신세 아닙니다.”
“하지만…….”
“아닌 걸로 칩시다. 쓰레기를 보면서 그냥 지나칠 수는 없었으니까.”
건욱은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그녀를 보고 그냥 지나칠 수 없음을, 서흔을 붙든 이상한 남자 때문에 그가 무척 짜증이 났음을.
‘아직은 말할 수 없으니까.’
정류장 건너편, 뜻밖의 사람이 그들의 모습을 지켜보고 있는 것도 모른 채 건욱은 여자의 얼굴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 * *
“서흔아, 이제 나가야 할 시간 아니야?”
“응? 아, 가야지.”
뒤늦게 시간을 확인한 서흔이 자리에서 일어나며 가방을 챙겼다.
“요새 왜 이렇게 멍해? 임진수 때문이야?”
진수의 결혼 협박을 간략히 전해 들은 다경은 무슨 그런 미친놈이 다 있냐면서 한바탕 욕을 쏟아 냈다.
그녀는 걱정스럽게 서흔을 보았다.
“걔가 또 연락했어?”
“아니야.”
호텔 버스 정류장에서 만났던 날 이후 임진수는 별다른 연락을 하지 않았다.
돈을 갚은 게 아니니 또다시 찾아올 게 뻔했지만 지금은 잠잠했다. 서흔은 아직 일어나지 않은 일을 미리 걱정하고 싶지 않았다. 걱정을 털어 내고 싶었다.
“내가 좀 알아보고 있으니까 너무 걱정 마. 어떻게든 길이 있을 거야.”
다경이 의기소침한 서흔을 걱정해 일부러 기운 넘치게 말했다.
“응, 고마워. 다경아. 나, 갔다 올게.”
서흔은 그 마음이 고마워 미소 지으며 <플로라유>를 나섰다. W호텔로 향하는 버스에 몸을 실은 그녀는 옅은 한숨을 내쉬었다.
요새 줄곧 기분이 바닥이었다. 엄마가 빚진 1억이라는 큰돈 때문이기도 했고, 잠잠한 임진수 때문이기도 했고, 이름조차 알지 못하는 슈트남 때문이기도 했다.
‘완전히 정떨어졌겠지.’
서흔은 씁쓸하게 웃었다. 기껏 도와줬던 남자에게 고맙다는 말 대신 신세 지고 싶지 않다고 헛소리를 지껄였다.
그녀는 어떻게든 1억을 갚는 일에 온 신경을 집중해야 했고, 그에겐 슈트 값을 갚아야 했다. 그게 최선이라는 것을 알지만.
그날 일이 자꾸 생각이 났다.
그녀를 깊이 바라보던 그 눈동자가, 그녀를 끌어당겨 입을 맞추던 그 입술이 생생했다.
서흔은 눈을 질끈 감았다.
‘빨리 슈트 값을 갚아야 해.’
남자에게 빚진 슈트 값이 그녀의 마음을 괴롭히는 것이라 애써 핑계 댔다.
하지만 서흔은 바로 갚을 만한 돈이 없었다. 그녀는 울고 싶어졌다.
W호텔에 들어선 서흔은 자꾸만 가라앉는 마음을 다잡으며 작업을 시작했다.
다행히 얼마 전, 곧 있을 밸런타인데이 호텔 객실 프러포즈 이벤트를 새로 시작하면서 서흔의 일이 더 많아졌다.
주중이 한가했던 지난달과는 판이하게 다르게 요새는 이틀에 한 번꼴로 호텔로 왔다.
또 좋은 것은 주중에 일을 할 때는 단 한 번도 그를 마주친 적이 없다는 것이었다.
A하우스에서 일을 할 때도 일부러 일을 서둘러 끝내서인지 그를 보지 못했다.
그날 이후 일부러 그 남자가 서흔을 피하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수고하셨습니다.”
작업이 끝난 서흔은 스태프들을 먼저 보낸 뒤, 마지막으로 점검을 끝내고 룸에서 빠져나왔다.
하행 버튼을 누르고 엘리베이터를 기다리며 서흔은 벽에 몸을 살짝 기댔다. 시간이 애매해 점심을 거르고 일을 했더니 기운이 없었다.
엘리베이터 도착 음에 기댔던 몸을 곧추세웠다. 문이 열리자 반갑지 않은 남자의 얼굴이 보였다.
가는 날이 장날이라더니. 만나지 않아 다행이라 생각하기 무섭게 나타난 남자에, 서흔의 심장이 툭 내려앉았다.
“안녕하세요.”
서흔이 어색하게 인사하며 엘리베이터에 올라타자 남자가 고개를 까닥였다.
작은 공간에 두 사람이 나란히 서자 꽉 차는 느낌이 들었다.
서흔은 의식적으로 아무렇지 않은 척하려 했지만 온 신경이 갈수록 그에게 집중되었다.
그는 오늘도 단정하고 멋졌다. 고급스러워 보이는 슈트가 잘생긴 얼굴을 더욱 부각시키고 있었다.
같은 시간에, 같은 공간에 서 있는데도 한 치의 흐트러짐도 없이 완벽한 남자와 달리 무척이나 지친 서흔의 얼굴이 반질반질한 엘리베이터 벽에 비쳐 보였다.
괜히 자존심이 상했다. 서흔이 거울과도 같은 벽을 쳐다볼 때, 휴대폰이 진동했다.
서흔은 가방에서 휴대폰을 꺼냈다.
“이게 뭐예요?”
서흔은 메시지로 받은 사진 한 장을 확인하자마자 고개를 들어 남자를 보았다.
“슈트 구입 명세서입니다.”
“꼭 보여 주실 필요는 없는데요.”
“난 정확한 걸 좋아합니다. 확인해 봐요.”
남자의 말에 서흔은 손가락으로 사진을 확대해 명세서를 살폈다.
“정말 1,018만 원이네요.”
서흔은 혼잣말을 하는 것처럼 중얼거렸다. 그의 말이 거짓이라고는 단 한 번도 생각한 적은 없지만, 명세서의 저 숫자는 너무나 비현실적이었다.
“현물과 돈 말고 새로운 대안이 필요했던 걸로 기억하는데, 맞습니까.”
“…….”
대답이 나오질 않았다. 현물이든, 돈이든, 그 무엇이든 당장 보상할 수 있는 여력이 없었다. 그렇다고 새로운 대안이 떠오르지도 않았다.
“시간 보상으로 바꿉시다.”
“시간 보상이요?”
시간으로 어떻게 슈트 값을 보상하라는 건지 서흔은 그의 뜻을 이해하기 어려워 미간을 좁혔다.
천만 원어치의 시간이라는 걸 어떻게 계산을 해야 할지 감도 잡히지 않았다.
“몸으로 때우라는 뜻입니다.”
“네?”
깜짝 놀란 서흔이 바르르 떨었다.
몸으로 때우라니 설마 그런 뜻인가?
좀처럼 진정되지 않는 마음에 얼굴이 새빨갛게 달아올랐다.
하지만 혼란은 오로지 그녀만의 몫인 듯 그의 목소리는 무척이나 말끔했다.
“이제 와서 갚기 싫은 겁니까.”
“당연히 하루라도 빨리 갚고 싶어요. 하지만…….”
그런 방식으로는 싫다고 말하려고 할 때였다. 남자가 서흔의 말을 잘랐다.
“그럼, 보상하세요. 직접 몸으로. 부르면 달려오고. 부르지 않아도 대기하고.”
“대체 뭐 하자는 거예요?”
“갚을 방법을 알려 주는 겁니다.”
건욱이 시계를 보며 말했다.
“오늘은 밥부터 먹읍시다.”
“지금이요?”
제대로 대답 한번 하지 못하고 남자의 페이스에 말려들고 있었다.
그가 말하는 게 무엇이든 그녀에겐 잠시 생각할 시간이 필요했다.
“이봐요, 오늘은…….”
서흔이 입을 여는데 로비에 도착한 엘리베이터 문이 열림과 동시에 남자의 휴대폰이 울렸다.
받을까 말까, 고민을 하던 사이 서흔의 눈동자가 의문을 담은 채 울리는 그의 휴대폰쪽으로 향했다.
건욱은 하는 수 없이 전화를 받았다.
“네.”
도 실장이었다.
-대표님, 어디십니까.
“무슨 일이죠.”
-차 회장님 호출입니다.
“…….”
차 회장의 호출이라는 소리에 건욱은 잠시 침묵했다. 어쩔까 고민하다가 답을 내렸다.
“5분만 대기하죠.”
-네, 알겠습니다.
통화를 종료한 건욱이 서흔을 바라보았다.
“지금은 안 되겠네요.”
서흔은 알겠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다행이었다. 시간을 벌 수 있을 것 같았다.
“연락드리죠.”
“제가 연락드릴게요.”
조금 더 고민해 봐야 할 것 같았다. 부르면 달려오라는 그의 제안을 받아들일 수 있을지, 아닐지.
“그래요, 그럼.”
남자가 마지막으로 그녀를 한 번 쳐다본 뒤 성큼 엘리베이터를 걸어 나갔다.
넓은 등을 힐끗 본 서흔도 다시 <플로라유>를 향해 로비를 가로질렀다.
* * *
“차 회장님이 이곳에서 보자고 하셨다고요?”
프라이빗 룸으로 운영되는 프렌치 레스토랑 겸 커피숍은 차 회장의 취향이라고는 전혀 볼 수 없는 장소였다. 차량에서 내린 건욱이 도 실장을 돌아보았다.
“네, 저는 이곳에서 대기하고 있겠습니다.”
도 실장은 아무것도 모른다는 표정으로 다시 차 안으로 쏙 들어갔다.
“알겠습니다.”
건욱은 모르쇠로 일관하는 도 실장을 지나쳐 레스토랑에 들어갔다. 그가 들어서자마자 매니저가 건욱을 반갑게 맞이하며 룸으로 안내했다.
설마 했지만 당연하게도 룸에서 그를 기다리고 있는 사람은 80대의 W그룹의 회장 차일도가 아니었다.
“오랜만이에요, 차건욱 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