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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약혼녀가 아니야 (5)화 (5/74)

5화

건욱의 집무실.

딱딱한 대회의용 테이블에 더욱 딱딱하게 굳은 표정의 임원진들이 앉아 있었다.

유일하게 서서 돌아다니는 사람은 건욱이었다. 그는 보고서를 한 장, 한 장 넘기며 입을 열었다.

“로맨틱한 저녁 식사와 인피니티 풀 이용. 이런 이벤트는 다른 호텔에도 충분히 볼 수 있는 것 같은데, 아닙니까.”

밸런타인데이와 화이트 데이는 매년 호텔에서 준비하는 스페셜 이벤트 중 하나였다.

건욱이 보고서를 탁 소리 나게 책상에 내려 두곤 강 이사를 바라보며 다시 입을 열었다.

“특정한 날, 고객이 우리 호텔을 찾는 목적에 충실할 수 있는 쪽으로 생각해 보세요. 밸런타인데이, 화이트 데이 때 왜 연인들이 호텔에 옵니까? 휴양지도 아닌 시내에 있는 우리 호텔에.”

“…….”

“보여 주는 겁니다. 내 사랑이 이렇게 크다는 걸, 내 사랑이 이렇게 특별하다는 걸 내 연인에게, 만천하에 드러내고 보여 주는 겁니다.”

무시할 수 없는 부분이었다. 가성비만 따져서는 절대 W호텔에 묵으러 올 수는 없었다.

전 세계적인 여행업과 호텔업의 침체 속에서 조금씩 W호텔이 다시 살아날 수 있었던 것은 고급화 전략이었다.

최고급 대우를 마음껏 경험할 수 있는 맞춤 서비스로 VIP 고객들을 유치하는 데 성공하자 일반 고객들 역시 W호텔을 더 찾기 시작했다.

더 이상은 특별한 프로모션을 내놓지 않아도 최고의 부킹률을 자랑했지만 건욱은 만족하지 않았다.

“그런 고객의 니즈를 정확히 파악하고 충분히 채워 주는 것이 우리가 할 일입니다. 강 이사님은 우리가 할 일을 제대로 하고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강 이사의 얼굴이 새하얗게 질리며 이마에 송골송골 식은땀이 맺혔다. 영하 16도까지 내려간 1월의 한겨울에.

‘적당히 몰아붙이시지는.’

도성훈 비서실장은 묵묵히 회의록을 작성하며 조용히 있었지만, 속으로는 혀를 찼다.

건욱은 ‘적당히’를 모르는 인물이었다.

임원진들 중에는 차일도 회장 라인도 있었고, 건욱의 반대파도 존재했다.

때문에 그들에게는 채찍뿐만 아니라 당근도 내밀어야 했지만, 건욱은 그렇게 말랑한 인물이 아니었다.

“죄송합니다, 대표님.”

강 이사를 바라보는 시선이 곱지 않았다.

“프러포즈 이벤트를 과감히 확대합시다. 프러포즈 패키지를 신청한 고객 중 몇 명을 뽑아 성대하게 업그레이드해 주는 겁니다.”

“…….”

“기존 꽃다발과 와인 증정에서 멈추지 말고 룸 전체를 꽃으로 꾸미거나 필요하다면 이벤트 업체와도 협업을 통해 제대로 된 프러포즈 이벤트를 제공하세요.”

“아, 예…….”

“이벤트 당첨자는 너튜브든, 별스타그램이든 꼭 SNS에 리뷰 남길 수 있게 하고요. 좋은 홍보가 될 겁니다.”

“물론입니다.”

“세부 사항 정해지면 바로 보고하세요.”

“네, 알겠습니다.”

“회의는 이걸로 마치죠.”

임원진들이 꽁무니 빠지도록 회의실을 나가고 건욱이 자리에서 일어나자 도 실장이 재킷과 코트를 내밀었다.

“많이 지체됐습니까?”

“지금 출발하면 괜찮습니다.”

“그런데 표정이 왜 그러지, 할 말 있어요?”

“네. 한마디 드려도 되겠습니까?”

“아니.”

거절의 대답은 들리지도 않는지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도 실장이 입을 열었다.

“적당히 좀 하십시오. 강 이사님 열심히 일하시는 분입니다. 호텔 초창기부터 같이 시작했던 분이시고 누구보다 W호텔에 열과 성을 다해서―.”

“그래서 실적이 이렇게 곤두박질쳤나.”

“실수도 있는 법이죠. 사람이지 않습니까.”

도 실장의 대답에 금요일 밤 ‘실수’를 입에 담던 여자의 얼굴이 떠올랐다.

“나는 실수 따위 용납할 수 없습니다.”

건욱이 사는 세계에서 ‘실수’는 있을 수 없는 단어였다. ‘실수’란 그저 변명거리일 뿐이었다.

“…….”

차가운 건욱의 옆얼굴을 보며 도 실장은 안타까운 한숨을 삼켰다.

어찌 보면 강 이사보다 더 불쌍한 사람은 치열할 수밖에 없는 삶을 살아가고 있는 건욱일지도 몰랐다.

사무실에서 나오자 빌라 동 앞에 차가 대기하고 있었다.

건욱은 뒷좌석에 올라탔다. 창문 저편에 오늘 하루 겨울을 맞은 듯, 꽃이 사라진 A하우스가 보였다.

“로비 인공 분수 공사는 언제입니까?”

“업체랑 조율 중인 듯합니다.”

“그렇군요.”

미끄러지듯 차가 시내로 향했다.

* * *

“갑자기 로비 화단을 바꾼다고? 그거 작업한 지 얼마 안 됐잖아.”

“응. 그런데 변경하라고 지시가 내려왔대. 별로였나 봐.”

“별로긴! 로비 엄청 예쁘다고, 사람들이 인증 샷 찍어 SNS에 올리고 난리인데.”

잔뜩 풀이 죽은 서흔을 다경이 다독였다. 정말로 W호텔 로비 장식 앞에서 찍은 사진들이 SNS에 많이 올라오고 있었다. 하지만 서흔의 표정은 나아지지 않았다.

“모르겠다. 아무튼 다녀올게.”

“여어, 유서흔.”

서흔이 <플로라유>를 나서려던 순간, 느끼한 목소리가 그녀 앞을 막아섰다.

임진수였다. 왁스를 덕지덕지 발라 넘긴 머리에, 값비싼 명품 슈트 안에는 검은 바탕에 아기자기한 호랑이 무늬가 가득 들어 있는 특이한 셔츠를 입고 있었다.

현금이 다발로 들어 있을 작은 검은색 가방을 옆구리에 끼고, 이 추운 겨울날 발목을 훤히 드러낸 채 반짝이는 구두를 신은 그가 서흔을 보고 씩 웃었다.

“네가 여긴 웬일이야?”

“웬일이긴. 꽃집에 꽃 보러 왔지.”

“그래. 그럼 보고 가.”

진수가 입을 열 때마다 풀풀 풍기는 담배 냄새와 뒤섞인 진한 향수 냄새에 인상이 찌푸려졌다.

서흔은 대충 인사를 건네고 나가려 했지만 진수는 비켜 주지 않았다.

“어디 가? 나 꽃 사러 왔다니까.”

“나는 일이 있어서 지금 나가 봐야 해. 다경이가 도와줄 거야.”

서흔이 다경을 돌아보며 말했다.

“다경아, 부탁 좀 할게.”

“응, 다녀와. 무슨 꽃으로 할 거야?”

다경이 서흔을 서둘러 내보내며 진수 앞을 막아섰다. 하지만 진수는 쉽게 서흔을 보내 줄 생각이 없어 보였다. 그는 다경을 밀치며 서흔의 팔을 붙잡았다.

“꽃도 꽃이지만. 실은 말이야. 나, 네 엄마에 대해 할 말 있어 왔는데. 안 듣고 가도 되겠어?”

“우리 엄마?”

능글맞게 웃는 진수의 미소가 음흉했다.

서흔은 심장이 쿵 떨어지는 것 같았다. 진수가 엄마를 언급하자 지난번 엄마와의 통화가 떠오르며 가슴이 쿵쾅거렸다.

“할 말이 뭔데? 빨리 얘기해.”

“뭐가 그렇게 급해? 나 꽃 사러 왔다니까. 우선 꽃부터 사자.”

“임진수!”

“나 꽃다발 하나 해 줘.”

마음이 급한 서흔과 달리 진수는 쉽게 입을 열 것 같지 않았다.

그녀는 하는 수 없이 가방을 내려 두고 코트를 벗었다. 다행히 아직 30분 정도 여유가 있었다.

“어떤 꽃으로 할 거야? 색상은?”

“네가 좋아하는 꽃으로.”

“가격대는?”

“글쎄.”

“누구한테 줄 건지 모르겠지만 꽃은 비쌀수록 좋은 거야. 크고 화려한 거. 알지?”

이때다 싶어 다경이 일부러 진수를 부추겼다. 허세 가득한 진수가 다경의 바람대로 크게 어깨를 부풀리며 자신감 있게 말했다.

“크고 화려한 걸로. 여기서 제일 비싼 걸로, 만들어 봐.”

한숨을 삼키며 서흔은 장갑을 낀 후 포장지를 꺼내 왔다. 그 위에 망설임 없이 착착 꽃을 배치했다.

흰색 스위트피와 델피늄을 배경으로 핑크로즈와 에스제이장미 등, 톤 다운된 핑크를 주제로 삼았다.

꽃을 끈으로 묶어 단단히 고정 후, 물주머니를 달아 주고 그 위에 여러 겹의 포장지를 물결 무늬로 만들어 겹쳤다.

서흔의 취향대로 화려하진 않지만 진수가 원하는 대로 크고 비싸며 아름다운 꽃다발이 완성되었다.

“자, 여기.”

“네가 좋아하는 꽃, 맞지?”

진수가 꽃다발을 받으며 묻자 서흔이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였다. 이렇게 시간 끌지 말고 빨리 본론을 꺼냈으면 싶었다.

“좋아. 얼마야?”

서흔이 가격을 말하자 진수가 옆구리에 끼고 있던 일수 가방에서 현금을 꺼내 내밀었다.

‘남자는 현금’이라는 말을 입버릇처럼 하는 그는 신용카드를 쓰는 법이 없었다. 언제나 지갑에 기백만 원을 직접 들고 다녔다.

서흔은 작업용 장갑을 벗고는 재빠르게 코트를 입었다. 시간이 꽤 지체된 상태였다. 이제 출발하지 않으면 늦을지도 몰랐다.

“이제 빨리 말해. 할 얘기가 뭐야?”

“아아. 그거? 그런데 손다경 있는 데서 말해도 되나? 네 엄마 일인데.”

“상관없어.”

하지만 좀처럼 진수는 입을 열지 않았다.

“나, 잠깐 편의점 좀 다녀올게.”

다경이 알아서 자리를 피해 주자 그제야 진수가 품에서 편지 봉투 하나를 꺼냈다. 봉투 안에는 편지 같은 종이 한 장이 들어 있었다.

“이게 뭐야?”

“보면 알지.”

진수는 어깨를 으쓱였다.

서흔은 불안한 마음을 억누르며 천천히 종이를 읽어 내려가기 시작했다. 그녀의 낯빛이 어두워졌다.

“말도 안 돼.”

그녀는 부들부들 떨리는 손으로 종이를 꽉 쥐자 진수가 종이를 뺏어 들었다.

“야, 이걸 구기면 어떻게 해! 이게 얼마나 중요한 건데.”

그는 서흔의 말은 들리지도 않는지 중얼거리며 구겨진 종이를 조심스레 펴기 시작했다.

“이거 원본 하나밖에 없단 말이야. 조심해서 다뤄야지. 우리 아빠가 늘 강조했단 말이야. 차용증은 소중히 다루라고―.”

“임진수! 이거 진짜야? 정말 우리 엄마가 너한테 돈을 빌렸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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