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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약혼녀가 아니야 (3)화 (3/74)

3화

W호텔의 우뚝 솟은 본관 뒤로 오래된 빌라 한 동이 있다.

뒤로는 바로 산으로 올라갈 수 있는 산책로가 연결되어 있고 주변은 모두 나무로 둘러싸여 경치가 좋았다.

하지만 지은 지 30년이 지난 건물은 겉모습에서부터 세월의 흔적이 고스란히 보였다. 내부 역시 기본적인 수선을 했지만 사용하기에 불편한 점이 많았다.

호텔 내부에선 줄곧 리모델링을 통하여 VIP 고객 전용의 빌라로 개발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이어졌다.

호텔의 새로운 수익 개선의 창구가 될 수 있는 아이디어였지만 건욱은 그들의 의견에 수긍하면서도 차일피일 결정을 미루고 있었다.

당분간은 사무실로 쓰면 좋겠다는 것이 W호텔의 대표인 그의 의견이었고, 그렇게 건욱은 불편함을 감수하면서 몇 년째 낡은 빌라를 사무실로 사용 중이었다.

건욱의 부친인 고(故) 차주태가 유일하게 직접 지은 건물이라 애착이 있는 거라는 게 행간의 추측이었지만 그를 아는 사람들은 모두 고개를 저었다.

이 건물에서 차주태가 스스로 생을 마감한 것을 처음 발견한 이가 건욱이었고, 그는 그 누구보다 부친을 경멸했기 때문이었다.

비서진들은 이미 다 퇴근한, 밤 11시가 넘어가는 시각.

건욱은 오늘도 사무실에 앉아 업무를 보고 있었다. 줄곧 흐트러짐 없이 서류를 바라보던 눈동자가 무거웠다.

그는 뻣뻣해진 뒷목을 한 바퀴 돌리며 의자에 머리를 기댔다.

편안한 의자에 몸을 폭 안기듯 기대었지만 여전히 목이 갑갑했다. 건욱은 넥타이를 아래로 살짝 내리곤 단추를 두세 개 풀었다.

그러다 습관적으로 시선이 A하우스로 향했다. 본관 건물과 사무실 있는 빌라 동 사이에 정원이 있었고 그 정원 한가운데에는 커다란 회화나무가 있었다.

악귀를 물리치는 염원을 담아 옛날 궁궐이나 마당에 심었다는 회화나무는 건욱의 아버지가 빌라 동을 지으며 직접 심은 나무였다.

금요일 밤이라서 그런지 A하우스의 조명이 훤히 주변을 밝히고 있었다.

어느 날은 늦은 밤까지 나 홀로 반짝이기도 했고, 어느 날은 암흑 속에서 주변 조명에 빛을 의지하기도 했다.

그리고 오늘 A하우스는 늦은 이 시각까지 빛을 밝히고 있었다.

그게 거슬렸다. 무척.

그는 충동적으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거침없이 큰 보폭으로 A하우스로 곧장 걸어갔다.

여자는 한 손에 하얀 꽃을 들고 있었다. 무채색 사이 혼자 색을 가진 것처럼 여자의 모습이 눈동자에 새겨질 듯 강렬했다.

그 모습에 이끌리듯 한 걸음, A하우스 안으로 들어서는 순간이었다. 사다리 위에 있던 여자가 흔들렸다.

고민은 없었다. 건욱은 뛰어들어 그녀를 품에 받아 들며 그대로 쓰러졌다.

품에 안고 나자 물 위에 먹물로 그린 그림처럼 흐릿하던 얼굴이 또렷하게 박혀 들었다.

여자는 옅은 갈색의 눈동자 위에 드리워진 속눈썹을 파르르 떨며 얕은 호흡을 내뱉었다.

그 숨결이 자신의 얼굴로 쏟아졌다.

간지러웠다.

“언제까지 내 위에 올라타 있을 겁니까?”

건욱의 말에 여자의 눈이 화등잔만 해졌다.

“아, 죄송해요. 일어날게요.”

여자가 중심을 잡고 일어나려 팔을 뻗었다. 하필 그녀의 손이 그의 단단한 가슴에 닿았다.

놀라 손을 치우려던 여자가 중심을 잃고 허둥거렸다. 건욱은 여자가 쓰러지지 않게 허리를 잡았다. 작업복 아래로 느껴지는 허리선이 가늘었다.

여자가 붉어진 얼굴로 이번엔 제대로 일어섰다. 그가 가는 허리에서 손을 떼었다.

서흔은 심장이 날뛰는 것만 같았다.

쿵쾅. 쿵쾅.

태어나 처음으로 느끼는 긴장이 오묘하고도 놀라웠다.

이제껏 새로운 일을 시작할 때도, 큰 프로젝트를 앞두고 있을 때도, 일을 망쳤을 때도, 엄마를 찾는 사채업자들을 상대할 때도 이렇게 긴장해 본 적은 없었다.

가슴이 조일 듯 심장이 뛰는 건 이번이 처음이었다.

그게 이 남자가 만들어 내는 분위기에 압도당해서인지, 사다리에서 떨어져 당황해서인지, 아니면 그저 단순히 이 남자에게 반해서인지 알 수가 없었다.

“도와주셔서 감사합니다.”

그녀는 남자에게 손을 내밀었다.

반창고가 곳곳에 붙여진 투박한 손을 힐끗 본 남자는 혼자 가뿐히 일어섰다.

서흔은 어색한 손을 뒤로 물리며 고개를 들었다. 이제껏 그를 위에서 내려다보았던 것이 얼마나 비현실적이었나 싶을 만큼 그는 키가 무척 큰 남자였다.

남자는 먼지가 묻은 슈트를 손으로 탈탈 털며 입을 열었다.

“원래 일을 이렇게 무모하게 합니까?”

“네?”

“혼자 사다리 타는 게 위험하다는 건 어린아이들도 아는 내용 아닌가요?”

감정 없는 눈동자가 서흔에게 쏟아졌다.

“애는 아닌 것 같은데.”

하지만 서흔은 그의 눈동자에 한심함이 담겨 있는 것처럼 느껴졌다.

“말씀이 지나치시네요.”

이 남자, 예쁜 쓰레기였나.

아름다운 얼굴을 하고 초면에 막말을 서슴없이 하는 남자가 어이없었다.

방금 전까지 알 수 없는 열기에 사로잡혔던 것이 찬물을 뒤집어쓴 것처럼 차갑게 식었다.

“일하는 중이었습니다. 안전은 확인했고 예상치 못한 사고였을 뿐입니다.”

혼자 일하는 상황에서 서흔은 더욱 안전에 신경을 썼다. 몸을 다치면 일을 하지 못하게 되고, 그건 그녀만의 피해로 끝나지 않고 업체까지 손해를 끼칠 수 있었다.

하지만 오늘 일은 정말 사고였다. 사다리를 오르기 전 점검을 했었다. 그때는 발견하지 못한 나사가 움직이면서 풀린 모양이었다.

“그 예상치 못한 사고를 막는 것이 안전 확인입니다.”

남자의 시선이 나사 빠진 사다리를 향했다.

“안전 사항 하나 제대로 지키지도 못하면서 나머지 공부하는 것처럼 매번 밤늦게까지.”

남자는 그녀가 열심히 꾸며 놓은 A하우스를 평가하듯이 휙 둘러보았다. 그러고는 다시 서흔을 바라보았다.

“애는 아니라면서요?”

툭 던지는 남자의 말에 화르르 얼굴이 달아올랐다. 고마움을 짓누르며 뭉개진 자존심이 아우성쳤다.

“도와준 건 감사한데 너무 막말하시네요.”

도도하게 치켜든 턱이, 당황과 분노가 뒤섞여 붉어진 눈매가 진한 색을 띠었다.

“내가 도와준 건 기억하고 있나 보군요.”

“그렇다고 해서 제가 무례한 말을 들어야 할 이유는 없습니다.”

건욱은 자신보다 한참 아래에서 반짝이는 눈동자를 내려다보았다.

아버지의 회화나무가 있는 곳. 늦게까지 불을 밝히는 그곳이 오늘따라 더 거슬렸다.

그 이유를 알아보기 위해 여기까지 왔는데 여자를 보고 나니 왜 그를 이곳으로 이끌었는지 알 것 같았다.

그 아이였다.

“이름이 뭡니까.”

뜬금없는 남자의 말에 서흔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남자의 말은 두서없이 이리저리 튀어 올라 무슨 뜻으로 묻는 것인지 가늠하기 어려웠다.

“그건 알아서 뭐 하게요?”

“휴대폰 번호는?”

“설마, 지금 저한테 작업 거시는 거예요?”

방금 아이 같다고 서흔과 그녀의 일을 비난했던 남자가 휴대폰 번호를 물어보는 이 상황이 어이없는 건 그녀뿐일까.

어째서 저 남자의 표정은 태연하기 짝이 없는지 궁금할 지경이었다.

“내 슈트 말입니다.”

건욱이 바지 한 곳을 검지로 가리켰다.

“구멍이 났습니다. 그쪽 가위 때문에.”

서흔의 눈동자가 그가 말한 구멍을 확인하곤 제 앞치마에 꽂혀 있던 가위로 옮겨갔다.

가위가 들어 있던 앞치마 주머니 아래 조그만 구멍이 나 있었다. 그 구멍 사이로 뾰족 나온 가위의 끝이 날카롭게 빛났다.

서흔은 금방이라도 주머니를 아예 찢고 나와 자신의 발등으로 떨어질 것 같은 가위를 꺼내 내려놓고는 물었다.

“혹시 다치진 않으셨어요?”

“다치진 않았습니다.”

가위를 가지고 작업할 수밖에 없는 일이었지만 이건 명백히 서흔의 실수였다. 잘못하면 아찔한 사고로 이어질 뻔했다.

잔뜩 인상을 찌푸리며 서흔이 말했다. 정말 다행이었다.

“죄송합니다. 슈트는 제가 보상해 드릴게요.”

“그건 당연한 거고. 이제 휴대폰 번호 알 수 있는 겁니까?”

“아, 네. 잠시만요.”

서흔은 창피함에 당장 땅으로 꺼지고 싶은 마음을 꾹꾹 참으며 휴대폰을 가져왔다.

“번호 찍어 주세요.”

건욱에게 휴대폰을 내밀자 그가 순순히 번호를 눌렀다.

서흔이 통화 버튼을 누르자 남자의 품에서 진동이 울렸다. 그는 휴대폰을 꺼내 힐끗 화면을 확인하곤 진동을 껐다.

“유서흔입니다.”

그의 시선이 느리게 움직였다. 그녀의 손에 들린 휴대폰에서 흐트러진 작업복 위를, 희고 가는 목덜미를 거쳐 이름 석 자를 말하는 입술 위에 멈췄다.

서흔은 살짝 벌어진 제 입술 위에 내려앉은 눈동자를 바라보았다.

다시 온몸이 긴장되며 심장이 널뛰기 시작했다. 그의 눈빛은 너무도 쉽게 사람을 홀리고 옭아맸다.

“꼭 연락 주세요.”

그녀는 마른 입술을 축였다. 작은 입술을 움직이자 그의 눈매가 살짝 접혔다.

“알겠습니다. 난 주고받는 건 확실한 사람이라.”

“네. 기다리겠습니다. 저도 빚지고는 못 사는 사람이니까요. 꼭 보상해 드릴게요.”

서흔의 대답에 볼일은 끝났다는 듯 건욱이 등을 돌려 그대로 A하우스를 나갔다.

그 뒷모습을 보며 그녀는 쓰러지듯 의자에 앉았다. 한바탕 난리가 난 건 A하우스인데 가장 소란스러운 건 제 마음인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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