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내 약혼녀가 아니야 (1)화 (1/74)

프롤로그

벨벳 박스 안의 다이아몬드 반지가 반짝였다. 라운드 브릴리언트 다이아몬드가 세팅된 반지는 깔끔한 실루엣과 아름답게 빛나는 디테일이 돋보였다.

약혼을 앞두고 있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선망하는 웨딩 링이었다.

하지만 반지를 바라보는 서흔의 눈은 건조하고 차분했다. 민협의 눈동자도 지독히 차갑긴 마찬가지였다.

“어때? 마음에 들어요?”

민협이 미소를 지으며 서흔을 바라보았다.

“고마워요.”

서흔은 알맞은 대답을 골랐다. 지금으로서는 그것이 그녀가 할 수 있는 최선이었다.

“지금 해 볼래요?”

“…….”

그녀가 대답하지 않자 자리에서 일어난 민협이 테이블을 빙글 돌아 그녀의 앞에 한쪽 무릎을 꿇었다.

그러고는 무릎 위에 곱게 놓여 있던 서흔의 손을 잡았다.

“축하해요, 내 약혼녀가 된 걸.”

민협은 다이아몬드가 아름답게 빛나는 반지를 그녀의 네 번째 손가락에 끼어 주었다.

서늘한 감촉이 손가락에 느껴졌다. 수수한 그녀의 손에는 어울리지 않는 반지였다.

그녀가 입고 있는 명품 원피스도, 족쇄처럼 느껴지는 이 반지도, 제 앞에 무릎 꿇고 있는 민협도.

그 어떤 것도 서흔과는 어울리지 않았다.

“예쁘네요.”

어느새 자리로 돌아간 민협이 서흔을 보며 손을 뻗었다. 미처 피하지 못한 그녀의 손 위로 그의 손이 겹쳐졌다. 두 사람의 손에서 같은 디자인의 반지가 반짝였다.

“이제 출발해야겠어요.”

시간을 확인한 민협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저녁 식사는 그의 부모님에게 서흔을 소개하며 같이 하기로 약속이 된 상태였다.

서흔이 일어서 민협의 옆에 섰다. 그 자리가 부담스러웠지만 표정을 감추고 대신 꼿꼿하게 허리를 폈다.

“잘하네요, 내 기대보다 훨씬 더.”

민협이 피식 웃었다.

서흔은 떨림을 숨기며 그와 함께 W호텔 로비를 가로질렀다. 완벽한 커플의 모습에 지나가던 사람들의 시선이 모여들었다.

W호텔 라운지에서의 데이트, 네 번째 손가락 위에서 반짝이는 반지는 호기심을 부르기 딱 좋았다.

게다가 그 당사자가 W그룹의 차기 후계자로 거론되는 W어패럴 상무 차민협이니 관심이 더욱 모일 수밖에 없었다.

궁금증 어린 시선들과 관심들이, 맞지 않은 옷을 입고 있는 지금처럼 너무 불편했다.

이곳을 빨리 벗어나고 싶어 서흔이 발걸음을 서둘렀지만 들려오는 낮은 목소리에 저도 모르게 멈춰 섰다.

“유서흔.”

부름과 함께 그녀의 손가락에 길고 차가운 손가락이 엉겨 붙었다. 살짝 당겨진 힘에 서흔이 속절없이 끌려갔다.

순간 그 남자가 앞에 나타났다.

어둠을 담은 것 같은 강하고 무거운 향기와 짙고 서늘한 눈매, 그 아래 채도를 잃은 것은 무감한 눈동자.

민협이 W호텔에서 만나자고 했을 때부터 그를 마주칠지도 모른다고 생각했었지만, 막상 마주하자 손끝이 떨려 왔다.

“어머, 차건욱이다.”

갑자기 나타나 서흔의 손을 잡아챈 남자를 알아본 사람들이 수군거렸다.

그도 그럴 것이 차건욱은 이 W호텔의 대표이자 민협의 사촌 형이었으니 호기심에 궁금증을 더한 눈길들이 세 사람 사이를 부지런히 오가고 있었다.

하지만 건욱의 시선은 오로지 서흔에게 고정된 채였다.

“날 끌어안던 손에.”

건욱이 서흔의 손을 끌어 올리며 낮게 물었다. 그녀의 귀에만 들리는 작은 소리였지만 간담을 서늘하게 할 만큼 섬뜩했다.

“이건 대체 뭘까.”

떨리는 그녀의 손가락에 다이아몬드 반지가 반짝이고 있었다.

“대답해, 유서흔.”

“…….”

질문과 다르게 완전히 감정이 차단된 그의 눈빛은 무감했다.

“이럴 거면 내 위에 올라타질 말았어야지.”

그의 말에 서흔은 눈 끝이 시렸다.

두 사람의 심상치 않은 분위기에 민협이 서흔에게 다가오며 손을 뻗었다.

“서흔 씨, 이리 와요.”

하지만 건욱이 툭, 민협의 손을 쳐 냈다.

“형.”

민협이 비틀린 미소를 지었다.

“손 치워. 내 약혼녀야.”

공개적인 장소에서 이렇게까지 나올 줄은 몰랐는데 건욱은 개의치 않아 보였다.

그들에게 집중되어 있는 호기심은 더욱 그 크기를 키워 가고 있었다.

“지금은.”

건욱이 낮게 읊조렸다. 그 단 세 마디가 갖는 무게에 민협은 짓눌려 얼어붙는 것 같았다.

“지금은, 이라니? 형이 지금 얼마나 위험한 발언 하고 있는 줄 알아?”

“그러게. 왜 내 걸 탐냈어. 욕심부릴 걸 부렸어야지.”

여전히 싸늘한 눈빛으로 건욱이 말했다.

“누가 누구 걸!”

민협이 이를 갈았다. 계획했던 일임에도 불구하고 막상 건욱의 말을 들으니 분노가 치밀었다. 하지만 건욱은 입꼬리를 슬쩍 올리며 말을 잘랐다.

“조심해, 민협아. 내가 언제 다시 찾으러 갈지 모르겠으니까.”

민협의 주먹에 힘이 잔뜩 들어갔다. 자신만만한 건욱의 태도가 무척 거슬렸다.

당장이라도 그의 얼굴을 후려치고 싶은 마음을 꾹 누르느라 피가 안 통할 지경이었다.

민협에게서 쓰윽 시선을 돌린 건욱의 눈동자가 서흔에게 멈췄다.

“다음에 또 봅시다, 유서흔 씨.”

움찔한 서흔이 입술을 감쳐물었다. 그 입술 위로 진득하게 시선을 주던 건욱이 몸을 돌려 그 자리를 떠났다.

“……빌어먹을 새끼.”

건욱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민협은 욕설을 뇌까렸다. 부들부들 몸이 떨릴 만큼 분노가 차올랐다.

하지만 민협은 가까스로 표정을 관리했다. 어쨌건 수많은 사람들의 시선들이 그에게 몰려 있었다. 추잡한 모습은 보일 수 없었다.

“갈까요?”

민협은 부드럽게 웃으며 서흔의 팔을 우악스럽게 움켜쥐었다.

앗, 생각 못 한 악력에 움찔한 서흔이 인상을 찌푸렸다. 부드러운 겉모습과 달리 그의 마음은 결코 부드럽지 않았다.

민협의 차는 이미 대기 중이었다. 발렛 직원에게 상큼한 미소까지 날리며 차에 올라탄 민협은 서흔이 조수석에 앉자마자 급하게 출발했다.

서흔이 놀라며 안전벨트를 맸다. 건욱과의 만남으로 한껏 흥분한 민협의 운전이 거칠었다.

서흔은 자신도 모르게 안전벨트를 손으로 구명줄처럼 꼭 잡았다.

“차민협 씨, 조금만 천…….”

“닥쳐!”

서흔은 입을 꾹 다물며 불안한 시선으로 앞을 바라보았다.

W호텔은 꽤 높은 산 중턱에 위치하고 있기에 시내 중반까지 이어진 도로가 꼭 절벽 위에 있는 것처럼 모두 비탈길이었다.

그 덕에 서울 시내가 한눈에 내려다보여 드라이브 코스로 유명했다.

특히 도로 양쪽으로 빼곡히 심어진 나무들이 장관이었다. 하지만 그런 멋진 풍경은 눈에 전혀 들어오지 않았다.

비탈길을 겁도 없이 빠른 속력으로 내달리는 차 안에서 서흔은 사고가 날까 불안했다.

“끼이익!”

그때였다. 브레이크가 잡히지 않는지 자동차가 도로를 이탈하기 시작했다.

콰쾅!

소름 돋는 충돌 소리와 함께 차체가 심하게 흔들렸다. 무중력을 체험하듯 서흔의 몸이 한순간에 붕 튀어 올랐다.

“으윽!”

동시에 도로에서 쫓겨나듯 미끄러진 자동차가 비탈길 아래로 굴러떨어졌다.

과격하게 흔들리는 차체 안에서 온몸이 부서지는 통증에 서흔은 그대로 의식을 잃었다.

* * *

W그룹 본사.

W전자와 W호텔, W어패럴 등 국내 최대 규모의 기업 집단인 W그룹 본사 앞이 수많은 취재진들로 소란스러웠다.

그들은 W호텔의 대표이자 혁신 기획 전략 본부 차건욱 본부장을 기다리고 있었다.

차량이 도착하고 뒷좌석 문이 열렸다. 모두가 기다리고 있던 건욱이 드디어 모습을 나타냈다.

여기저기서 카메라 셔터를 누르는 소리, 무자비하게 들이대는 녹음기, 그 가운데 쏟아지는 질문들이 뒤섞여 완전 난장판이었다.

이미 대기 중이던 경호원들이 건욱을 둘러쌌다. 그는 휘몰아치는 폭풍 속의 눈처럼 고요히 앞으로 나아갔다.

“W어패럴 차민협 상무의 상태는 지금 어떻습니까?”

“아직도 의식 불명이라는데 그게 사실입니까?”

“함께 동승했던 사람이 차 상무의 약혼녀라는데 맞습니까?”

“차민협 상무의 안위에 따라 후계자 구도가 바뀔 수 있다는 전망에 대해서 한 말씀 부탁드립니다!”

건욱과 민협이 W그룹의 경영권 후계를 두고 경쟁하고 있었기 때문에 민협의 사고에 많은 귀추가 주목되고 있었다.

“교통사고가 고의적이라는 추측에 대해선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아무것도 보이지 않고, 아무것도 들리지 않는 사람처럼 로비의 회전문을 향해 걷던 건욱이 순간 멈칫했다.

이 순간을 놓치지 않고 기자가 물어뜯듯이 달려들었다.

“정말 누군가 고의로 사고를 낸 게 맞습니까!”

기자가 말하는 누군가는 분명 차건욱을 겨냥하고 있었다. 건욱이 후계자의 자리를 차지하기 위해 고의로 민협의 사고를 낸 게 아니냐며.

“…….”

하지만 이내 멈칫한 적이 없었다는 듯이 건욱은 회전문 안으로 들어갔다.

그는 임원 전용 엘리베이터를 타고 W그룹 회장 차일도의 집무실이 있는 57층에 내렸다.

“오셨습니까.”

비서진들이 일제히 건욱에게 인사를 했다.

“회장님은요.”

팔십이 훌쩍 넘은 나이에도 차일도 회장은 여전히 현직에서 떠나지 않고 W그룹의 모기업인 W전자를 진두지휘하고 있었다.

“기다리고 계십니다.”

똑똑. 두 번의 노크 후 회장실 문을 열고 들어가자 커다란 소나무를 그대로 살려 만든 책상 앞에 차 회장이 앉아 있었다.

차 회장은 소리를 죽인 채 TV를 보고 있었다. 이번 W전자에서 출시 준비 중인 신제품으로 얼마 전에 열렸던 CES(국제 전자 제품 박람회)에서 가장 주목을 받은 제품이었다.

실제 사람을 보는 듯 선명한 화면 속 패널들이 민협의 교통사고에 대한 갖가지 추측을 쏟아 내며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부르셨습니까.”

건욱이 허리를 숙여 인사를 했다.

“민협이 사고, 네가 그런 것이냐?”

건욱이 고개를 다 들기도 전에 차 회장의 목소리가 그의 머리 위로 꽂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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