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화
입맞춤이 이런 것이었던가.
입맞춤이란 그저 욕망을 표출하는 시작 단계라고 생각했는데 생각과 너무 달랐다.
남자의 부드러운 입술이 닿자 온몸이 마비된 것처럼 입술에 모든 감각이 몰렸다.
그의 감촉, 숨결, 열기.
모든 것이 새겨지는 것처럼 그녀의 입술에 닿았다. 동시에 주변의 모든 것이 사라진 것처럼 느껴졌다. 온통 그에게 집중되었다.
입을 맞추는 이 짧은 순간에는 여기까지 쫓아와 그녀를 괴롭히는 진수나, 감당할 수 없는 엄마의 빚도 아무것도 아닌 것처럼 느껴졌다.
사다리에서 떨어지던 그녀를 도와줬던 것처럼 이 남자가 서흔을 지켜 줄 것만 같았다.
그는 단 한 번의 입맞춤으로 불안하게 뛰던 그녀의 심장을 가라앉혔다.
하지만 그녀와 다르게 진수는 남자에게 거친 분노를 느끼는 것 같았다.
콧김을 내뿜던 진수가 앞뒤 재지 않고 남자를 향해 달려들었다.
“이 새끼가 지금 누구한테 더러운 주둥아리를!”
그 모습이 마치 한 마리 코뿔소 같아 서흔은 흠칫 몸을 떨었다. 남자가 진수에게 받쳐 그대로 쓰러질 것만 같아 두려웠다.
“조심해요!”
그녀는 남자를 밀치기 위해 손을 뻗었지만 그가 조금 더 빨랐다. 건욱은 그녀를 안아 보호하며 살짝 몸을 피했다.
쾅.
달리는 속도에, 자신의 몸무게를 이기지 못한 진수가 목표를 잃고 그대로 나동그라졌다. 둔탁한 울림이 발밑을 흔들었다.
“더러웠어요?”
“아니요.”
건욱이 서흔을 보고 묻자 그녀가 아찔한 기분을 느끼며 고개를 흔들었다.
“아니라는데.”
그가 진수를 돌아보며 말했다.
당당한 건욱의 표정에 서흔은 한발 물러섰다. 이대로 진수가 돌아가면 좋겠는데 그는 그럴 생각이 없어 보였다. 골이 난 것이 멀리서도 느껴졌다.
‘아이, 씨!’
쓰러진 진수는 씩씩 숨을 몰아쉬었다. 한 덩치를 자랑하는 그는 동네에서 한 번도 싸움에 져 본 적이 없었다.
씨름 선수처럼 우람한 덩치를 가진 그는 존재만으로도 기선을 제압했고 주특기인 몸통 박치기로 코뿔소처럼 들이받으면 백이면 백, 나가떨어져 일어나지를 못했다.
그런데 건욱은 가벼운 몸짓 하나로 그를 피해 버렸다. 그 결과 바닥에 쓰러져 나뒹군 건 남자가 아니라 자신이 되었다.
열이 뻗쳐 미칠 것 같았다.
갑자기 나타나서는 서흔에게 입 맞춘 것으로도 모자라 자신을 나자빠지게 만들다니. 절대 용서할 수가 없었다.
진수는 몸을 일으켰다.
“이 새끼가 적당히 봐줄라고 했더니만. 너, 사람 잘못 건드렸어.”
진수가 다시 들이받을 것처럼 달려들더니 감추고 있던 주먹을 냅다 내질렀다.
“넌 이제 죽었어.”
무게만큼 묵직하게 힘이 실린 주먹이 그의 덩치만큼 느린 속도로 뻗어 나왔다.
조금 전 건욱의 움직임이었다면 충분히 피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진수의 주먹이 그의 어깨에 그대로 꽂혔다.
퍽!
묵직하게 꽂히는 느낌에 진수가 치열을 드러내며 웃었다. 느닷없이 튀어나와 서흔 앞에서 한껏 폼 잡더니 역시 별거 아니었다.
그런데 맞은 건욱은 타격이 없어 보였다. 그가 가벼운 표정으로 말했다.
“고마워.”
건욱이 맞은 어깨를 살살 돌렸다.
“고마워? 이 새끼가 맞아서 머리가 쳐 돌았나. 주둥아리 놀리는 게 쉽나 본데. 기대해, 곧 그 주둥아리 다물게 해 줄 테니까.”
진수가 더욱 짙게 웃으며 팔을 뻗었지만 웃음은 길게 가지 못했다.
“입은 당신이 다물게 될 거야.”
“뭐?”
“이제부터는 정당방위거든.”
건욱의 말이 무슨 뜻인지 생각할 시간 따위는 없었다.
진수가 뻗은 팔이 남자에게 닿기도 전에 건욱의 긴 다리가 진수의 배를 걷어찼다. 진수는 그대로 나가떨어졌다.
“으억!”
진수의 숨이 턱턱 막혔다. 컥, 컥, 급히 숨을 들이쉬었지만 잘 쉬어지지 않았다. 찢어질 듯한 고통에 진수의 허리가 말려들어 갔다.
하지만 건욱에게는 자비가 없었다. 몸을 피지도 못하는 진수에게 가까이 다가온 건욱이 다시 발을 들어 올렸다. 진수는 다급히 팔을 들어 올려 몸을 막았다.
“그, 그만.”
이건 동네 싸움과는 달랐다. 딱 한 대 맞은 것뿐인데 그 아픔이 상상을 초월했다.
“자, 그럼 이제 무얼 해야 할까?”
음산한 건욱의 목소리에 진수는 정신이 번쩍 들었다.
서흔이 보고 있고, 방금 전까지 열이 받았었고, 그런 건 생각이 나지 않았다. 그저 이 고통에서 벗어나야 한다는 생각뿐이었다.
진수는 급하게 통증으로 아려 오는 허리를 손으로 집으며 무릎을 꿇었다.
“자, 잘못했습니다.”
단번에 굽히는 진수에 건욱이 다리를 내리며 그의 앞에 앉았다. 그는 나직한 목소리로 물었다.
“저 여자랑 무슨 사이야?”
“겨로…….”
저도 모르게 튀어 나가는 단어를 진수는 급히 집어삼켰다.
서흔이랑 특별한 관계라는 듯이 입까지 맞춘 남자가 ‘결혼할 여자’라는 말을 들으면 가만히 있을 것 같지 않았다.
게다가 그 말을 듣고 서흔이 날뛰기라도 하면 남자는 다시 그를 향해 발을 놀리는 걸 주저하지 않을 것 같았다.
“동창입니다.”
“동창? 아까는 여자 친구라며?”
“실언이었습니다.”
“실언에, 추행까지. 악질이네.”
한발 물러서면 자비를 베풀 줄 알았는데, 이게 아닌가.
건욱의 말에 진수가 눈을 둥그렇게 뜨자 건욱이 몸을 일으키며 휴대폰을 꺼냈다.
“잠깐 기다립시다. 나머지는 경찰과 얘기해야 할 것 같으니까.”
“자, 잠시만요!”
경찰이라는 소리에 진수가 화들짝 놀랐다. 만약 아버지가 이 사실을 알게 된다면 진수는 끝장이다.
그는 무릎걸음으로 걸어가 건욱의 바짓가랑이를 잡고 늘어졌다.
“한 번만 용서해 주세요.”
“그건 내가 결정할 일이 아닌데.”
건욱이 서흔을 돌아보았다. 진수는 결정권이 서흔에게 넘어가자 큰 소리로 외쳤다. 당장은 이 상황을 모면해야 했다.
“서흔아, 미안해. 아까는 내가 잠깐 정신이 나갔었나 봐. 다시는 안 그럴게.”
서흔은 진수의 말을 믿지 않았다. 차용증까지 내밀며 협박을 서슴지 않던 진수가 갑자기 개과천선을 할 리는 없었다.
“진짜, 미안해. 서흔아.”
당황한 얼굴로 거짓된 사과를 남발하는 진수를 보자 남자의 말대로 잠시 경찰을 부를까 고민이 되었다.
경찰을 부르면 경고는 될 수 있겠지만 정작 중요한 문제인 빚이 사라지거나 탕감되는 것은 아니었다.
게다가 경찰서로 가게 된다면, 남자의 슈트 값도 보상하지 못한 상황에서 그녀가 진수에게 빚지고 있다는 것까지 알려지게 될 터였다.
고민하는 서흔을 보며 눈치를 살피던 진수가 갑자기 몸을 일으켜 건욱을 향해 달려들었다.
건욱이 옆으로 몸을 피하자 길이 트이는 건 한순간이었다. 진수는 그대로 달아나기 시작했다. 육중한 몸에 어울리지 않는 속도였다.
건욱이 진수를 잡으려 몸을 돌렸지만 서흔이 그의 팔을 잡았다.
“그냥 두세요.”
“경찰을 부르는 게 낫지 않겠습니까.”
“제가 알아서 할게요.”
“알아서 할 수 있는 사람이 나한테 키스했나?”
“그건……!”
서흔은 얼굴에 열기가 확 퍼지는 것을 느꼈다. 당황하여 입술까지 깨물었다.
그녀는 왜 그를 밀어내지 못했을까.
오로지 진수를 떼어 낼 목적이었다면 남자의 키스 말고도 방법은 무궁무진했을 것이다.
하지만 그녀는 그녀의 의사와 상관없는 키스에 뺨을 때리려 손을 드는 대신 그의 목에 팔을 감을 뻔했다.
오감을 그에게 집중한 채 임진수도, 엄마도, 삶의 무게마저도 모두 지워 버릴 뻔했다.
“신고하지 않아도 괜찮아요, 정말로.”
건욱은 대답하지 않았다. 괜찮다는 여자의 말에 주먹이 꽉 쥐어졌지만 더 이상 권하지 않았다.
진수에 대해 묻지도, 그녀에게 또 다른 도움을 제시하지도 않았다.
서흔은 차분한 남자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그녀의 일에 끼어들어 도움을 준 사람치고는 냉담한 반응이었다.
“그보다 어깨 괜찮아요?”
그녀는 진수에게 맞은 그의 어깨를 살폈다. 남자의 옷이 살짝 구겨져 있을 뿐이라 그녀가 육안으로 확인할 수 있는 건 없었다.
“많이 아프죠? 미안해요.”
서흔은 인상을 찌푸리며 손을 들어 올렸지만, 건욱의 어깨를 차마 만질 수 없어 다시 손을 내렸다.
건욱은 방향을 잃고 다시 제자리로 돌아가는 서흔의 손을 보며 대답했다.
“아프진 않지만, 사과는 받아들이죠.”
담담한 그의 목소리에 서흔은 마음이 가라앉았다. 늦은 밤 사다리에서 떨어지던 그녀를 구해 주던 순간과 찢어진 그의 슈트, 오늘 정류장까지.
왜 자꾸 그와 얽혀 드는지 혼란스러웠다.
“왜 자꾸 내 앞에 나타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