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화
“그럼 가짜겠어? 여기 써 있잖아. 자, 봐 봐! 차용증. 채무자 유지란은 위와 같은 조건으로 틀림없이 위 돈 1억을 차용하였으며 연대 보증인은 채무자의 위 채무 이행을 연대 보증하기로 한다. 연대 보증인 유서흔. 봐, 맞지?”
차용증에 적힌 글씨는 틀림없이 엄마의 필체가 맞았다. 게다가 연대 보증인란에는 언제 가져간 것인지 서흔의 도장이 찍혀 있었다.
“말도 안 돼.”
믿을 수가 없었다. 엄마가 늘 사고를 치기는 했지만 도를 넘지는 않았다.
화장품이나 명품 옷, 가방 등을 사기 위해 기백만 원 정도를 빌리는 선에서 끝났지 다른 곳에 돈을 쓰지는 않았다.
그걸 알기에 임 씨도 지란에게 돈을 빌려 주었다. 임 씨는 돌려받을 수 없는 사람에게는 돈을 빌려 주지 않는 사람이었다.
지란이 빌린 돈은 서흔을 통해서 어떻게든 받을 수 있는 금액이었기에 빌려 주었던 것이다.
그런데 1억이라니!
임 씨라면 결코 빌려 주지 않았을 큰돈이었다. 화가 머리끝까지 차올랐다.
“네가 돈이 어디 있어서? 이렇게 큰돈을 우리 엄마한테 빌려 줘?!”
“야, 내가 왜 돈이 없어? 너 우리 아빠가 누군지 몰라? 우리 아빠가 이 동서구 유지라고 유지. 우리 아빠 돈 진짜 많아. 그 돈이 다 내 돈이나 마찬가지고!”
서흔이 힘없이 주저앉았다. 이게 바로 며칠 전 엄마가 그녀에게 전화했던 이유였다.
[엄마는 진수가 너 찾아온다고 했던 게 갑자기 생각나서…….]
또 어디선가 돈을 빌렸다고 짐작했던 추측은 그대로 맞아떨어졌다.
“어머니가 찾아왔더라고. 내가 솔직히 너 봐서 안 된다고 한사코 거절했는데 좀 급하시다잖아. 나밖에 도와줄 사람이 없다는데. 어떻게 해?”
진수는 멍하니 넋을 놓은 서흔의 눈치를 살폈다.
“그런데 이게 기한이 얼마 안 남아서 말이야. 너 이 돈 갚을 수 있냐?”
“…….”
갚을 수 없다. 당장 슈트 값 천만 원도 갚을 수 없는 처지인데 1억이 어디 있을까.
“그래. 못 갚겠지. 네가 그런 형편은 안 되니까. 그래서 말이야. 내가 널 위해 다른 방법을 생각해 봤거든.”
“다른 방법?”
서흔의 물음에 갑자기 진수가 그녀 앞으로 방금 전 산 꽃다발을 내밀었다.
“나한테 시집와라, 유서흔. 그 1억 내가 결혼 자금으로 퉁쳐 줄 테니까.”
“뭐?”
말도 안 되는 이야기에 서흔은 그 자리에 얼어붙었다. 그녀의 반응에 진수가 피식거리며 말했다.
“아, 청혼이 좀 멋없었나?”
진수가 얼어 있는 서흔의 손에 꽃다발을 단단히 쥐여 주었다.
그는 옷매무새를 빠르게 정돈하고 자신의 머리칼을 손으로 휙휙 넘기더니 자연스럽게 무릎 한쪽을 꿇어앉았다.
그러고는 그녀를 올려다보며 씩 웃었다.
“서흔아, 나랑 결혼하자.”
이게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린지.
왜 시련은 하나씩 오는 게 아니라 한 번에 몰려오는 걸까. 왜 그녀를 벼랑 끝까지 몰아붙이는 걸까. 대체, 왜!
“싫어.”
서흔은 꽃다발을 탁자 위에 내려놓았다.
“난, 너랑 결혼 안 해.”
반쯤은 혼이 나가 보였던 서흔의 눈동자에 감정이 완전히 사라졌다.
고민도 없는 단호한 대답에 진수의 표정이 한순간에 변하더니 악쓰듯 말했다.
“결혼 안 하면? 네가 그 돈 갚을 수 있을 것 같아?”
“갚을 거야.”
“어떻게 갚을 건데? 이 주 남았어. 그 안에 네가 무슨 수로 1억을 만들 건데?”
“내가 알아서 해. 너는 상관하지 마.”
“야! 유서흔!”
그때 서흔의 휴대폰이 울렸다. W호텔의 김 대리였다. 당장은 눈앞에 일부터 처리해야 했다. 전화를 받으며 움직이자 편의점에 다녀온 다경이 다가오고 있었다.
“나 다녀올게. 여기 정리 좀 부탁해.”
“알았어. 연락해.”
“응.”
“가긴 어딜 가? 나 아직 얘기 안 끝났어!”
진수가 서흔의 손목을 강하게 움켜잡자 서흔이 진수를 돌아보며 차갑게 말했다.
“돈 갚을 거야. 너랑 얘기도 끝났고. 너랑 결혼하는 일도 없으니까, 그만 돌아가.”
“유서흔!”
진수가 따라붙었지만 서흔은 그를 차갑게 내치며 <플로라유>를 나섰다.
서흔은 호텔로 향하는 동안 계속해서 엄마에게 전화를 걸었다.
<고객님이 전화를 받지 않아, 음성 사서함으로 연결…….>
전화를 받지 않는 엄마에게 다시 전화를 걸었다. W호텔에 도착할 때까지 수십 통, 아니 백 통 넘게 전화를 걸었지만 끝내 그녀의 전화를 받지 않았다.
“이렇게 대형 사고를 쳐 놓고.”
로비에 들어선 서흔의 입에서 깊은 한숨이 나왔다. 당장 엄마를 찾아가 진짜인지 사실을 확인하고 싶었지만 호텔 일부터 정리해야 했다.
“늦어서 죄송합니다.”
서흔은 차오르는 감정을 꾹꾹 누르며 이미 도착한 스태프들에게 사과를 전하고 작업을 시작했다.
* * *
“팀장님, 수고하셨어요.”
“다들 고생했어요. 조심해서 들어가요.”
내일 최종 컨펌을 받아야 했지만 생각했던 이미지대로 작업을 잘 마무리했다.
서흔은 W호텔에서 터덜터덜 걸어 나와 버스 정류장에 앉았다. 다시 엄마한테 전화를 걸기 위해 휴대폰을 꺼냈더니 메시지가 들어와 있었다.
미안해, 서흔아. 지금 당장은 엄마를 원망하겠지만 조금만 기다려 줘. 조금만 기다리면 엄마가 그 돈 다 갚을 거야.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