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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약혼녀가 아니야 (2)화 (2/74)

2화

두 달 전.

버스에서 내린 서흔은 W호텔로 이어진 언덕길을 걸어 올라갔다.

어제 하루 종일 내린 눈으로 시내는 한바탕 난리였지만, 제설 작업이 완벽하게 되어 있는 호텔로 향하는 길은 꼭 다른 세상으로 연결된 통로 같았다.

자신 혼자만 겨울에서 쏙 빠져나와 봄으로 걸어 들어가는 것 같은 기분에 한창 기분 좋게 흥얼거리며 길을 걷는데 가방에서 휴대폰이 울렸다.

‘유지란’이라는 이름 석 자가 뜬 휴대폰 화면을 보는 서흔의 입에서 옅은 한숨이 새어 나왔다.

“여보세요.”

-이제야 전화 받네. 어제 엄마가 전화했었는데.

“바빠서 몰랐어. 왜 전화했는데?”

-딸이라고 하나 있는 게 딱딱해 가지고 애교라곤 눈곱만큼도 없기는. 그래 가지고 어떤 남자가 좋아하겠어?

“…….”

그놈의 남자, 남자, 남자.

깊은 한숨이 새어 나왔다. 남자 없인, 남자의 사랑 없인 살 수 없는 엄마, 지란의 사고방식은 늘 서흔을 숨 막히게 했다.

“전화한 용건이나 말해. 또 무슨 사고 쳤어? 이번에는 얼마 필요한데?”

-얘, 얘는! 사, 사고는 무슨……. 그런 거 아니야. 누가 들으면 돈 필요할 때만 전화하는 엄마인 줄 알겠다.

“웬일이야. 요점 파악을 제대로 하고. 이번엔 국어 선생님이라도 만나?”

-유서흔! 이게 정말! 엄마 놀리니까 재미있어?

차라리 놀리는 거였다면 얼마나 좋을까.

매번 문제를 만들어 오는 엄마를 비꼬는 말이란 것을 지란은 이해하지 못했다.

어쩌면 이런 제 진심 따위 알고 싶어 하지 않는 걸지도 몰랐다. 언제나 엄마는 딸인 서흔보다 본인의 인생이 중요한 사람이었다.

그래서 사실은 의아했다. 유일하게 자신을 버리지 않은 세상의 단 한 사람이 엄마라는 사실이.

생물학적으로 유전자를 물려주는 일 외엔 아무것도 하지 않은 아버지와, 대학 시절 임신한 지란을 외면한 외가 식구들과는 달리, 지란은 끝까지 서흔을 버리지 않았다.

그것이 서흔이 엄마를 미워하면서도 미워할 수 없는 이유였다.

-엄마는 너 잘 지내는지, 별일 없는지 궁금해서 전화한 건데 이렇게 쌀쌀맞게 굴 일이야?

지란의 부드러운 목소리가 오히려 불안했다. 이 불안함은 엄마가 매번 치는 사고를 그녀가 정리하면서 자연스럽게 터득한 본능 같은 것이었다.

“엄마, 정말 사고 안 쳤어?”

W호텔의 정문이 멀리 보이자 서흔은 멈춰 섰다. 1년 내내 푸른 소나무 위로 하얀 눈이 소복이 쌓여 있었다. 언제 어느 때에도 변함없는 모습만 보여 주는 소나무를 바라보는 그녀의 눈이 시렸다.

“그냥 지금 솔직하게 말해 줘. 임 씨 아저씨한테 얼마 빌렸어?”

임 씨는 일수로 밥벌이를 하는 동네 사람으로, 임 씨의 큰 고객이 바로 서흔의 엄마였다.

신용 불량자인 엄마는 임 씨에게 돈을 빌리곤 했다. 사채보다는 나아도 은행보다는 턱없이 비싼 이자였지만 지란으로선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다.

문제는 직업이 없는 엄마 대신 임 씨가 당연하다는 듯 서흔에게 돈 갚기를 요구했고, 그녀는 들어줄 수밖에 없다는 데 있었다.

엄마가 빌리는 금액 자체가 크지는 않았지만 다 갚을 만하면 다시 돈을 빌리는 바람에 서흔은 매번 지란이 싸지른 똥을 치우느라 바빴다.

-아, 아니래도!

“진짜야?”

-그럼. 이제 다시는 임 씨 아저씨한테는 돈 안 빌리기로 약속했잖아. 엄마는 그냥 갑자기 진수가 종종 널 찾아온다고 했던 게 생각나서……. 요새는 잠잠한가 걱정돼서 연락한 거야. 걔, 걔가 말도 안 통하고 사람 말도 무시하고 뭐, 좀 그렇잖니.

“임진수?”

진수는 임 씨의 외동아들이자 서흔의 고등학교 동창이었다. 그는 아버지 아래에서 일하고 있었다.

진수는 고등학교 때부터 서흔을 쫓아다녔다. 그녀를 향한 진수의 마음은 순수함보다는 광기와 집착에 가까워 그녀는 항상 그를 경계했다.

지금도 종종 진수는 엄마 채무 때문에 그녀를 찾아오곤 했다.

“요새는 잠잠해.”

-그, 그래?

“엄마. 나 아직도 저번에 엄마가 임 씨 아저씨한테 빌린 오백만 원 갚는 중이야. 알고 있지?”

-아, 알아. 아무 일 없으면 됐어. 바쁜 애를 붙잡고 엄마가 너무 오래 통화했네. 끊는다.

돈 이야기를 꺼내자 엄마가 서둘러 전화를 끊었다. 황망히 끊긴 휴대폰 화면이 금세 색을 잃었다. 검게 변한 화면 위로 자신의 얼굴이 비쳤다.

서흔은 제 입술을 짓씹었다. 한사코 지란이 아니라고 하는데도 불안한 마음이 가시질 않았다.

휴대폰을 가방에 넣은 그녀는 W호텔 정문을 비껴 직원들이 사용하는 문을 통과해 들어갔다.

그녀는 시내에서 <플로라유>라는 꽃집을 운영 중이었다. SNS에서 소소한 입소문을 타기 시작할 무렵, W호텔에 다니던 선배에게서 연락이 왔다.

몇 번 단발성으로 일을 하고 난 뒤에는 W호텔과 1년 외주 계약을 체결했다. 그 덕분에 서흔은 친구 다경을 직원으로 채용하며 외주 일에 전념하고 있었다.

“안녕하세요.”

“팀장님, 안녕하세요.”

서흔이 유니폼으로 갈아입고 작업실로 들어가자 먼저 출근한 스태프들이 인사했다. 예전부터 외부 출장 일을 할 때 줄곧 같이 일했던 스태프들이었다.

“간식 사 왔어요.”

“역시 우리 팀장님! 커피, 내릴게요.”

수제 초콜릿 집에서 사 온 초콜릿과 수제 쿠키를 꺼내자 스태프들이 환호했다.

서흔은 갓 내린 커피를 마셨다. 엄마와의 통화로 부글부글 끓던 속이 카페인에 조금은 잠잠해지는 기분이었다.

간식 타임을 끝낸 서흔과 스태프들이 일을 시작했다.

이번에 할 작업은 예식이었다. 예약 고객은 SNS에서 유명한 셀럽으로 이미 예식 장소가 W호텔임을 공개했기 때문에 무척 신경을 써야 했다.

“센터피스 박스 먼저 준비해 주세요.”

“네.”

종이 박스 위에 꽃을 고정할 플로랄 폼을 테이프로 단단히 고정하고는 투박한 플로랄 폼의 귀퉁이를 부드럽게 자르고 차근차근 꽃을 꽂았다.

작업을 진행하며 완성되는 센터피스가 쌓일수록 서흔의 마음을 어지럽히던 걱정들이 공기 중에 흩어졌다.

그렇게 센터피스 작업을 마무리하고 나니 저녁 시간이 훌쩍 넘었다.

스태프들을 식사하라고 보낸 뒤, 저녁 생각이 없어 홀로 남은 서흔은 A하우스에 꽃을 배치하기 시작했다.

W호텔의 A하우스는 VIP 고객만을 위한 커다란 규모의 야외 가든을 갖춘, 한강이 한눈에 들어오는 최고급 연회 공간이었다.

봄, 여름, 가을 세 계절에는 야외에서 진행되었고 겨울에는 화원으로 꾸며진 돔 안에서 예식을 비롯한 각종 행사가 진행되었다.

식사를 마친 스태프들까지 합류하자 작업 속도가 빨라졌고 얼마 지나지 않아 마무리할 수 있었다.

“다들 고생했어요.”

“아우, 팔이야. 팀장님, 고생하셨습니다.”

“시간 늦었는데 먼저 들어가요.”

“팀장님은요?”

“나는 조금만 더 마무리하고 들어갈게요.”

“네. 그럼 먼저 들어갈게요.”

항상 한 타임 늦게 들어가는 서흔이 익숙한 스태프들이 자리를 떠나고, 그녀는 아름답게 꾸며진 A하우스를 쭉 둘러보았다.

“뭔가 아쉬운데.”

고객의 요구에 맞춰 미리 그려 둔 이미지에 부합하게 작업이 마무리됐지만 무언가 하나 부족해 보였다.

‘이 회화나무를 부각하면 좋을 텐데.’

A하우스를 더욱 특별하게 만들어 주는 이 커다란 회화나무는 서흔이 특히 사랑하는 나무였다.

8월에 하얀 꽃을 피우는 회화나무가 겨울에 꽃을 피운 것처럼 머릿속으로 그림을 그려 보았다. 결정을 끝낸 서흔이 장식물을 들고 사다리 위로 올라갔다.

마지막으로 하나만 더 꽂으면 될 것 같아 단단히 사다리를 고정시키고 올라가 손을 뻗을 때였다. 사다리 연결 나사 하나가 빠지며 한쪽으로 휘청였다.

“엄마야!”

순간 당황한 서흔이 중심을 잡지 못하고 몸이 기우는 건 한순간이었다. 떨어지겠구나 싶어 본능적으로 손을 몸 안으로 감싸고 눈을 질끈 감았다.

쾅!

사다리가 쓰러지며 둔탁한 소음을 만들어 냈다.

바닥에 떨어진 서흔은 꼭 감았던 눈을 떴다. 이 정도 높이면 어디든 다쳤을 것 같은데 아프지 않았다.

이상한 예감에 눈을 살며시 뜨다가 서늘한 눈동자와 시선이 마주쳤다. 쌍꺼풀이 없는 또렷한 눈동자가 그녀를 바라보고 있었다.

빨려들어 갈 것처럼 깊은 그의 눈동자에 시선을 돌리지 못했다. 칠흑 같은 검은 눈동자가 빚어내는 묘한 분위기에 압도당했다.

어지러워.

저녁도 건너뛰고 오랫동안 무거운 꽃을 옮기며 진을 빼서인가. 정신이 혼미한 것 같기도 했다.

서흔은 느리게 눈을 감았다 떴다. 여전히 그녀를 향한 시선은 한 치의 흐트러짐이 없었다. 그녀는 마른 입술을 축이며 입을 열었다.

“괜찮으세요?”

“괜찮냐는 말은, 내가 물어봐야 할 것 같은데. 사다리에서 떨어진 건 그쪽 아닙니까?”

낮은 음성이 맞닿은 몸을 타고 그녀 전체를 울리는 것 같았다.

“전 괜찮아요. 어디 다친 곳은 없으세요? 저 대신 그쪽이 바닥에 누워 있잖아요.”

“그래서 말인데.”

그림으로 그려 놓은 것처럼 예술적인 그의 입술이 움직였다.

“언제까지 내 위에 올라타 있을 겁니까?”

남자의 뒤로 하얀 꽃비가 휘날리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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